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9화 (1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19화

    7. 5살, 위대한 도약(1)

    “그럼 기대하고 있겠네, 도빈 군.”

    “네.”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일본에 머 문 지 벌써 20일이나 흘렀다.

    다시 태어난 이후 가장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내 음악을 너무 도 잘 이해해 주었고, 그런 그와 음악을 함께 향유하는 일은 그 무엇보 다 즐거웠다.

    그의 음악적 지식은 바다와 같았으며 현대 음악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그만은 내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반대로.

    의외로 사카모토 료이치가 고전 음악, 그러니까 내가 살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나는 그에게 바흐와 비발디의 위대함을 전파해 주느라 애썼다.

    훌륭한 음악가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그는 내가 분석하고 해설하는 바흐와 비발디의 곡을 보고는 깜짝 놀 라곤 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지니위즈 시리즈’에 대해 만족할 만큼 이해한 나는 곧장 테마로 쓸 멜로디를 만들어 사카모토 료이치에 게 들려주었다.

    “역시.”

    주제만 가지고 즉흥해서 피아노 연주를 하니 사카모토 료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더 이상 일본에 머물고 있을 수 없었기에 악보 교환은 나카무라를 통해 하기로 약속.

    지금은 공항에서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참,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들어갈 곡은 하나일세. 온전한 곡 하나를 넣어야 하는데, 엑스톤 음반을 준비하는 것과 병행할 수 있겠나?”

    히무라 프로듀서가 사카모토 료이치의 우려를 전달해 주었고.

    나는 그가 내게 처음으로 내비친 걱정을 지워주고 싶었다.

    두 개의 교향곡을 함께 만들기도 했고, 여러 곡을 동시에 만드는 일 에는 익숙하다.

    그것을 말해줄 순 없으니 나는 그 가 내민 손을 꼭 잡는 것으로 대신 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사카모토 료이치가 씩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윽.”

    “도빈아, 토할 것 같아? 화장실 갈까?”

    도리도리.

    여전히 기분 나쁜 일이지만,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었다.

    인천이란 곳에 내린 나는 속이 울 렁거려 괴로운 와중에 마중 나온 아 버지에게 안겼다.

    “어이구, 우리 도빈이. 아빠 보고 싶지 않았어?”

    사카모토 료이치와 서로의 음악을 공유하느라 아버지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했다간 마음 약한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것이 뻔했기에 나는 한 번 더 꼭 끌어안는 것으로 아버지를 위로했다.

    나와 어머니가 일본에 가 있는 동 안 아버지는 꽤 외로우셨는지 나를 안아 들곤 좀처럼 놔주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와 키스를 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는데, 가운데에 낀 나로서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으읍!’

    “아아!”

    두 분 사이가 좋은 거야 환영할 만한 일이다만 그 때문에 내가 숨막혀 죽을 순 없는 법.

    내가 발버둥을 치자 그제야 두 분 이 떨어지셨다.

    “그래, 그래. 우리 도빈이도 뽀뽀.”

    “..웩.”

    내가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 만, 30대 남성과의 키스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상처를 받으신 듯.

    “도빈아, 아빠한테 뽀뽀 한 번 해드려. 응?”

    내 심정도 모르시면서 어머니께서는 우울해진 아버지를 위해 내게 가 혹한 일을 권하셨다.

    난감하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자 아버지께서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한 번 더 거절했다간 한동안 오래 갈 듯하다.

    ‘이이이 익.’

    정말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의 볼에 입을 가져다대는 그 순간.

    아버지께서 고개를 돌리셨고 결국 입을 맞추게 되었다.

    “아! 아빠!! 더러워!!”

    확실히 일본으로의 여행, 사카모토 료이치와의 만남이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듯했다.

    “좋아.”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앨범에 들어갈 두 번째 곡 ‘Hochgefühl(넘치는 기쁨)’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과 부모님 그리고 사카모토 료이치라는 멋진 친구를 만나면서 느낀 기쁨을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곡의 전개를 전면적으로 수정을 하였는데 처음과는 그 형태가 제법 달랐다.

