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225)

“허위 개종은 종교탄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해졌던 겁니다. 그건 확실하니 달리 변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허위로 시민권 선서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만은 믿어주시지요. 우리 유대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어 마음 편히 드러내놓고 살아갈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신준묵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된 겁니다. 아메리카 영주권만으로도 의회나 공직 등 몇 가지 권리제한을 빼면 아주 자유롭게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한번 살아보시고 시민권을 취득할지 고민하시면 되겠습니다. 하하!”

해질녘.

“유럽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 High commissioner)이요?”

폐세자 이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현재 그저 이름뿐인 북아메리카 동부총독이었다.

“이번 인사발표에서 북아메리카 동부총독 자리는 아예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아시겠지요?”

말을 마친 신준묵이 폐세자 이지에게 유럽 고등판무관 임명장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럽에서 마음 편히 사시라는 폐하의 배려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폐주(광해군)께서도 아주 건강하시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앞으로 유럽에 대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로 일하게 되실 겁니다.”

폐세자 이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다. 조선과 호주는 물론이고 북아메리카에도 갈 수 없다는 뜻 아닌가? 그래도 그는 기꺼웠다. 아내가 영국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한 까닭이었다.

폐세자 이지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런던공사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신준묵은 크게 웃으며 화답했다.

“하하! 별말씀을... 유럽 고등판무관은 유럽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절이고, 직책상 런던공사의 상관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한밤중.

신준묵은 여전히 바빴다.

“영국 해군 준비상황은?”

“포츠머스(Portsmouth)항은 배로 가득합니다. 라 로셸 포위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동시에 상륙시킬 수 있게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전함30척에 수송선50척, 원정군 규모는 총 3만5천입니다.”

수하의 보고는 예상대로였다. 찰스1세는 라 로셸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상륙위치는 달랐다.

“노르망디 쪽 캉(Caen)이라... 영국의 보급선이 짧지만 그건 프랑스군도 마찬가지겠어. 네덜란드의 양동작전이 필요할 것 같군. 그럼 네덜란드 쪽은?”

“네덜란드는 영국과 같은 날짜에 브라슈하트로 진격할 계획입니다. ‘남부 네덜란드 총독’은 그저 프랑스와 남부 왈론족의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또 남부 왈론 족은 어수선하고요.”

신준묵은 또 물었다.

“스페인이야 카탈루냐가 소강상태니까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고... 독일은?”

수하는 씨익 웃었다.

“용병대장 암브로시오 스피놀라가 잘 해내고 있습니다. 스피놀라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독일 선제후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생긴 지 벌써 오랩니다.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 2세는 더 이상 꾸물거리면 단독으로 출병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그래도 독일 선제후들은 여전합니다. 신교도 선제후들이 구교도 용병단을 뒤에 두고 프랑스로 진격할 수 있겠습니까?”

신준묵도 함께 미소 지었다.

“그래, 이제 지켜보는 일만 남았군.”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쏴아아.

하루 온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하늘마저 슬픈 모양이었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아주 컴컴했다. 

나는 탄식했다.

“모히칸 족 일은 참으로 안타깝군.”

모히칸 족은 차차울라를 포함해서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오도리 기병여단이 혹시나 생존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색했지만 허사였다. 대신 모호크 족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했다. 

탁.

나는 ‘영국인 담배농장 사건’과 ‘모히칸 족 사건’의 결과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랬었지. 낭만은 그다지 없었다.’

대항해시대는 거친 모험의 시대였지 아름다운 낭만의 시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아메리카는 특별했다.

과거 아메리카의 대항해시대는 날 선 분열과 증오의 시기였다. 주된 원인은 정복자들이 행한 식민통치와 노예제도에 있었다. 

당연히 아메리카는 유럽의 식민지라는 처지만 비슷할 뿐, 역사와 문화 등 모두 제각각이었다. 

‘솔직히 북아메리카만 해도 수백 수천의 부족들이 각자의 삶을 영위해왔다.’

나는 두 눈을 떴다.

‘십년 내로 동부는 완전히 통합될 것이다. 곧 동부에서 중부와 서부로 진출할 준비도 해야 하고... 유럽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굳히면, 별다른 도전은 없을 거야.’

언뜻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북아메리카 통합에 자신이 없어졌다. 단순히 모히칸 족 학살 문제가 아니었다.

