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018화
6. 5살, 음악이 필요한 곳(3)
“네?”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히무라가 놀 라 물었다.
“본인이 마음을 바꾸면 되지 않겠나. 하하하.”
너무도 어이없는 말에 히무라는 말을 잃었다.
오늘 사카모토 료이치가 하는 말을 좀처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마 지막에는 허무하기까지 하였다.
“본인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 된다네. 걱정 말게. 나 역시 겪었던 과정이니 내가 제일 잘 알 아. 도빈 군은 반드시 이 일을 하게 되어 있네.”
“……네.”
히무라는 오늘 처음으로 대가, 사카모토 료이치 선생을 못 미덥게 생각하였다.
*
벌써 일주일째.
나는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한다든가, 그로부터 ‘기타’ 라는 훌륭한 악기를 배운다거나.
그러지 않을 때는 영화를 보는 데 심취했다.
덕분에 이제는 통역을 해주는 아가 씨와도 제법 가까워졌다.
“도빈아, 초콜릿 먹을래?”
“네. 주세요.”
“아으, 귀여워〜”
이 젊은 여성이 건방지게 내 볼을 꼬집는다거나 멋대로 사진을 찍는 게 불쾌하긴 해도, 단 것을 주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고 있다.
아무튼.
사카모토 료이치의 영화 콜렉션은 대단했다.
그것들을 구경하는 와중 나는 독일 에서 만든 영화 역시 있는 것을 발 견,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쓰던 독일어와는 조금 다르긴 해도 유추해 볼 수 있는 정도라 내 가 알고 있는 독일어와 지금 사용되는 독일어가 다름을 인지할 수 있었고,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 과정 덕분에 나는 영화 라는 문화 활동에 더욱 빠져들었다.
어머니를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 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 적인 묘사와 효과적인 연출에 기껏 해야 180년 전의 거리 연극이나 오페라 정도에 익숙했던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금씩 내 안에 변화가 찾아왔다.
영화를 듣는 와중에, 문득문득 내가 아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차르트. 때로는 나의 곡. 때때로 비발디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영화에는 수많은 음악이 함께하고 있었다.
내 생각과 다르게.
영화 속에서 버무려진 곡들은 끊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생명과 의미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역시 하나의 형태란 말인가?’
분명 단지 영상과 함께 있을 뿐인데, 뚝 하고 떼어져 나온 음율이 그 자체로도 큰 감동을 주었다.
몇 번을 더 듣고.
영화에 삽입된 다른 몇몇 곡의 원본을 들어보면서 나는 조금씩 이 또 다른 형태의 예술에 대해 조금씩 이 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카모토 료이치에게 물었다.
“사카모토는 왜 음악을 해요?”
조금 분하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음악이 어떻게 쓰이는가.
음악이 어디에 필요한가.
그리고 나의 음악이 더 넓은 세상에 소개되는 방법에 대해, 확실히 사카모토 료이치는 내 이정표가 되 어주고 있었다.
과거 어떻게든 나를 착취하려 들었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그에게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
속물이라도 좋았다.
지난날 나약한 나를 지키기 위해 해왔던 음악, 자유를 갈구하며 고뇌 속의 나를 담았던 음악.
내게 있어 음악은 그러했다.
혹은 나처럼 사회에, 시대에, 환경 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해 곡을 써내렸다.
나의 음악은 신음이자 절규.
포효이자 갈구다.
“음…….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
사카모토 료이치는 잠시 고민하더 니 이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떠오르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네. 어쩌면 그게 나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르 다네.”
나는 굳이 그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아 가만히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통역가는 사카모토의 말을 뒤이어 전해주었다.
“나는 음악이 보다 솔직해지는 방 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네. 쉽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아마 음악을 사색할 여유조차 없는 거겠지. 대중이란 항상 그러했으니까.”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하하하하!”
사카모토의 말은 이해하기 조금 어 려웠지만, 통역을 해주는 아가씨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간혹 말을 쉬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 시대는 과거 그 어떠한 때보다 음악을 필요로 한다네. 적어도 내가 젊었을 때보다는 지금이 더 외롭거든.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 외롭다.”
“그렇네. 나는 얼마 안 남은 내 생에 최선을 다해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 것이고. 그것 이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라네.”
사카모토 료이치가 싱긋 웃은 뒤.
“그리고.”
내가 그 말을 모두 전해 듣는 것을 기다렸다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자네 역시 그러한 때에 태어난 게 지.”
음악이 가장 필요한 시대에 다시 태어났다라.
이 역시 신의 장난인가?
여러 편의 영화를 감상한 나는 영 화를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에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음악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자막이나 부연 설명만으로는 영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음악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
덕분에 나는 어느 정도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아마 이것이 영화에 음악을 삽입하는 이유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효과음’, ‘배경음’ 등 영화는 소리를 정말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가 운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 법도 종종 있었다.
또 내 예상보다 훨씬 큰 효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카모토 료이치의 콜렉 션으로 있던 영화, 엘비라 마디간(EIvira Madigan, 1967)은 마치 수채 화 같은 영상과 더불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를 흘려 보내 내게 감동을 선사했었다.
그 외에도 로렌조 오일(Lorenzo's Oil)이라는 영화 등에 삽입된 모차르 트의 음악은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 들과 함께해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 천재의 음악을 통해 감동을 전 해주는 영화들을 보고 나선, 나는 사카모토 료이치가 제안한 일을 받 아들이기로 온전히 결심했다.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를 물어봐 도 되겠니?”