    첫 번째 곡 ‘Auferstehung(부활)’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 후대의 이들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좀 더 기 교가 들어간 느낌이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영화 테마곡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카모토는 내게 피아노 독주곡을 바라는 듯했지 만, 그 이야기의 비장함과 장엄함을 나타내기에 오케스트라만큼 효과적 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세 번째 곡이자 C단조의 소나타, ‘Freund(벗)’을 작곡하는 와중 현대의 오케스트라는 어떤 식으로 연주를 하는지 알아보았다.

    이유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첼리스트 이승희.

    그녀의 비올론첼로 연주는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아무래도 18 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만큼 연주 법이 발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축적된 지식과 이승희 본인의 노력으로 인한 그 아름다운 연주 에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 전혀 따라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시간적 차이를 느낀 이상 다른 악기에도 그러한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많은 수의 악기를 활용하는 오케스트라곡이라면 그 차이를 인지할 필 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갓난아기 때부터 낭 만파 음악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사카모토 료이치는 적어도 자신은 나 루 트비히 판 베트호펜이 사망한 시점을 고전의 끝, 낭만의 시작으로 판 단한다고 한다).

    덕분에 그 격차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

    물론 드뷔시나 리스트, 라흐마니노 프의 피아노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도 나는 놀랐고 또 그 신선함에 기뻐했다.

    단언하건대 그들의 곡과 연주는 그 자체로도 빛이 난다.

    그야말로 저 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북극성과도 같다.

    하지만 한두 번 들어보면, 내 연주 실력으로 충분히 그만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연주 실력 자체에는 차이가 없었고

    단지 개념이 조금씩 발전 또는 변화 해 왔다는 느낌이었기에 말이다.

    고로 내가 앞으로 몇 년 더 이 몸으로 피아노 연주에 익숙해진다면 그들보다 충분히 나아지리란 생각이 들었는데.

    정리해 보면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현 시대, 21세기의 연주자들이 어느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지, 지휘 자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파 악해야 내가 온전한 곡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변화 또는 발전한 개념을 좀 더 이해해야 함은 나로서도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래야 비로소 현대의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으로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저 나는 1800년 그대로일 테니까.

    “음악 듣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마쳤으니 남은 것은 행동뿐.

    나카무라 매니저를 통해 몇몇 DVD(영화를 보던 물건이다)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했다.

    “한스 리히터 4세가 지휘한 공연 영상이란다.”

    나카무라의 말을 히무라가 통역해 주었고, 나는 고생해서 자료를 준비 해 준 나카무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빈 필하모닉이라. 대단했지. 2004 년인가? 그렇다면 유럽을 위한 음악 회(Konzert für Europa)가 좋았지.”

    “그래. 기억나는군그래. 정말 어마 어마했었지. 특히 베토벤의 9번 교 향곡에선 정말이지 감동할 수밖에 없었네. 그러고 보니 자네랑……

    나카무라와 히무라가 일본말로 저 들끼리 잡담을 떨고 있을 때, 나는 내 피아노 연습실 옆에 마련된 방에 들어갔다.

    ‘Wiener Philharmoniker(빈 필하모닉)’이라.

    빈이라면 인연이 깊다. 30년 넘게 살았던 곳이기에 사실상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고 보니.’

    오케스트라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1824년 5월 7일.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의 아카데미 공연을 위해 나는 케른트너토어 극 장 전속 오케스트라에 추가 인원을 요구했고, 그들은 면접을 통해 연주 자를 선발했었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오케스트라가 없다시피 했고 또 인원도 충분치 않았기에 서둘러 뽑았는데.

    나는 9번 교향곡의 연주회에 더블 링(한 파트를 두 명이 연주)을 바랐기에 평소보다 인원이 더 필요했다.

    내가 생각한 감성을 전달하기 위해 서는 그만큼 음량도 중요했기에 선 택했던 것.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와중에, 어쩌면 나는 무리한 행동을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나는 오로지 현악기 연주자들의 파지법과 현을 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연주 진행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세한 전달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미하엘 움라우프를 앞세우고 그에게 지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숨이 차올랐다.

    성악 합창단의 마지막 파트만 남기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 두 마치고 공연이 끝나길 기다릴 뿐 이었다.

    ‘제대로 된 것인가.’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가슴속에 근원을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것을 느끼고서야 돌아섰다.

    내 눈앞에 관객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 손뼉을 치 고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성공했군.’

    그러나 나는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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