‘역시 우리는 인간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은 욕망은 끝이 없었다. 또 생각하고 진리를 찾는 존재면서도 그 반대로 행동하곤 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였다.

‘라스트 모히칸...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가?’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떠나다 [完]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렸다. 작은 섬에 몰아드는 북대서양의 푸른 물결이 절벽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졌다. 오랜 세월 파도에 맞서 싸운 깎아지른 절벽 위로 아담하고 평탄한 대지가 존재했다. 거기에 기이한 건물도...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신사복을 걸친 두 사람이 절벽 사이 작은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모자 끝을 들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는데 놀랍게도 개노미였다.

“빌어먹을 인간, 넌 내 친구가 아니라 원수다.”

오를 길은 아직 까마득했다. 잠시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재촉하듯 손을 끌었다.

“두어 시간 후면 배가 떠납니다. 우리 때문에 지체할 순 없으니 빨리 가시지요...”

송시열은 자신의 말끝을 흐렸는데... 거기엔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 누구보다 이번 여정을 간절히 고대했던 사람은 개노미였으니까. 

개노미는 작게 푸념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끄응, 다 늙어서 이런 고생이라니...”

얼마 후.

드디어 기이한 3층 건물, 아니 3층 탑 앞에 선 송시열이 대뜸 외쳤다.

“저 왔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탑 맨 꼭대기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헉헉, 정말 오랜만이야!”

그는 3층 탑 꼭대기에서 한달음에 내려온 것이 몹시 힘에 겨웠던 모양이었다. 흰 머리에 잿빛 옷을 걸친 남자가 밝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서 들어와! 부인, 차를 내 오시오!”

잠시 후.

쪼르륵.

“김자점, 이 원수야! 아주 호강하고 있었구먼.”

개노미의 타박에 김자점의 부인이 차 석 잔을 다 따르고 작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녀의 미색은 아직도 여전했다.

김자점은 피식 웃었다.

“흐흐, 부러우면 여기 와서 나랑 같이 지내! 빈 방은 아주 많아.”

하하!

삼총사는 오랜 만에 한데 뭉쳤다. 외딴 섬이라 거칠고 맛없는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데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김자점이 불쑥 말했다.

“그나저나 부수상각하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시다니... 삼생의 영광이오?”

이때 김자점의 얼굴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곧 산산조각났다.

“그저 안부가 궁금하여 찾아뵈었을 뿐입니다.”

김자점이 실망한 듯하자 개노미의 타박이 이어졌다.

“그러게 좀 작작 쳐 먹었어야지. 그때 폐하께서 눈감아 주시지 않았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 중죄였어. 법원에서는 사형을 선고했지만 폐하께서 특별히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시고 아리따운 부인과 함께 수형생활 하도록 배려하신 걸 잊었나? 넌 좀 더 고생해야 해! 사면은 어림도 없어!”

“이봐 희두! 친구한테 그리 악담을 하다니!”

“뭐, 친구? 김자점 이 인간, 넌 친구가 아니라 원수야!”

그러나 두 사람은 말다툼하는 사이에도 얼굴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로 답은 충분했다.

탁.

찻잔을 비운 송시열이 먼저 물었다.

“얼마 전 제게 보낸 편지... 아직 입니까?”

이에 김자점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책자를 꺼내들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벌써 끝냈지. 여기 있네. 한번 읽어보고 쓸 만한지 판단해보게.”

송시열은 조심스럽게 책자를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굳이 고백하자면 조선에서부터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서부전쟁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고요. 한때는 역모로 고변하려고도 했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물론 경계는 늦추지 않았지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위한 것도 충성의 한 방법이라 생각하니까요. 지난 번 편지, 또 오늘 주신 책자가 아니더라도... 김자점 공의 이름은 반드시 명기하겠습니다. 서부에서 시작된 제 사상은 곧 완성될 것이고, 거기에는 공께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말끝으로 송시열은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김자점은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개노미는 김자점의 백발을 바라보다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세월이 참 야속하군. 자네도 나도...”

그러나 김자점이 호기롭게 맞받아쳤다.

“하하핫, 내 명이 얼마나 길지 내기할까? 조선 제일의 무녀가 내 마누라지. 이 김자점은 삼천갑자 동방삭이 울고 갈 정도로 오래 살 팔자야.”

“하하! 그럴까? 그럼 저승 문턱은 내가 먼저 넘겠군. 그럼 난 가네!”

