다시 태어난 베토벤 025화
8. 6살, 첫 친구(1)
“하하하. 이거, 이거. 독일 음악가라 니. 이 친구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배도빈에 관한 칼럼 기사를 읽는 내내 미소를 지었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독일 음악가’라고 착각한 부 분을 읽는 순간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영화는 크게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재적인 음악가 알렉스 데 스플로가 음악 감독으로 있으면서, 사카모토 료이치라는 거장이 자문 역할을 하여 영화의 음악만큼은 최 고라고 자부할 수 있었고.
또한 그렇게 인정받았다.
그 훌륭한 영화 OST 중에서 단연 으뜸은 역시 사카모토 료이치의 어 린 음악 친구, 배도빈의 ‘die meiste Hoffnung’이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예의를 차려 진 심을 전해준 다비드 바론에게 답장을 보낸 뒤 초청장을 확인했다.
날짜는 2월 11일. 로스앤젤레스였다.
“아, 마침 잘되었군. 도빈 군에게 좋은 구경도 시켜줄 수 있겠어.”
사카모토 료이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엑스톤의 매니저 나카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생님. 나카무라입니다.
“오랜만일세. 통화 가능하신가?”
-그럼요. 무슨 일이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도빈 군 스케줄을 물어보려 전화했네. 죽음의 유물 제 작사 측에서 초청해서 말이지. 아마 도빈 군에게도 연락이 갔을 텐데.
혹시 받은 이야기 없는가?”
-아니요. 저는 받은 게 없습니다. 영화 OST 작업이라면 엑스톤 외의 일이기에 저희와 연락한 바는 계약 문제를 조율할 때를 제외하곤 없었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럼 연락은 대체 어디로……
-아마 그쪽에는 도빈 군과 연락했던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 주었을 겁니다. 히무라가 한국에 있으니 연락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고맙네. 그럼.”
-네. 확인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사카모토 료이치는 배도빈의 ‘die meiste Hoffnung’를 틀 고는 눈을 감았다.
♪♫♬
이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폭발적인 주제.
긴 곡이었지만 전개의 구성이 완벽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니, 감히 흠을 잡으려 할 수 없었다.
음악을 틀면 어느새 그 격정적인 음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금 그 대작을 모두 들은 뒤 사카모토 료이치가 눈을 떴다.
“이거, 당장 내일을 궁금하게 하는 친구로구만.”
당장 내일은 어떤 곡을 들려줄까.
노년의 사카모토 료이치에게는 배도빈과의 만남이 참으로 큰 활력이었다.
그의 삶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어 준 배도빈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음악이 보다 널리 알 려지도록 돕는 것이 음악을 사랑하는 사카모토 료이치의 최근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래미 어워드를 보게 되면 좋아하겠지. 시기가 참 잘 맞아떨어졌어.”
사카모토 료이치의 곁에는 배도빈 이 지난 한 달간 작곡한 바이올린 독주곡의 악보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뭐지?”
배영빈은 메일함을 확인하는 도중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이메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비……. 데이비드…… 베컴? 이 게 뭐야? 뭐라고 써놓은 거야?”
서브 컬쳐에 관심이 많은 배영빈은 일본어에는 현지인 정도로 능통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정규 과목인 영어는 영 몰랐다.
“도빈. 도빈이네! 도빈! 도빈이한테 온 건가? 미국에서?”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던 단어가 단 하나, 사촌동생 배도빈의 이름이었기에 배영빈은 큰 소리로 옆방에 있을 동생을 불렀다.
“도빈아! 도빈아!”
“도빈아! 배도빈!”
“아, 왜!”
“이리 좀 와 봐!”
“바빠!”
그러나 이제 말문 좀 트였다고 대 들기 시작한 만만치 않은 동생은 배 영빈의 말을 듣지 않았고 배영빈은 어쩔 수 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휴, 진짜. 동생만 아니었음 콱.”
말은 혼줄을 낼 것처럼 말했지만 배영빈은 배도빈의 귀여움에 항상 져주는 자신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배영빈이 나를 불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방해하는 배영빈을 괘씸하게 여겨 대답하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방으로 찾아 왔다.
“어? 포르테 보고 있었구나?”
“바빠. 말 시키지 마.”
음악의 신 뮤즈가 선택한 다섯 요정의 이야기는 그 유치함 속에서도 나를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에는 심심한 나머지 배영빈과 같이 있었는데, 만화나 게 임에 관심이 많은 녀석의 영향으로 나 역시 자연스레 현대의 문화에 익 숙해지고 있었다.
내가 이 소녀들의 이야기에 빠진 건 모두 배영빈 때문이란 말이다.
내가 TV에 집중하고 있자 배영빈 도 슬그머니 옆에 앉아 같이 감상을 했고, 10분 정도가 흘러 하나의 이야기가 끝났다.
“하. 좋네.”
“……왜 불렀어?”
“아, 맞다. 미국에서 연락이 왔어. 근데 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더 라.”
“나한테? 미국?”
“응. 영어니까 미국이겠지?”
영국 나라 말이면 영국을 먼저 떠 올리는 게 정상 아닌가 싶다가.
예전 사고로 생각하면 지금과 맞지 않는 게 많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미국에서라면……. 녹음 파일은 받았는데?’
짐작 가는 일이 없었음으로 나는 내일 히무라에게 그 사실을 전달해 주리라 생각하고.
다시 요즘 푹 빠져 있는 바이올린 독주곡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언제나처럼 나를 녹음실로 데려가 기 위해 히무라가 방문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히무라 씨.”
“하하. 네. 걱정 마십쇼, 어머님. 아, 그런데 혹시 영빈 군이 이메일 받았다는 이야기는 안 했나요?”
