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7/225)

화르르.

우당탕.

“겁먹을 것 없어! 모두 침착하게 대피해.”

영국인 하나가 급히 잠을 깨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와아아!”

그러나 그때 코노이 족 전사들의 난입으로 영국인들은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뭐, 뭐야? 코노이 족이 어떻게?”

분노한 영국인들은 즉시 코노이 족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콰직.

오도리 기병이 담배농장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그 힘과 속도로 전장을 압도했다. 그 광경에 영국인과 코노이 족 모두가 크게 놀랐다.

“크아악!”

털썩.

맞서 싸우려던 영국인 하나가 오도리 기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오도리 기병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이때 몇몇 기병장교들이 이구동성으로 크게 외쳤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모두 항복해!”

담배농장, 영국인과 코노이 족은 대혼란에 빠졌다. 오죽하면 싸움을 멈추고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흘렀다. 

탁.

툭.

영국인과 코노이 족들이 속속 무기를 버렸다. 그들로서는 적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와아아!”

오도리 기병은 크게 환호했다. 거의 동시에 척탄병들도 주위를 에워싸며 담배농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

담배농장 숙소 근처 외진 동굴 안.

“흐흐! 이건 모두 당신 탓입니다. 대체 왜 대족장 자리를 양보하셨습니까? 오페칸카누는 배신자 포우하탄의 친동생입니다. 포우하탄 형제는 우리 인디언 형제들을 영국 담배농장의 노예로 팔아먹은 죄인이었단 말입니다.”

호아탄의 두 눈은 핏발이 가득했다. 

그는 오른 손에 도끼를, 왼 손에는 횃불을 들고서 아버지 ‘와그니스카’를 다그쳤다. 그것이 모순, 또 억지라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오히려 그의 언행이 포우하탄 이상의 배신, 또 지독한 패륜 아닌가?

호아탄은 다시 와그니스카를 비난했다.

“그건 당신이 가지고, 내가 이어받아야 할 자리였습니다. 난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발버둥친 거라고요! 모두 당신 탓입니다. 이제는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와그니스카는 자리에 꼿꼿이 앉은 채로 묵묵히 두 눈을 감았다. 또 목을 앞으로 길게 늘였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툭!

와그니스카의 미소에 호아탄은 도끼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며 절규했다.

“죽고 싶어? 내 앞에서 웃지 마! 웃지 말라고...”

그때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 호아탄은 급히 도끼를 들고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덜컥.

“이거 아주 늦지는 않았군.”

한고립은 씨익 웃었다. 

두 남자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쉭쉭쉭!’하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 퍼졌다. 

한고립은 연이어 세 번 칼을 휘둘렀다. 마침 와그니스카를 향해 거칠게 다가서는 호아탄을 겨눈 것이었다. 호아탄은 낮은 신음과 함께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한고립이 갑자기 훌쩍 발을 구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한고립의 오른 발 옆에 작은 도끼가 깊숙이 박혔다. 정말 아찔했다.

그 순간 기세를 타고 호아탄이 달려들었다. 

한고립은 다시 칼을 겨누며 세 번 찔렀다. 하나는 호아탄의 아랫배를 겨냥한 것이었고 둘은 고간 사이를 노린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도끼가 들린 오른 손을 견제했다. 

이때 호아탄은 빠른 속도로 한고립에게 달려들고 있었기에 방향 전환이 어려웠다. 그래서 한고립의 칼을 후려치기 위해 도끼를 마치 풍차처럼 휘둘렀다. 

자칫하면 휘말려들 수 있기에 한고립은 쓰게 웃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칼과 도끼의 상성이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곤란했으니까. 그럼에도 이번 공격엔 너무나도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헉헉!”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빛엔 금세 불꽃이 튀었다.

챙챙!

칼날의 빛이 시퍼렇게 번뜩이고 칼과 도끼가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격렬했다. 날 선 무기가 어지럽게 춤추며 뱀의 혀처럼 날렵하게 상대방을 노렸다. 순간 호아탄의 다리를 향해 칼을 내뻗던 한고립은 중간쯤에서 칼의 방향을 홱 틀더니 호아탄의 가슴을 향해 벼락같이 찔러 넣었다. 하지만 호아탄이 재빨리 도끼를 세워 막자 ‘깡’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회심의 일격은 실패했다. 

