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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13화 (1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013화

    5. 5살, 현대의 천재를 만나다(1)

    다시 태어나고 쓴 두 번째 곡, ‘Hochgefühl(넘치는 기쁨)’을 다듬는 중이었다.

    곡의 구성은 마음에 드는 반면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데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에 바닥에 엎드려 그렇게 악보를 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도빈아.”

    “네, 엄마.”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보니 무엇인 가 들고 계셨다. 공책인 듯하다.

    새 오선지인가 싶어 일어나서 두 손을 내밀었다.

    마침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몇 장 남지 않았는데 역시 어머니시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오선지를 받았다.

    ‘ 음?’

    어머니께서 주신 공책을 펼쳐 보니 오선지가 아니다. 오선 대신 뭔가 글자가 적혀 있다. 아마도 대한민국 의 문자인 듯하다.

    “이게 뭐예요?”

    “도빈이 곧 유치원 가야 하니까 오 늘부터 엄마랑 가나다라 배우자?”

    “ 가나다라?”

    내가 눈을 깜빡이며 설명을 기다리 자 어머니께서 웃으시면서 밥상을 펼치셨다.

    “자, 여기 보이는 게 기역이야. 따 라 써볼래?”

    “……저 이거 할래요.”

    문자 공부야 당연히 해야겠지만 지금은 붙잡힐 듯 멀어져가는 마무리를 해결해야 할 때. 집중이 끊기면 좋지 않다.

    더욱이 히무라로부터 전해 들은 일정 안에 남은 곡을 만들려면 한시가 급한 만큼, 우선순위가 아니라 생각 했다.

    내가 악보를 가리키며 항의하자 어머니께서 상냥하게 말씀하셨다.

    “도빈아, 음악도 좋지만 우리나라 말은 꼭 배워야 하잖니? 나중에 가 사 같은 거 쓸 때 글씨 못 쓰면 큰 일인데?”

    굳이 가사를 안 써도 곡은 많이 만들 수 있다.

    내가 고개를 휙휙 젓자 어머니께서는 조금 화가 났다는 표정을 짓고 일어나셨다.

    조금은 어울려 드릴 것을 그랬나, 생각하던 차 어머니께서 장롱 위에 서 무엇인가를 꺼내셨는데.

    “자, 도빈이가 기역부터 히읗까지 쓸 수 있게 되면 이거 줄게.”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것은 다름 아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D단조 Op.28’ 악보였다.

    “우와!”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악보를 잡으려 했으나, 어머니께서 휙 하고 악보를 높게 드셨다.

    ‘이건 무슨……

    “엄마, 주세요! 도빈이 악보 보고 싶어요!”

    라흐마니노프라면 최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내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주었다.

    그의 기교와 구성력은 나조차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소나타 형식을 띠는 1악장, 특히 분산화음 반주를 바탕으로 둔 주제 전개는 나를 황홀하게 할 지경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주제 역시 라흐마니노프라는 남자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서정성을 자랑했다.

    하여 그런 그의 소나타라면 반드시 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안 돼요. 기역 니은부터.”

    어머니는 오늘따라 유독 강경하셨다.

    아쉽다. 너무나도 아쉽다.

    그 천재의 악보를 앞에 두고도 보 지 못하다니.

    내 부족한 어휘력으로는 이 억울함을 표현하지도, 조리 있게 어머니를 설득시킬 수도 없다.

    그렇게 분한 마음이 드니 나도 모 르게 이 어린 몸이 움찔거렸다.

    나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 몸은 감정변화에 너무도 솔직하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일로 울 수는 없지.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확실히 나 역시 이제 ‘우리나라’ 말을 익혀 이런 억울한 일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범 일정을 맞추려면 작곡이 선행 되어야 한다는 걸 애처럼 칭얼대지 않고 조리 있게 설명해야 할 테니까.

    제 멋대로 나온 눈물을 쓱쓱 닦은 다음에 어머니께서 주신 공책을 펼 쳤다.

    그리고 연하게 적혀 있는 문자들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이게 기역이라고 했나?’

    연필을 쥐고 쓱쓱 기역부터 히읗까 지 반복해 적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내 옆에서 ‘알 파벳’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잠시 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빈 곳에 기 역부터 히윻까지 적으며.

    “기역, 니은, 디귿…… 히옿.”

