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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왕의 사후
그렇게 한국의 초대 건국왕은 생을 마쳤다.
조선 관비의 아들로 태어나 바다를 건너 호주에 첫 둥지를 틀고, 광해군과 능양군의 실정에 신음하던 조선을 가지런히 했을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해 거대한 위업을 남긴 제왕이었다.
수년 전부터 국왕의 업무를 총괄하던 태자가 곧바로 즉위했다.
한국 수상 송시열이 곧바로 아뢰었다.
“선왕께서 이루신 업적은 실로 거대합니다. 마땅히 한국, 조선, 호주 등 연방제국(聯邦諸國)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연합회의, 유럽의 동맹국에 알려야 합니다. 또한 이번 국장(國葬)을 통해서 연방 내의 민심을 굳건히 하고, 동맹국들의 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수상의 의견대로 진행하세요!”
당시 기록대로라면, 한국 연방제국은 사방곳곳에 건국왕의 빈소를 차려 추모했다고 한다. 특히, 조선과 호주는 너무 멀어서 무려 수개월 후에야 건국왕의 국장이 시행되었다.
또한 아메리카 연합회의와 아시아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연방이 아메리카의 맹주이자 아시아 여러 나라의 주요 무역국가임이 분명했으니까.
반면, 유럽은 극과 극이었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동맹국들은 대체적으로 추모 분위기였으나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일부 선제후, 합스부르크 왕가 등은 열렬한 축제 분위기였다.
그때 루이 14세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앞으로 그 해에 생산된 가장 맛없는 와인에 [우진]이란 이름을 붙여라!”
실제 공교롭게도 현대 프랑스에는 ‘우진’이란 이름의 와인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가장 값싼 와인으로.
물론 프랑스는 그럴 만도 했다. 한국 탓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휘말려 10년 넘게 시달리다 기존 국토의 1/5 을 잃는 수난을 겪었으니까 말이다.
하여튼 유럽은 극심한 변화를 맞이했다.
먼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핵심당사자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는 빛이 바랬다. 거기에 휘말려 싸운 유럽 여러 나라들도 대동소이했다.
전쟁이 끝났어도 문제였다. 유럽은 오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느라 버거웠다. 그만큼 유럽의 발전은 최소한 수십 년 뒤로 늦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