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14화 (14/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014화

5. 5살, 현대의 천재를 만나다(2)

약 18분 정도의 연주 시간 동안.

히무라는 입을 닫을 수 없었다.

한국 나이 이제 고작 다섯 살.

학교조차 들어가지 못한 어린아이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이번이 분명 처음이었을 텐데, 악보조차 없이 베토벤의 소나타 8번 C minor> 완 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저 어린 천재 에게서.

히무라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도빈의 연주가 끝났을 때, 아직 그 여운을 느끼며 배영준, 유진희 부 부의 표정을 확인한 히무라는 부부 역시 놀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도빈••••••

그러나 히무라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배도빈이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딩딩디디- 딩딩디디-

아직 채 첫 번째 연주의 여운이 모두 가시기도 전에, 그 놀라움이 이어지는 와중에 시작된 배도빈의 두 번째 연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번 B플랫 장조 Op.22

그 생동감 넘치는, 상당한 실력의 피아니스트도 그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곡을(베토벤의 곡 대 부분이 그러하나) 연주하는 약 25〜 30 분간.

배도빈은 놀랍도록 집중력을 유지 했다.

저 집요함.

히무라는 마치 지금 연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저 집중력과 표현력을 믿을 수 없었다.

성인조차 프로가 아닌 이상 저럴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어. 불가능한 일이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번 B플랫 장조 Op.22는 음대 입시곡으로도 많이 선택된다.

그만큼 기본기가 중요한 곡이기 때 문인데, 저 어린아이가 자아내는 음 율이 비록 그 힘은 부족하다곤 하나.

무섭도록 집요했다.

박자를 끈질기게 이어가며 표현하는 선율이 히무라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생각해 보면.

작곡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라 고만 생각해도 배도빈은 이미 그 ‘위대한 음악가’에게서 ‘완성되어 있다’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히무라 본인도, 나카무라 총 매니 저도, 클래식 레이블 엑스톤의 전 직원이 배도빈의 작곡 능력에 감탄하며 경악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여태 히무라 본인도.

엑스톤도 아니, 일본 전체가 ‘배도빈’이란 ‘음악가’를 과소평가 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배도빈의 피아노 연주는 그런 사소한 실수와 부족함을 크게 느끼지 못 할 만큼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주륵-

히무라는 저도 모르게.

다섯 살 아이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건반에서 손을 떼고 문뜩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연달아 5~6곡의 소나타를 친 것 같다.

확실히 아직은 만족할 만한 연주는 아니었다.

내 생각을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직 손의 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탓인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 지 않았다.

원활하게 연주를 하려면 내 새로운 몸이 보다 이 행위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으,

아직 여린 손가락 끝이 비명을 질렀다.

쉬지 않고 몇 시간이나 피아노를 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감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침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았기 때문이다.

2, 3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던 것이 사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시 쌓아나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의자에서 내려왔는데.

부모님과 히무라가 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도빈아.”

“네.”

“저, 정말 피아노 처음 치는 거니?”

이번 생에는 처음이니 고개를 끄덕 이자 히무라는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곤 뭔가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조금 부담스러워 손을 뺐다.

부모님 역시 놀라신 듯했다.

두 분을 이해시킬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모르는 체했더니 이 내 피아노를 어떻게 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묻지 않으셨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 히무라가 물었다.

“부활에 대한 평은 궁금하지 않아?”

“왜요?”

“도빈이가 열심히 만들었잖아. 사람들이 좋아할까 하고 궁금하지 않아? 아저씨는 엄청 궁금했는데.”

“제 곡이면 당연히 좋아할 거예요.”

“하하하!”

잠시 멈칫했던 히무라 프로듀서가 이내 크게 웃었다.

“그래. 도빈이가 만든 곡을 사람들 이 싫어할 리가 없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삶에서 음악은 투쟁의 수단이었다.

귀족 밑에서 아부를 떨면서, 그들 이 원하는 곡만을 만들어야 하는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내 안에서 샘솟는 음표들 이 너무나 많았다.

타인이 아닌,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이 너무도 많았기에 나는 그것을 세상 밖으로 표출해야만 했다.

하여 나는 귀족과 교회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음악을 해왔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내 음악이 팔리지 않는 순간, 길거리에 나앉아야만 했기 때문에.

‘팔리는 음악’을 써야만 했고, 동시에 ‘팔아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음악에 대한 이상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하나의 곡을 만들 때 완벽을 기했다.

그러했기에 ‘투쟁’.

내가 만족할 때까지, 적어도 완성 할 때까지 악보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그런 내 음악이 팔리지 않을 리 없다.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좀 어떤가요? 다들 좋아해 주고 있나요?”

