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 (219/225)

그런데...

한국 외교사절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작은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개봉했다.

그는 상자를 뒤엎어 탁자 위에 내용물을 쏟았다.

투두둑.

“그럼 이건 뭡니까? 기동함대가 검문검색 도중에 발견한 귀국 상선의 화물 중에서 버지니아 담배가 나왔습니다. 마침 [한국-아메리카 항해조례]에 따라 금지된 상품이군요. 귀국의 해당 상선은 아국 기동함대에 나포되어 뉴암스테르담 부두에 정박 중입니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귀국에 조사결과를 정식으로 통보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털썩.

얀센 총독은 힘없이 의자에 앉으며 멍하니 정신이 나간 듯했다. 그에겐 네덜란드 본국에 보고할 핑계거리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형 ‘페레 미누이트’에 이어... 그가 꿈꾸던 차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대표 자리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

같은 시각, 뉴암스테르담 근처 모호크 족 마을.

싸악.

으아악.

피가 튀고, 목이 날았다.

모호크 족 마을 안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는 대부분, 인디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손이 등 뒤로 단단히 묶였고, 한이 맺힌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누군가가 외쳤다.

“너 이 악마 같은 놈! 천벌을 받... 으악!”

털썩.

그들은 하나, 둘 비참하게 죽어 갔다.

망원경을 내린 김추성이 혀를 찼다.

“아들아! 언제나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폐하께서 그토록 관대하게 처분하겠다고 하셨는데... 또 우리가 그렇게 안심하고 투항하라 말했는데도... 결국 의심암귀(疑心暗鬼)가 되었구나. 아쉽지만 모히칸 족 피해를 줄이는 것에 주력해라!”

“네 알겠습니다.”

김공선 대위는 즉시 돌격을 명령했다.

“우리는 오도리 기병여단이다! 오도리의 아들들이여 여단기를 높이 올려라! 전군 돌격!”

와아아.

두두두.

“오늘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또 승리를 거머쥐자!”

“우리에게 대항하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 무한히 밝은 미래가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우리는 오도리 기병여단이다! 여단기를 높이 들어라! 모두 전진하자!”

두두두.

김추성은 안타까웠다. 

그는 하루 넘게 투항하도록 설득했고, 별 달리 위협하지도 않았다. 모호크 족이 투항을 결정할 시간은 정말 충분했었다.

잠시 후, 해질녘.

오늘 만은 하늘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땅까지 피에 젖었다.

이윽고 바람마저 떠난 곳, 거기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라스트 모히칸 7

1631년 7월 1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총독의 집무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물었다.

“2천만 굴덴..., 확실하겠지?”

에른스트 카시미르, 네덜란드의 나사우디츠 백작이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각하! 앞으로도 한국의 군수품을 제공받고 전쟁자금을 융통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은행 암스테르담 지점은 네덜란드 전체 금융시장의 약 5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약속한 2천 굴덴은 기한 내에 들어올 겁니다. 또한 상환기한과 이자까지 가장 저렴합니다.”

톡톡.

프레데릭 헨드릭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자신의 과오를 떠올렸다.

‘그때 한국은행의 유대인 자산매입을 허용해선 안 되는 거였어! 아니다. 처음에 유대인을 쫓아낸 것이 잘못이야!’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지난 150년 세월동안 유대인의 네덜란드 금융업 독식은 철옹성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유대인에게서 필요한 돈을 쉽게 융통할 수 있었고, 유대인은 네덜란드 무역에 동승해 엄청난 이자수익을 얻었다.

그만큼 네덜란드 전역은 유대인의 기존 금융거래 및 영업망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쳐져있었다. 

‘남부 네덜란드 병합도 중요하지만 금융업이 외국자본에 휘둘리니 정말 답이 없군.’

프레데릭 헨드릭은 유대인들이 적국 프랑스의 전쟁자금을 댔다는 것을 이유로 모조리 추방했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 자산을 강제로 매각하도록 했고, 네덜란드와 한국이 7 대 3의 비율로 나눠가졌었다.