그 말을 끝으로 개노미와 송시열이 일어섰다. 아직 할 말들이 많았지만 눈빛으로만 나누었다. 그저 시간이 야속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김자점이 거하는 탑을 떠났다. 김자점은 문 앞에서, 그리고 그들이 보이지 않자 탑 맨 꼭대기로 헐레벌떡 올라가서,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스라하게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

‘잘 가게!’

그의 등은 사정없이 떨렸다. 그리고 등을 돌리는 순간 그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헉!”

순간 그의 후처가 다가와 부축했다. 후처는 본래 청초한 봄꽃 같은 미모의 소유자였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원숙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히려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런 기운까지 더해졌다.

후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흰자위만 드러냈다. 그녀 속의 신(神)이 대신 보는 듯했다.

김자점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차, 찾았나?”

후처의 눈이 원래대로 검은 눈동자를 찾았다. 당연히 다음 말은 신이 아니라 그녀였다. 

“답은 오직 하늘만이 알겠지요.”

김자점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눈을 감고서 마지막 힘을 다해 후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뜨자 후처의 영롱한 눈이 무척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곧 천천히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내려졌고 후처는 자신의 뺨으로 마지막 배웅을 대신했다.

털썩.

그때 김자점의 입에서 한마디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아, 나의 서기(瑞氣)...”

그는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철썩.

쏴아아.

북대서양 바다, 갑판 위에서 개노미는 하염없이 섬과 마주본 채로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그 섬이 친구 김자점 같았다.

“몹쓸 놈! 마지막까지...”

개노미는 송시열과 함께 눈을 마주쳤다. 눈물 먹은 두 사람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이것이 마지막임을 깨달은 것이다.

눈을 훔치며 몸을 돌린 개노미는 각기 세 방향을 한번씩 바라보았다. 

작은 섬, 다시 북아메리카,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 차례 씨익 웃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송시열은 가슴에 품은 김자점의 책자를 어루만지다 조용히 혼잣말했다.

“죄송하오나 김자점 공의 공과는 오롯이 후대가 평가할 일입니다. 사실 그대로 쓸 터이니 저를 원망하세요. 부디 내세에선 평안하시길...”

그는 지난달에 있었던 법무부장의 보고를 떠올렸다. 

마침 김자점의 마지막 편지가 도착한 찰나였다. 편지는 ‘그동안 쓴 책자를 꼭 전해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 김자점 공의 병세가 자못 위중합니다. 아마 달포를 넘기지 못할듯합니다. 어찌 처결할까요?

- 반역죄는 병보석이 불가한 대죄입니다. 폐하께서 선처하신 것도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 부수상각하! 그럼 이대로 놔둘까요?

- 아닙니다. 제가 폐하께 보고하고 찾아가겠습니다. 면회신청서 작성은 법무부장께 위임하지요.

- 네 알겠습니다.

송시열은 안타까웠다.

‘희두 공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구나!’

차마 말할 수 없었고 결국 말하지 못했지만, 지기(知己)는 운명적으로 통한듯했다.

송시열은 작은 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같은 시각, 뉴암스테르담(현대 뉴욕).

모히칸 주식회사.

한국 해상보험법이 공포된 후, 기존 무역업에 이어 해상보험업까지 아우른 모히칸 주식회사였다. 최초 설립자금은 한고립과 송준길이, 토지와 인력은 차차울라가 각각 출자했다.

모히칸 주식회사 자리는 원래 모히칸 족의 땅이었다.

“저는 당신이 알곤킨 어를 열심히 배울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요.” 

말을 마친 차차울라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쪼르륵.

그녀는 한고립에게 차를 따라주곤 다시 말했다.

“여자의 마음은 아주 단순하답니다.”

그때 송준길이 한고립을 째려봤다.

“그때 한 형께서는 참으로 둔하셨었지. 내가 정말 속 터질 뻔 했다니까? 조선 호랑이는 무슨... 동네 길 고양이도 그렇진 않을 거요.”

“왜 자꾸 나만 갖고 그래? 벌써 수십 년 전 일인데...”

“글쎄, 그게 재밌으니까요?”

차차울라는 한고립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곧이어 송준길에게 말했다.

“참! 부수상(송시열)께서 차기 수상 물망에 올랐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혹시...”

그녀는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포기하시오! 시열이는 내 동생이지만 꼿꼿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거든요. 형수님께서 아무리 채근해도 안 됩니다. 이제 입찰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겠어요. 섣불리 말했다간 도리어 손해만 볼 겁니다.”

