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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7화 (1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17화

    6. 5살, 음악이 필요한 곳(2)

    “도빈이는 좋겠네?”

    “뭐가 좋아요?”

    어머니와 함께 일본의 부침개를 먹 고 난 다음, 오늘도 사카모토 료이치의 자택으로 방문했다.

    료이치가 내게 ‘영화’라는 것을 보

    여준다고 했는데, TV에 대해서는 이제 조금 알겠지만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나는 어머니께 여 쭐 수밖에 없었다.

    “TV 같은 거예요?”

    “음••…. 엄마가 보는 드라마 있잖아?”

    아, 그 배다른 남매가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남자 측의 첫사랑이 여자의 모친. 즉 둘째어머니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 말이로군.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께서 ‘그런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네?”

    대체 그런 걸 보러 가는 게 왜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사카모토 료이치의 집은 정말로 넓 어서, 지하에는 커다란 화면이 있었다.

    생전 처음 앉아보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나는 어머니, 히무라와 함께 사카모토 료이치가 틀어준〈마지막 왕〉이라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끄어어엉!”

    “어머, 어머.”

    저런 때려죽일 놈들이 있나!

    영화 내용을 완벽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아름다운 영상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일전에 한 번 들었던 사카모토 료이치의 ‘비’가 들렸을 때 의 장면을 보고선 오열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이렇게나 슬픈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가!

    “어떤가, 도빈 군. 재밌게 보았는가.”

    사카모토 료이치가 다가와 물었고, 나는 끅끅대며 이러한 작품을 보여 준 료이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도빈 군, 나는 자네의 음악이라면 그 음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네. 아니, 이 표현은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알 수 있었을 것이네. 음악이 있어서 더욱.”

    “네. 음악이 있어요.”

    내 말을 들은 사카모토 료이치가

    작게 웃었다.

    “다행이군. 내가 자네에게 음악적으로 가르쳐 줄 것은 없지만, 자네 의 음악이 필요한 곳을 알려줄 순 있을 것 같네.”

    내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

    “도빈 군은 아직 잘 모를 수 있겠지만. 훌륭한 곡은 비로소 그 자리를 찾아야 한다네. 그 위대한 모차 르트와 베토벤의 곡이 수백 편의 영 화에 사용되었다지. 무슨 뜻인지 이 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들어 사카모토 료이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인자한 표정에서, 그 올곧은 눈에서 나는 그를 신뢰할 수 있음을 느꼈다.

    “자네의 음악이 필요한 영화가 있네. 함께해 주게.”

    사카모토 료이치가 내게 종이다발을 건네주었다.

    죄다 지렁이 같은 글자라 알아볼 순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곤 그를 보았다.

    이야기라면 히무라에게 읽어달라면 될 것이다.

    고민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오페라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현대가, 지금 내가 다시 태어난 이 곳이 바라는 음악이 있고 내 마음이 동한다면.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 * *

    “그러니까 머글과 마법사 사이에서 나온 혼혈을 배척하던 악의 마법사 가 부활한 거란다.”

    히무라 프로듀서의 설명을 듣고 나는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글은 또 뭐고 마법사라니.

    이렇게나 발전한 이 시대에도 그런 미신을 믿는단 말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 O 으”

    —M.

    사카모토 료이치가 내게 제안한 것 은 ‘영화’를 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테마곡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여 히무라를 통해 영화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들었는데, 한 시간 가까이 노력했음에도 나는 좀처럼 그 이야기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큰일인데.”

    히무라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나는 나대로 답답하여 금세 홍 이 식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현재의 이야기를 이해 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공감할 수 없기도 하고 또 이야기 솜씨가 형편없는 히무라의 탓도 있을 것이다.

    옆에 함께 계시던 어머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도빈아, 어서 글 배워야겠네?”

    “아! 분명 한국에도 이 이야기가 번역되어 있을 테죠. 도빈아, 그걸 읽어보는 게 어떠니?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호호. 아직 직접 읽기엔 어려울 거예요.”

    어머니께 내 머리를 정리해 주시면 서 대신 답하셨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언어를 일찍 배 웠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내게 있어 아직 우리나라 말은 외국어나 다름 없다.

    한국에서 산 지 기껏해야 4년 정 도니, 언어에 특출하지 않은 내게 우리나라 말을 완벽히 습득하기엔아직 무리가 있다.

    〈마지막 왕〉이라는 영화는 상황을 잘 몰라도 영상으로 알 수 있는 것 과 음악 등으로 분위기를 읽는 데 수월했던 반면(물론 어머니의 보충 설명도 큰 역할을 했지만).

    단순히 히무라의 설명만으로는 이 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어…… 더빙된 영화를 보면 도움 이 되려나?”

    “그겁니다!”

    그렇게 나는 번개 흉터를 가진 아 이의 이야기를 하루에 한 편씩 보게 되었다.

    *

    모든 것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나는 그 신기한 이야기와 영상에 빠져 버렸다.