‘남부 네덜란드를 병합하면 한국의 비중은 더욱 낮아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때 에른스트 카시미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총독각하! 암스테르담조약... 개정을 허락하실 겁니까? ‘모피 무역’과 면책특권, 또 양허계약을 폐기하거나 개정하면 북아메리카는 영원히 한국의 소유가 됩니다. 차후 저희가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면, 한 마리라도 확실히 잡아야 한다. 이제 북아메리카는 잊고 남부 네덜란드에 전력을 기울여!”

“네 알겠습니다.”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진한 아쉬움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총독의 말마따나 어쩔 수 없었다.

‘모히칸 족’과 ‘버지니아 담배 불법밀수출’ 사건으로 한국의 분노를 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네덜란드 통일전쟁까지 그들의 발목을 잡았으니까...

이처럼 1628년 암스테르담조약의 전면개정은 불가피했다.

결국 프레데릭 헨드릭은 북아메리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시각, 암스테르담 한국은행.

지점장 얀의 사무실.

“얀... 지점장님! 이러다가 진짜 과로로 죽겠... 습니다.”

얀은 친구 핀케의 푸념에 피식 웃었다.

“핀케! 그냥 편하게 말해. 난 직장상사지만 네 동료이자 친구다. 그리고 힘들면 들어가서 좀 쉬어.”

“끄응, 그런데 왜 은행이야? 난 숫자에 무지 약하다고...”

얀은 그저 푸근하게 웃었다. 그리고 지난 유대인 자산매입을 떠올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국외로 추방될 것이다. (중략) 유대인들의 각종 자산을 헐값에 매입할 절호의 기회이니 절대 놓치지 말라! 런던공사 신준묵.

정말 천운이었다. 그리고...

‘진짜 핵심은 유대인 자산이 아니라 유대인의 금융거래, 영업망을 인수한 거였어.’

바로 얀의 생각대로였다.

한국은행 암스테르담 지점은 유대인의 자산과 함께 유대인이 기존에 보유한 금융거래 및 영업망을 모조리 인수했다. 물론 거기엔 유대인들의 양해와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처음 런던공사님의 밀서를 받고 기겁했었지. 하지만 이젠 땅 짚고 헤엄치기다. 금융고객들은 쉽사리 상대방을 바꾸지 않는, 보수적 성향이니까.’

얀은 그 과정에서 런던공사의 신임을 받아 한국은행 암스테르담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쓱싹.

사무실 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네덜란드에 빌려줄 ‘2천만 굴덴’짜리 대출서류를 면밀히 검토·작성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핀케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호! 이제 끝났다.”

얀은 부드럽게 웃으며 런던 쪽을 바라보았다.

...

같은 시각, 영국 런던.

런던공사의 집무실.

“자, 여기에 서명하시오!”

탁.

런던공사 신준묵은 유대가문 대표자들에게 여러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또 아주 밝게 웃는 표정이었다. 

반면 유대가문 대표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베어링 가문이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그가 말했다.

“한국의 금산분리(金産分離) 정책은 좀 아쉽습니다. 금융과 산업이 융합되어야 금융회사와 무역회사 등이 함께...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한국의 금융제도가 그렇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완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신준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폐하께 보고를 올려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한국은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이니 돈 벌 기회가 많을 겁니다. 채권, 주식, 토지거래 등 금융업이 계속 성장하고 있거든요.”

이때 리카도 가문이 질문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도 위그노 칙령처럼 유대인 칙령을 내려주실 순 없겠습니까?”

질문과 동시에 유대가문 대표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사전에 의도한 질문이었으리라! 실로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프랑스 출신 위그노와 영국 청교도... 국왕이 정식으로 칙령을 공포해서 한국인으로 받아들인 것은 단 둘이었다.

리카도 가문의 질문은 유대인도 동일한 조건으로 받아들여달라는 요구였다.

신준묵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건 기각이오! 유대인들은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소? 그대들은 한국인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유대국가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폐하께서는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차별받고 있는 것에 크게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영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물론 언제든지 시민권을 신청할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시민권에는 보다 많은 권리가 주어지는 만큼 의무도 더욱 무겁습니다. 당연히 시민권의 조건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에 충성하겠다고 선서해야 합니다. 다만, 유대교를 억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허위로 개종하려고 하실 필요는 없고요. 허위로 한국에 충성하겠다는 선서도 필요 없습니다...”

유대가문 대표자들은 다시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호프 가문이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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