한고립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난 듯 말했다.

“차차울라! 꼭 회사를 분할해야겠어? 우리 아이들도 모두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때 차차울라보다 먼저 송준길이 나섰다.

“이미 합의한 사안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후대에는 어찌 될지 몰라요. 무역업, 해상보험업, 기타 다양한 사업들을 각자 효율성과 전문성에 맞게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금 나누지 않으면 너무 늦습니다.”

차차울라도 동의했다.

“맞아요! 각 사업부문의 효율성과 전문성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의 주인이 확실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언론사와 출판사로는 너무 작지 않아요?”

“하하! 이 송준길은 한국의 대표 언론인으로 이미 한자리 잡았습니다. 두고 보세요! 앞으로 언론과 출판의 미래가 얼마나 대단할지...”

한고립은 그래도 아쉬워했다.

“난 머리 쓰는 일은 잘 모르겠다. 그냥 차차울라가 잘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차차울라는 한고립의 손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걸 말이라고요?”

하하!

세 사람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수상의 머리칼도 완연한 백발이군요.”

나는 부산에서 시작된 수상과의 인연에 눈시울을 적시며 그리 말했다. 단순히 왕과 신하의 사이가 아닌, 오랜 친구의 연으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늙어서 세상을 뜨거나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상은 힘겹게 웃었다.

“그건 하늘의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그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것도 버거운지 아예 사직을 청했다. 후임으로는 부수상인 송시열을 추천하고서...

나 역시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늙어갔다. 육신의 상태가 매일 달랐다. 직감적으로 내 생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는 마음에 안도하고 있었다.

‘특히나 태자가 장성한데다 중부까지 교두보가 확고해졌으니.’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처리하고자 한 것들 대부분을 이뤘다. 태자 손에 곤란한 문제를 떠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이때 수상이 내 생각을 읽었는지 태자를 칭찬했다.

“태자전하께서 현명하시니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또 송시열 부수상이 보좌할 것이니 든든하지 않습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는 장성한 이후부터 꾸준히 국정(國政)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수상과 함께 국정 전반을 아주 잘 이끌고 있었다. 

‘그래 여한은 없다.’

하지만 너무 슬프고 아쉬웠다. 이번이 수상과의 마지막 만남일 것이 분명했다.

‘김씨 아저씨, 돌쇠할아버지, 신준묵, 이제는 수상까지...’

수상은 웃었다.

“바다를 건너면서 지어진 운명입니다. 퇴락한 사대부 청년이, 그저 여동생 혼수를 마련하고자 폐하를 따라 나섰지요. 그 후는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아니 꿈이라도 이리 좋았을까요? 정말 행복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수상을 배웅했다.

...

어느 날인가 또다시 밤새 눈이 내렸다.

천지 가득 하얀 눈발이 흩날리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여지없이 해와 달이 뜨고 졌으며 세상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조금씩 변모되었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세월은 다시 유수같이 흘렀다.

“콜록, 아주 좋구나!”

나는 겨우내 침상을 지키다 나와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억지로 고집을 피워 간신히 나온 자리였다.

비서관이 급히 부축하려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괜찮다.”

얼마 전부터 예감할 수 있었다.

꿈에서라도, 정말 단 한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다고 되뇌었던 어머니까지 뵐 수 있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어머니, 김씨 아저씨, 돌쇠할아버지도... 나는 애타게 그들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나는 청옥관자(靑玉貫子)를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

제법 굵직한 관자였다. 값비싼 청옥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세도가 있는 사대부들이 쓰는 것. 

둘레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정교하게 양각되었고, 안쪽은 용의 발톱 4개가 튀어나올 듯 사납게 4개의 기둥처럼 새겨져 있었다. 사대부들이 망건 양옆 관자놀이에 달고 다니는 용도였다.

그때 환청처럼 말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도 잊지 못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미안하다.

눈물이 흘렀다. 어느 새 가슴이 따스해졌다. 순간 청옥관자가 신비로운 색채를 뿜어냈다. 나는 즉시 깨달았다.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듣고 볼 수 있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먼저 스러져간 영웅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그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나는 웃었다.

문득 어디선가 나타난 한줄기 바람이 ‘휘이잉’ 내 주위를 한 바퀴 맴돌고 떠났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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