    하나하나 이름을 외우자 어머니께 서 나를 꼭 껴안으시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도빈이 너무 장하다. 엄마가 너무 서운하게 했지? 기특하다. 기

    특해. 엄마는 도빈이가 너무 좋아요.”

    엉덩이를 툭툭 쳐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역시나 나를 생각해서 억지로 엄한 모습을 보이신 건데, 마음이 여린 어머니로서는 내가 상처를 받았을까 봐 마음고생을 하신 듯하다.

    앞으로는 이런 걸 말씀하실 때 조율을 할 수 있도록 빨리 말을 배워 야겠다.

    띠링-

    바로 그때.

    그간 신경 쓰지 않던 글자가 내 앞에 툭 하고 튀어나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음을 익히셨습니다.]

    [봉인되었던 능력치의 일부를 얻었습니다.]

    ‘ 엉?’

    [성명: 배도분II [Ludwig van Beethoven]

    [연령: 0세] [56세]

    [칭호: 악성(樂聖)]

    [능력치]

    [작곡: 99(완성)] [작사:01 (초보): 페널티]

    [편곡:96(완성)][음감:67(능숙): 페널티]

    [장르]

    [클래식: 91(자유 단계)]

    [동요: 61(연합 단계)]

    [팝: 05(인지 단계)]

    [대분류 장르 열람: 3개]

    또 신이란 놈이 건방진 짓을 한 모양이다.

    ‘능력치’라는 것은 현재의 내 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작사가 1이라니.

    내가 작사를 즐기진 않으나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치다.

    고개를 휙휙 돌리자 ‘신의 장난’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고얀 놈.’

    누군지는 몰라도 감히 나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을 평가하려 드는 놈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거 다신 못 나오게는 못 하나?’

    오늘도 어김없이 어머니가 내주신 ‘}, >, 1, r 숙제를 다 한 뒤에 다시 한번 ‘넘치는 기쁨’에 대해 고 민하는 중이다.

    그러나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멜 로디언’이라는 것을 잡고 꾹꾹 누르 고 있었다.

    입에 호스를 문 채 건반을 치는데.

    아쉬운 마음에 그러곤 있는데 자꾸만 울컥울컥한다.

    몸이 어려진 탓인지 시도 때도 없이 감정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저번 한글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그렇고 참으로 당황스러운데 어린아 이가 왜 그렇게 울음이 많은지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니 웃음이나 눈물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엔…… 몸이 작아 사이즈가 맞는 피아노가 없으니 문 제지만.

    아무튼.

    피아노가 있었더라면,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더라면 ‘넘치는 기쁨’의 마 지막을 좀 더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자꾸만 밀려 들어 왔다.

    “계속 저러고 있다고?”

    “네……. 우리 도빈이 불쌍해서 어떡해요?”

    퇴근을 하고 돌아온 배영준은 방의 구석에서 처량하게 멜로디언을 치고 있는 어린 아들을 보곤, 아내와 같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너무도 좋아 했던 배도빈이 피아노를 제대로 못 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너무나 우울해했기에.

    배영준과 유진희 부부는 그나마 피아노와 비슷하고 어린 도빈이도 연주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멜로디언을 선물해 주었다.

    부부가 생각하기엔 최선의 방법이었고, 또 아들이 멜로디언을 선물 받고 좋아하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을 치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

    저 어린아이의 등이 마치 40대에 권 고 퇴사당한 가장의 등처럼 보였다.

    “……나카무라 씨가 도움이 필요하 면 언제든 말하라 했었지. 내가 전 화 한번 해볼게. 혹시 도와줄 수 있는지 말이야.”

    “네. 그게 좋겠어요.”

    유진희는 쓸쓸하게 멜로디언을 불 다가 이내 그것을 집어던지는 배도빈을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돌아온다고 약속했던 히무라 프로 듀서가 왔다.

    이틀 뒤에 온다고 해놓고 3일이나 늦은 것이다.

    “도빈아, 아저씨 왔어.”

    “아저씨!”

    기다리던 것이 왔다는 소식에 나는 벌떡 일어나 히무라에게 달려갔다.

    히무라는 나를 보더니 양손을 활짝 벌렸는데, 나는 그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돈은? 돈은요?”

    “……어?”

    “돈 가지고 왔어요?”

    무슨 일인지 히무라가 엄청 서운하 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돈을 기다리고 있지. 뭘 하고 있겠어.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니 당연한 일인데, 히무라가 내게 뭘 바라는지 모를 일이다.