그 이야기를 하니, 함께 있던 히무라 프로듀서가 내게 이유를 물었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비록 내 마음을 전부 전달할 순 없었지만, 그것은 영화 역시 마찬가 지다.
나 역시 아직 이 세계, 이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 역시 루트비히 판 베트호 펜이자 배도빈인 나를 이해하긴 힘 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음악이 있는 영화를 통해서는 나도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나 역시 영화 안에 나의 음악을
넣어 세상에 나를 이해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리나라 말이나 일본말에 능 숙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전달할 수는 없는 법.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음악이 함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짐을 깨달 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예전 생각 이 들었다.
나는 괴테의 시를 좋아했었다.
그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탐독하였고 나는 그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의 작품을 가사로 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글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인데.
하여 나는 괴테라는 남자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황족을 마주 하곤 생각이 달라졌다.
황족에게 예의를 보이지 않았다며 내게 핀잔을 주는 그를 보며, 괴테 그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 각했던 것이 나의 착각이었음을 깨 달았다.
그 이후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남긴 말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내 문학을 음악에 비하지 마라.’
그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충격 이었다.
그의 시를 가사로 한 Cantata for chorus & orchestra, Op. 112(잔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를 그에게 헌정했을 때, 답장도 없이 무시 받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나는 그의 사 상을 부정하였다.
나는 문학에 대해 잘 알 수 없지만.
음악은 문학이(언어가) 전달할 수 없는 어떠한 것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분명 문학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음악이 전달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을 터.
이번, 영화에 사용될 테마곡을 만 드는 일은 그런 나의 사상을 증명하는 일이 될 터라 여겼다.
“하고 싶어요.”
비록 지금은 이 뜻을 명확히 전달 할 수 없지만.
반드시 내 음악이 영화에 더해져, 대사와 영상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내, 관객들에게 선물해 주리라 다짐했다.
“허허. 좋은 일이지 않은가. 분명 자네의 음악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것일세.”
어리숙한 몇 마디로 대답한 나를 보 고, 사카모토 료이치가 껄껄 웃었다.
“영화는 이제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문화가 되었지. 혹시 영화에 대사보 다도 음악이 먼저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나?”
고개를 저으니 사카모토가 말을 이었다.
“무성 영화에도 음악이 있었지. 비 록 처음엔 프로젝터 소음을 감추고 자 했던 시도였지만 아주 작은 극장이라도 피아니스트가 항상 있었다 네. 그만큼, 영화에서 음악은 중요한 요소란 말이고. 자네는 사람들을 즐 겁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일세.”
“그럴 거예요.”
다시 한번 사카모토가 빙그레 웃었다.
배도빈의 모친 유진희는 벌써 며칠 째 ‘지니위즈 시리즈’를 반복해 보는 배도빈이 걱정되었다.
한글 자막을 통해 영화를 보면서 배도빈은 전에 없이 단어의 뜻을 알 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처음에는 한글 공부도 되겠거니 싶었던 유진희로서도 하루에 1 0시간 이상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반복 시청을 하는 배도빈 때문에 애 가 타게 되었다.
“엄마, 이 협력이란 단어는 무슨 뜻이에요?”
“서로 돕는다는 뜻이란다.”
배도빈은 공책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협력’이란 단어를 적고 그 뜻을 자 신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두었다.
어느새 공책은 그런 단어들로 절반 가량이나 차 있었다.
“도빈아, 공부 그만하고 엄마랑 산 책 나갈까? 오늘 날씨가 참 좋은데. 도빈이가 좋아하는 카레도 먹고.”
“이거 봐야 해요.”
누굴 닮아서 어쩜 저리도 고집이 센지.
유진희는 슬며시 나카무라 매니저 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조금 걱정되네요. 공부하는 건 좋은데 저러다 어떻게 될지……. 그 왜.”
유진희는 말을 하려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얼핏 자폐증을 앓는 아이가 한 분 야에 놀랍도록 집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과할 정도로 몰 입한 배도빈이 혹시나 그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냈다간 말 이 씨가 될까 봐 가슴에 묻어두었다.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그동안 이 야기를 들어보니 몇 시간씩 작곡을 하거나,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친다든 가 했다고요?”
통역을 통해 유진희가 걱정하고 있음을 인지한 나카무라가 반응했다.
“네……
유진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카무라 역시 한 아이의 부모였기 에 유진희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딸바보로 엑스톤 사내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혹시 도빈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아마 아닐 것입니다.”
유진희는 통역되어 전달되는 나카 무라의 말을 충분히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아마 자폐증을 의심하시는 듯한 데, 보통 그런 아이는 의사소통에 큰 문제를 겪습니다. 그러나 도빈 군의 경우에는 그러지 않죠. 도리어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는 데 적극적 입니다. 말로도 그러하고 음악적으로는 더욱이요.”
“정말 괜찮은 걸까요?”
“만일 걱정되신다면 검사를 한번 받아보시는 것도 괜찮겠죠. 하지만 제 눈에는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가진 천재로 보일 뿐입니다.”
유진희는 말없이 지금도 스크린을 보며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 하는 아들을 걱정스레 보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배도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 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유 진희를 찾자 쪼르르 달려와 입을 열었다.
“엄마, 배고파요. 카레 먹고 싶어요.”
“그래?”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아들을 보 며, 유진희는 이번에는 배도빈의 ‘집착’이 어쩌면 자폐증이 아니라 다른 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모자가 일본에 온 지 14일째.
단 한 번, 점심으로 먹은 오코노미 야키를 제외하곤 배도빈은 카레만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