    이러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세상은 정말 신기한 일로 가득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어쩌면 저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 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면서 히무라의 설명을 다시 들었다.

    “ 아아.”

    올해, 2010년 겨울에 개봉될 영화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였고 나는 대충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나와 자네가 만들 곡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에 삽입 될 예정이라네. 중간에 변주를 하거 나 잘라서 삽입될 수도 있겠지만 말 이야.”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사카모토 료이치가 영화의 한 장면을 언급하였다.

    주인공이 느낄 긴박함과 그 동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비장함을 표현하

    는 데 확실히 괜찮을 것 같은 테마 가 떠오르긴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다 안 들어간다고요?”

    “음. 내가 음악 자문을 맡고 있다지 만, 어디까지나 이야기와 조화를 이 뤄야만 하네. 조금씩 나누어 들어갈 때도 있고, 변주가 될 때도 있지.”

    불만이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곡이 그러한 것처럼 분량 자체를 짧게 만드는 것 이야 나로서는 새로운 시도고 수용할 만하지만.

    내가 만든 곡을 누군가가 마음대로

    쪼개서 삽입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몹시 불쾌했다.

    “ 싫구나.”

    “싫어요.”

    사카모토 료이치는 내 마음을 정확히 읽었고, 나는 굳이 그것을 숨기 지 않았다.

    나는 내 감정을 숨기면서 비겁하게 음악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만든 곡 따위를 남이 들었다간 수치스러워 못 견딜 것이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웃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구나.”

    나를 설득하려 들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쉽게 포기하였다.

    내 아무리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이 라도 그에게 나는 어린아이일 뿐.

    나를 한 사람의 음악가로 인정한다는 그의 발언이 진심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나카무라 매니저도 히무라 프로듀 서도.

    내가 인정하는 대가, 사카모토 료이치도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들과 만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아쉽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나카무라가 배도빈과 그 모친을 숙 소로 안내하러 가고 프로듀서 히무라가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의 말에 사카모토 료이치가 의문을 제시하여, 히무라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도빈 군은 아직 어려서 이번 기회 가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선생님께서 도빈 군의 천재성을 전 세계에 알릴 기회를 주셨는데 거절하니 저로서는 아쉽군요.”

    “하하하하!”

    히무라의 말을 들은 료이치가 크게 웃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고개를 설설 저으며 료이치가 입을 열었다.

    “도빈 군은 프라이드가 있는 거라 네.”

    “그게 아직 도빈 군이 어리다는 뜻……

    “아닐세.”

    사카모토 료이치가 단호히 선을 그었다.

    평소 인자하고 가끔 엉뚱하다는 이 야기까지 듣는 사카모토 료이치였기 에 히무라는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 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빈 군은 음악을 거짓으로 하기 싫은 것이야. 본인이 납득하지 못했는데 억지로 할 수 없다는 뜻이지. 그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는 도빈 군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네. 이해할 수 있는가?”

    전 세계에서 쏟아질 관심.

    그로 인해 치솟을 음반 판매량.

    후속 사업 제의.

    부, 명예.

    일반적으로 그 소중한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음악을 만드는 입장이기도 하나 사업가이기도 한 프로듀서 히무라로서는 좀처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음악적 고집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배도빈이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 그가 어리기 때문.

    사회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밖 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음악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걸 생각해 보면……

    “아니야. 그런 게 아닐세. 자네는 도빈 군과 꽤 오래 있으면서 여태 몰랐었나? 도빈 군은 누구보다도 상 업적 성공에 관심이 많은 아이라네. 클래식을 하는 아이가 새로운 장르 의 음악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 가? 아사히 신문에서의 그 귀여운 인터뷰도 생각나는군.”

    “그렇다면

    “단지 자신이 납득하지 못한 채, 그런 어정쩡한 마음으로 음악을 만 들기 싫은 거라네. 태도의 문제지. 그런 음악을 남에게 선보이는 것 자 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거야. 그게 설령 잘 팔린다 하더라도 말일세.”

    히무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네는 아직 도빈 군에 대해 모르고 있네. 그는 어엿한 음악가야. 아 니, 고고(孤高)한 음악가야. 그를 아 이로 보지 말게.”

    히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사카모토 료이치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도빈 군에 대해 어 찌 그렇게 잘 알고 계신 겁니까?”

    그 질문을 듣고서야 사카모토 료이치는 평소와 같이 털털한 노인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랬으니까.”

    “예?”

    “다른 이유는 없네. 내가 딱 그랬 으니 아는 것일세.”

    천재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이야기 인가.

    8살, 천재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사카모토는 그의 나이 25세가 될 때 까지 클래식 음악계의 초신성으로 활약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여러 악기를 다루었고 30세란 이른 나이 에 빈 필하모닉에서 콘서트마스터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듣기로는 상임 지휘자가 없는 기간 이 길어 지휘도 오래 했고 그때 거 장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더니 이내 곧 대중음악계에 뛰 어들어 현재는 다루지 않는 장르가 없을 정도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는 걱정 하지 말게. 도빈 군을 움직일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예? 어,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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