    “도빈아, 아저씨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어머니께서 나를 야단치셨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의 예절대로 고개를 숙이곤 인사를 했다.

    “하하하. 어머니, 괜찮습니다. 도빈 아, 돈은 1년에 네 번 나누어서 도빈이 통장에 들어갈 거야. 너무 걱 정하지 마렴.”

    충격을 받고 말았다.

    당장 주는 것이 아니라니!

    이 무슨 불합리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머니께서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어린 것은 정말 억울한 일만 가득 하다.

    아이라면서 이해 못 할 거라고 미 리 단정하고 말해주지 않는 것에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대신 오늘은 도빈이에게 줄 선물 이 있는데. 궁금하지 않니?”

    관심 없다. 돈이 최고다.

    돈이 있어야 ‘집’이든 ‘학교’든 ‘선 생’이든 ‘악기’든 구할 수 있으니까.

    큰어머니가 자꾸만 어머니를 구박 하는 것도 탐탁지 않고 말이다.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히무라 프로듀서는 웃으면서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말을 했다.

    “어린이용 피아노를 사왔단다. 그 거라면 도빈이도 칠 수 있어.”

    세상에.

    “정말요?”

    이건 확실히 반가운 일이었다.

    역시 히무라! 믿을 만한 친구다!

    나는 그의 등 뒤를 살폈고, 그는 웃으며 곧 문 밖에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빨리! 빨리!”

    어머니께서 칼을 가져 오셨고 히무라가 박스를 뜯어 방 안에 ‘어린이용 피아노’라는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역시나!

    세상은 이렇게나 멋지게 발전해 왔던 것인가!

    손이 작아도! 팔이 짧아도! 허리가 짧아도! 다리가 짧아도! 칠 수 있는 피아노가 있다니!

    “우와! ……?”

    [37건반의 전자 피아노! 다채로운 연주와 놀이가 가능합니다! 생후 36개월

    이 빌어먹을 장난감은 또 뭐란 말 인가.

    ‘플라스틱’이라는 희한한 걸로 만 들어진 것 같은 유사 피아노에 나는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히무라! 멍청이!! 바보!”

    나를, 이 나를 두 번이나 절망에 빠지게 하다니! 네가 정녕 이러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당장 꺼져라!

    하고 싶은 말을 아는 단어로만 표 현하니 눈물이 주륵 흐르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 몸은 눈물샘이 라도 고장 났는지 또 자꾸만 제 멋 대로 울어버린다.

    분하다.

    내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 려 혼을 내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을 본 히무라가 놀라서 내 눈 물을 닦았다.

    “끄윽. 끄윽!”

    “자, 장난이야. 도빈아, 장난이야. 자자! 저기 뒤에 진짜 피아노 있잖아.”

    이번에도 나를 능멸하려 드는 것이 라면 히무라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 리라 생각하고 두 남자가 가지고 들어온 물건을 보자.

    나는 잠시 말을 잃고 ‘피아노’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사이즈는 작지만, 건반 하나 의 크기도 미묘하게 작지만.

    부족하긴 해도 61개의 건반이 있었다.

    확실히 피아노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했다.

    내가 살던 시절의 피아노도 건반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으니, 오히려 내게는 이런 피아노가 더 익숙하다.

    뚜뚜뚜-

    더군다나 여러 개의 건반을 눌러도 화음이 제법 잘 났다.

    조율은 미리 해둔 모양.

    의자에 앉으니 건반이 딱 적당한 높이에 있었고, 내 짧은 팔로도 어 느 정도 커버가 되는 넓이였다.

    “아저씨! 잘했어! 좋아해!”

    나는 의자에서 내려 히무라를 안고 치하해 주었다.

    이 몸에게 칭찬을 받은 자는 극히 드문데, 이번만큼은 히무라 프로듀 서의 공로를 인정해 주어도 될 듯하였다.

    “다, 다행이다.”

    히무라가 한숨을 내쉬며 일본말로 뭔가를 말했지만 이미 관심 밖이다.

    나는 방 안에 어정쩡하게 위치한 피아노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소나타 중 하나.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 정했었던 8번 소나타, C minor볘창)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딩! 딩디디디-

    ‘ 아아.’

    이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이란 말 인가.

    비록 건반 수가 부족하고 또 아직 손가락에 힘이 부족해 만족스러운 연주는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진정으로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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