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24화
7. 5살, 위대한 도약(6)
다음 날.
오늘도 녹음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신기해하며 신시사이저의 건반을 이것저것 눌러보는 중이었는데 히무라가 일본 말로 읊조렸다.
“무슨 연락이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아아. 저번에 미국에 갔잖니. 그거 녹음이 끝났을 것 같아서. ……도빈아.”
“네?”
“너, 너. 일본어는 어떻게.”
히무라가 생선 눈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말을 더듬었다.
이제는 내가 어떤 곡을 만들어도, 어떤 연주를 해도 놀라는 게 시원치 않았는데 저러는 것을 보니 조금은 만족스럽다.
“그렇게나 많이 들었는데 못 알아 들을 리가 없잖아요. 말은 아직 잘 못하지만.”
히무라는 눈도 크게 떴지만 입도 닫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좀 더 어울려주고는 싶지만.
내 연주가 그대로 악보가 된다고 하니 그 놀라움에 매료되어 오랜만 에 13번 소나타 E플랫 장조를 연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27-2번은 감상적이게 되어 개인적 으로는 싫어하지만.
아무튼 연주를 끝내고 나서 악보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니터를 살피는데, 히무라가 내게 말을 걸었다.
“도빈아.”
“왜요?”
“……혹시 너 천재니?”
“ 맞아요.”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히무라는 유능한 것처럼 보이면서 도 가끔 이렇게 실없는 말을 하곤 한다.
그나저나.
“••••••아저씨.”
“어,어. 응. 왜?”
“내 악보 어디 있어요?”
“악보?”
“여기.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내가 방금 연주한 E플랫 장조의 악보가 없다.
지금의 몸으로서는 꽤 공을 들여 연주한 만큼 어떻게 악보가 만들어 졌을지 궁금한데, 찾을 수 없었다.
“아, 그거는 이거 누르고 연주해야 해.”
“보렴. 마우스로 이 버튼을 누르고.”
딩 _
히무라가 말을 멈추곤 집에서 이리로 옮겨온 내 미니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니.
화면에 음표가 뜬다.
허탈한 마음에 축 처질 수밖에 없었다.
“봐. 신기하지?”
“……히무라 아저씨.”
“왜?”
“진짜 싫어.”
“어? 나? 갑자기?”
뚜르르르-
뚜르르르-
그때 히무라의 전화기가 울렸다.
히무라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전화기를 확인하곤 급히 받았는데, 뭔가 좋은 일인 것 같다.
“네, 히무라 쇼우입니다. 네. 네. 아, 감사합니다. 네. 모쪼록 부탁드 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놈의 ‘하이(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고맙다 고 반복하는 걸 보니 혹시나 녹음이 완성되었나 싶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통화를 끊은 히무라가 방금까지 당황하던 모습과 달리 너무나 기뻐하며 내게 말했다.
“도빈아, 가장 큰 희망의 녹음이 끝났대. 파일 보내준다니까 곧 들어 볼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래! 한번 들어보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내 관현악 곡이라니.
정말이지 기대가 크다.
직접 보고, 들은 뒤 인정한 그들이 니만큼 분명 내가 의도한 그대로 훌 륭한 연주를 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 바로 영화에 삽입될 거라고 하더라. 가만. 상영일이 얼마 나 남았지?”
핸드폰으로 뭔가를 찾던 히무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11월 19일. 한국에서는 12월 15 일이네.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어.”
뭔가 들뜬 히무라 때문일까.
나도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12월 15일.
또다시 찾아온 겨울.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영화관이라는 곳을 찾았다.
“크다.”
용산이라는 곳에 있는 영화관은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신기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첫 나들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꽤 무리를 하셔서 시간을 내신 것 같은데, 내 가 걱정스럽게 묻자 싱긋 웃으며 내 뺨을 어루만지셨다.
장편 영화인 ‘죽음의 유물’은 이미 미국에서는 한 달 전에 개봉한 모양.
나카무라는 영화 흥행이 정말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는데, 다시금 비행기를 10시간 이상이나 타고 미 국까지 가서 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지난 한 달간 히무라가 사 준 바이올린을 켜며 기다렸다.
덕분에 이 몸으로도 바이올린에 제법 익숙해질 수 있었는데, 녹음을 통해 악보를 작성하는 기술에 빠져 바이올린 독주곡만 두 곡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곡은 엑스톤에서 내는 첫 정규 앨범에 들어갈 예정으로, 히무라와 사카모토 료이치는 따로 선물을 해줄 정도로 좋아해 주었다.
“어두워요.”
“그치? 발밑을 조심해야 해. 불빛이 보이지?”
“네.”
상영관이라는 곳에 들어서자 어마 어마하게 넓은 방과 그 안에 빼곡히 들어선 소파.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화면이 들어왔다.
영화라고는 사카모토 료이치의 방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라 나는 이 놀라운 환경에 내심 감탄했다.
“영화는 언제 시작해요?”
“30분에 시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도빈아, 콜라 그만 마실까? 이따가 화장실 가고 싶어질 거야.”
“조금만 마실게요.”