“이메일이요?”
“ 아.”
잠시 잊고 있었는데 히무라가 먼저 이메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받았대요. 미국에서.”
질문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자, 히무라가 잘 되었다는 듯 어머니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걸 좀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어머님, 혹시 지금 바로 나가셔야 하는 건……
“아니에요. 아직 조금 시간 있어요. 그런데 미국이라니. 혹시 또 녹음 때문에 가야 하는 건가요?”
“녹음은 아니고 이번에 영화 제작진 측에서 죽음의 유물에 참여한 사람에 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사카모토 료이치 선생이 도빈 군과 함께 가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으”
고작 감사 인사를 받기 위해 그 먼 곳까지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싫어졌다.
어머니와 히무라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셨다.
“왜 그러니?”
“인사는 전화로 괜찮아요.”
사실 고맙다면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세계 각국에 있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만나러 다 니는 쪽의 입장도 이해되는 바.
전화나 이메일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히무라 씨, 사실 이번에는 제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서요. 도빈이가 조금 커서 다시 일을 시작했거든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안으신 어머니께선 이내 히무라에게 우려를 표현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나도 조금은 자랐고(이제 제법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저녁 시간까지는 매일 히무라와 녹음실에 있다 보니 어머니 께도 여유가 생기신 모양.
나를 낳으시고 그만두셨던 일을 다 시 찾아보시더니 며칠 전부터는 ‘학 원’이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학원이라는 곳은 대가를 지불하고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고, 어머니께서는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어머니께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던 나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적어도 나 때문에 어머니께서 미술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줄 어들었으니까.
이제 막 시작하셨으니 시간을 내기 도 어려우실 테고 굳이 미국까지 가 서 어머니를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다.
“아, 그러시군요. 음. 일단 한번 메 일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죠.”
“네. 영빈아, 작은엄마가 컴퓨터 좀 봐도 될까? 도빈이한테 온 메일이 있다던데?”
“네.”
배영빈은 뭔가 요상한 화면을 치우 곤 메일함을 열어주었다.
받는 사람: 도빈 배
참조:
제목: 한국의 은인에게
“도빈 군에게 온 게 맞네요. 다비 드 바론이라고 지니위즈 시리즈를 이끌어 온 사람이 보낸 메일입니다. 한국의 은인에게, 라고 시작하네요. 하하.”
아주 예의 바른 친구인 모양.
히무라가 본문을 천천히 읽어주기 시작했다.
내용:
안녕하십니까, 제작자 다비드 바론 입니다.
저와 죽음의 유물 제작진은 ‘die m eiste Hoffnung(가장 큰 희망)’을 작곡해 주신 도빈 배에게 크게 감사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die meiste Hoffn니ng(가장 큰 희망)’은 두 개의 중요 장면에 수정 없이 포 함시켰으며, 그 외에도 필요한 부분 에 짧게 사용하였습니다.
도빈 배의 도움으로 ‘죽음의 유물:
1부’는 깊이를 더하게 되었으며 이는 제작진과 관객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작사를 대표해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저희는 ‘죽음의 유물: 1부’에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기 위 해 축하연을 마련하였습니다.
메일 하단에 기입된 일시와 장소를 참고하시고, 부디 자리를 빛내주시 길 바랍니다.
추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지 휘자 토마스 필스 경이 당신의 참가를 꼭 희망한다고 전달해 왔습니다.
“날짜는 2월 11일이네요. 미국 기 준이겠죠?”
“네. 역시…… 어려우실까요?”
“아무래도 입시 끝난 아이들이 나 가고 학생들이 새로 들어오는 시기 라서요. 어쩐담.”
어머니와 히무라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메일 내용을 다시금 되짚었다.
나는 이 얼굴도 보지 못한 다비드 바론이라는 남자에 대해 꽤 호감을 느꼈는데.
지금까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를 ‘어린’이나 ‘천재’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다시 태어나고 발표한 곡이 ‘부활’과 ‘가장 큰 희망’뿐이었기에 경우가 많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아직 어린 것 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카무라나 히무라 역시 마찬가지.
그것은 내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기 도 했다.
음악에 관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도 뛰어나다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 이고, 그런 나의 음악이 단순히 ‘어린’ 것과 더불어 평가 받는 것에 불 만을 가져온 바.
사카모토 료이치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나를 제대로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싱글 앨범 ‘부활’ 이후에 나카무라 가 전달해 준 일본 언론의 평은 죄다 그런 식.
그러나 다비드 바론의 편지는 나의 음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이 비쳤고, 나는 내심 그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의 심정은 저도 십분 이해 합니다. 이번에도 나카무라와 사카모토 료이치 선생이 동행할 텐데 혹 시나.”
“그래도 안 돼요. 히무라 씨가 보 시기엔 어떨지 몰라도 도빈이 아직 다섯 살이에요. 나카무라 씨나 사카모토 씨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아 직 어린아이라고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되 긴 하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어머 니에게 나는 그저 이제 갓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눈에 넣어도 아프 지 않을 것만 같은 아들이다.
타지에 혼자 보낸다는 건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있을 수 없는 상황.
‘이해해 드려야지. 만나보곤 싶지만.’
조금 아쉽지만 살아 있다면 언젠가 볼 기회는 분명 생길 것이다.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엄마, 저 비행기 싫어요. 가기 싫어요.”
“도빈아.”
어머니께서 나를 내려다보시더니 이내 쪼그려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나를 응시하 시곤 한숨을 푹 내쉰다.
“도빈아, 엄마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요.”
“ 네?”
“도빈이 미국 가고 싶다고 얼굴에 다 적혀 있는데? 또 엄마 곤란해질 까봐 그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