히무라 프로듀서의 말에 신경을 끄 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걱정스럽게 싱글 앨범 반응을 물어 보셨다.

“훌륭합니다. 판매 추세는 이제 서 서히 줄어들고 있지만 평은 칭찬 일 색입니다. 곡의 완성도가 완벽하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죠.”

“다행이네요.”

“그리고…… 혹시 사카모토 선생에 대해 아십니까? 클래식 음악에 취미를 두신 두 분이시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카모토라고 하면.”

아버지께서 잠시 고민하시다가.

“설마 사카모토 료이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 자 히무라 프로듀서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식탁에서 벗어나 그의 가방에서 편지 같은 것을 꺼내왔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일본으로 오셨는데, 사카모토 선생이 도빈 군의 부활을 듣고 꼭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셨는데, 읽어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기모토 료이치라고 합니다. 음악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실예들 무릅쓰고 이엏게 히무라 군을 통해 편지를 부 칩니다.

두 분의 자녀 니H도빈 군에 대한 이야기는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괜찮으시다면 제가 배도빈 군을 위 해 후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후원?’

“엄마, 후원이 뭐예요?”

어머니께 단어의 뜻을 물어보았다.

“도빈이를 돕고 싶은 분이 연락을 주셨나봐.”

돕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도 ‘Unterstützung(후원)’을 의미할 터였다.

이 시대에도 그런 개념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만약 그가 내게 어떠한 음악을 요구하길 바라며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이라면 나는 조금도 받아들 일 용의가 없다.

이미 엑스톤이라는 곳에서 내가 하 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된 덕분이다.

“그건 혹시……

“사카모토 선생이 도빈 군을 가르 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에 드는 비용과 도빈 군 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비용까지도요.”

‘ 호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어느 겁 없는 친구가 기특하게도 나를 가 르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듯하다.

나는 히무라 프로듀서가 읽어주는 편지의 내용에 관심이 생겼다.

“감사한 말씀이긴 한데……. 도빈 이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아, 혹시 궁금해하실 것 같아 신문도 스크랩해서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께선 내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보시면서 히무라의 설명을 들으시고는 민망한 듯 웃으셨다.

반면 아버지께선 수저를 내려놓으시곤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표정이 몹시 안 좋아 보였다.

아버지께서 그러시자 민망하게 웃 던 어머니께서도 웃음을 잃으셨다.

“도빈이가…… 정말 이렇게 말했나요?”

“아…… 네.”

히무라는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당 황하였다.

나 역시 이 분위기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이 좋다는 발언 때문.

아마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히무라 프로듀서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아, 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내일 오후에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도빈이에게 맞는 피아노를 선물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나와 어머니는 히무라를 배웅한 뒤에 우리에게 허락된 방으로 들어갔다.

“도빈아?”

문을 닫자마자 어머니께서 앉으시면서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네, 엄마.”

“엄마는 도빈이가 엄마랑 아빠 생각해 줘서 너무 기뻐.”

어머니께선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지만 나는 어머니께서 지금 무척 슬 퍼하고 계시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

빌어먹을 술주정뱅이 때문에 우리 가족은 파탄에 이르렀었다.

형제들은 침수된 집에서 죽고, 어 머니께서 그 과정에서 얻은 병으로 타계하셨다.

그러하기에 ‘요한’과 ‘가난’에 대해 서는 치가 떨릴 만큼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내 동생 카스파.

아픈 녀석의 아들 ‘칼’.

만약 내가 가난했더라면 그래서 칼이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노 력했더라면 나는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비록 녀석과 조카와는 함께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이 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족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 그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던 것이다.

지금의 아버지, 어머니의 따뜻한 애 정을 받고서야 진정 남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상황의 호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 다 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아빠.’

‘제가 돈 많이 벌게요, 엄마.’

어떤 말을 해도 지금의 부모님에게는 상처를 더하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등이 조금 축축해질 때쯤, 나를 꼭 껴안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팔을 풀곤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어머니의 눈이 붉고 촉촉하다.

“도빈아.”

“네.”

“혹시 돈을 벌어야 해서 음악 하는 거니?”

고개를 저었다.

“음악이 좋아요.”

나는 음악도 좋고 돈도 좋다.

예전 삶에서도 그러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돈이 좋은 이유는 가난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기에.

나는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으나 그것을 위해선 언제나 돈이 필요 했다.

속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머니께, 아버지께 확실히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내가 지금 두 분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밖에 없을 듯싶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거예요. 전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께서 다시 한 번 나를 안아주셨고, 구석에서 분함을 삭이고 계셨던 아버지 또한 다가 와 나와 어머니를 감싸 안았다.

어쩌면.

내가 받은 선물 중 가장 큰 선물 은 ‘귀’가 아니라 이러한 ‘가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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