“도빈이 엄마 말 안 들으면 이 다 썩어요?”
어차피 이는 한 번 빠질 텐데, 어머니께서는 정말 내게 탄산음료를 주고 싶지 않으신 듯하다.
다시 태어난 뒤 음악을 제외하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 중에 하나인 이 음료를 포기하려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얌전히 어머니께 드리자 싱 긋 웃으시며 받아 드셨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사달라고 부탁 해야겠다.
그러고 갑작스레 어두웠던 상영관 내부가 더욱 어두워졌다.
놀라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봤는데, 아버지께서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시작한다, 도빈아.”
“ 아.”
시작할 때는 이렇게 어두워지는 모양. 조금 기대된다.
“와, 대박. 긴장감 대박이지 않았어?”
“맞아 맞아. 그 쫓길 때 있잖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엄청, 뭐랄까. 가슴 졸이게 된다고 해야 하나?”
“진짜 대박. 나 그 음악 나올 때 쿵쿵 하는 소리 나올 때마다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 거 있지.”
“맞네. 음악 때문인가? 그래. 그런 거 같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하 나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가 나오 니 역시나 여운이 길다.
한동안 멍하니 아버지에게 이끌려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던 나는 로비 에 나온 뒤에도 이야기를 곱씹으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여보, 들었어요? 우리 나올 때 학생들이 말하는 거?”
“들었지. 도빈아, 주인공이 도망갈 때 나왔던 음악에 네가 만든 거였지?”
아버지의 질문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선 한 번 웃은 뒤 제대로 듣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해주셨다.
“네. 맞아요.”
그러고는 다른 사람이 내 음악에 대 해 잠깐 언급한 것을 전달해 주셨다.
“영화 본 누나들이 도빈이 음악 듣고 좋았나 봐. 우리 도빈이 정말 장하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이 남에게 감동을 전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
단 한 곡의 음악을 만들 때도 나는 어떻게 하면 듣는 사람이 아름답 게 느낄까, 가슴을 흔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리고 걱정한다.
나의 음악은 완벽하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음에도, 내 완벽한 음악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최대한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음악을 하나.
그 걱정만큼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반복할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기에 방금 아 버지께서 해주신 말이 반가울 수밖 에 없었다.
“엄마도 너무 좋았어. 우리 도빈이 가 참여한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너 무 재밌더라.”
어머니께서는 날 꼭 안아주셨고.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지난날, 첫 번째 여섯 살의 겨울과는 너무나도 다른 따뜻한 날이었다.
“하하……. 이거, 정말 믿을 수가 없군그래.”
12월 14일.
사카모토 료이치는 일본의 자택에 서 ‘죽음의 유물’ 제작자 중 한 명 인 다비드 바론이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했다.
받는 사람: 료이치 사카모토
참조:
제목: 일본의 거장에게
내용:
미국에서 만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그간 영화의 마지 막 마무리를 위해 분주했고, 개봉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바빴습니다.
‘죽음의 유물: 1부’는 기대한 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충분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에 음악과 효과음에 자문 역할을 해주신 료이치 사카모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작업해 주셨던 ‘Drain’은 영화 전반에 걸쳐 활용될 정도로 훌륭한 곡이었고,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죽음의 유물: 1부’에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자 축하연을 마련하였습니다.
따로 동봉된 일시와 장소를 참고하 시고, 부디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음악 총감독이었던 알렉스 데스플로 역시 당신의 참석을 매우 바라고 있습니다.
추신. 당신이 추천한 음악가 도빈 배의 ‘die meiste Hoffn니ng(가장 큰 희망)’에 관련한 칼럼 기사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제작사로서는 달 갑지 않은 내용이지만, 도빈 배의 음악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를 추천해 주셔 서 감사합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메일 마지막에 있는 초청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비드 바론이 남긴 링크를 클릭 했다.
‘US ENTERTAINMENT’라는 큼 지막한 상단 문구 아래 한 기자의 칼럼 기사가 떠올랐다.
위기의 대작을 살린 소리
지난달 중순, 역사적인 대작의 마 지막을 장식할 ‘죽음의 유물: 1부’를 감상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킴 언크리치의 ‘토이 人누가3’의 아성을 넘을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2010년 마지막 작품이었기에 나는 기대를 품고 영화를 감상했다.
그러나 ‘죽음의 유물: 1부’는 내 기 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단절된 에피소드와 효과적이지 못 한 스토리 연출은 이 시리즈의 대단 원인 ‘죽음의 유물: 2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 중간에 삽입된 음악만 큼은 부족한 연출에도 긴장감을 쥐 게 했으며 때때로 내 가슴을 울렸다.
특히 지니위즈와 그 동료들이 뿔뿔 이 흩어져 도망가는 장면과 지니가 마법부에서 그 지겨운 여자를 공격 하고 도망칠 때 사용된 음악은 영화의 몰입감을 심어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die meiste Hoffnung’는 가장 큰 희망이란 독일어로, 나는 결단코 이 신인 독일 음악가가 다음 ‘죽음의 유 물: 2부’에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