칼과 도끼가 부르르 떨리는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다시 수차례 서로 공격하고 막았다. 두 사람의 공격과 방어는 치열했다. 이번 공격이 무위로 그치자 한고립이 잠시 한걸음 뒤로 발걸음을 옮기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칼을 들어 조심스럽게 호아탄의 상단을 노리기 시작했다. 

순간 호아탄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치열한 공방전 중에 한고립의 왼팔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아주 어렵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도 부상의 여파가 아닐까 짐작되는 바였다.

이때 돌연 호아탄의 몸이 왼 발을 축으로 핑그르르 한 바퀴 회전하더니 한고립의 왼쪽을 휩쓸어갔다. 변칙적인 공격에 오른손잡이인 한고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호아탄은 힘차게 기합을 지르며 한고립의 왼쪽 허리를 베었다. 한고립의 칼이 호아탄의 상체를 노리고 전진하던 찰나에 들어온 기습적 측면공격이었다.

한고립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모양인지 도끼를 향해 왼팔을 내밀었다. 호아탄은 비릿하게 웃으며 승리를 예감했다. 최소한 한고립의 왼팔, 아니 도끼의 무게와 힘으로 몸통까지 짓이겨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깡!”

“끄윽!”

금속성과 비명이 엇갈려 터졌다. 

동시에 한고립의 왼팔 의수(義手)를 고정한 가죽 끈이 헐거워져 덜렁거리고, 호아탄은 팔뚝과 어깨 사이를 찔려 연신 뒷걸음쳤다. 호아탄의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하염없이 쏟아져 상체를 물들였다. 

털썩.

호아탄은 도끼를 놓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한 형, 한 형! 지금 어디서 노닥거리고 있는 겁니까? 저는 부상자 치료하느라 바빠서... 아니, 한 형! 이건 대체...”

송준길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열심히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한고립이 사라져 찾던 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디언 누군가가 ‘한고립은 동굴 쪽으로 갔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런 대격전이 있었다니!

한고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저기 인디언 노인을 먼저 봐줘! 호흡이 극도로 불안정하니 급히 봐줘야겠어. 아니, 일단 밖으로 옮기는 게 좋겠군!”

송준길은 즉시 인디언 노인을 업고 나갔다. 한고립은 호아탄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지 않게 상처부위를 천으로 단단히 묶었다. 또 두 손까지. 호아탄은 체념한 표정으로 묵묵히 앞장서서 나갔다.

... 

다음 날,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짐의 명령은 오페칸카누를 여기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삼총사를 지그시 바라보며 짐짓 노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두렵지 않은 듯했다.

먼저 개노미가 그랬다.

“마음에도 없는 말씀이십니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리시면 그를 욕보이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친구에게 하듯 되물었다.

“들켰나?”

개노미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김자점에게 눈짓했다. 김자점은 슬쩍 개노미를 곁눈질하더니 전혀 빼지 않고 대답했다.

“오페칸카누는 우선 아버지의 땅에서 평화로이 농사를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무거운 짐은 모두 내려놓고 내년부터 담배농사나 지어보겠답니다. 그래서 유럽에 잔뜩 팔아 돈도 많이 벌고 싶다고 말입니다. 참! 내년에 처음 수확한 가장 좋은 담배는 꼭 폐하께 보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김자점의 대답이 다시 이어졌다.

“아무리 미운 자들도 한번은 용서해주시길 청했습니다. 또한 그래야 하는 이유는 폐하께서 더 잘 아실 것이라 말하곤 그냥 웃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삼총사가 대면보고하기 전에 대강의 사정을 들었다. 오페칸카누는 오랜 친구 와그니스카를 만나고 난 후, 아무 말 없이 호아탄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데리고 아버지의 땅으로 향했다.

오페칸카누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먼저 보여줬다.

나는 잠시 고심하다 송시열에게 물었다.

“짐이 그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할까?”

송시열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의 욕심이 너무나도 큰 까닭입니다. 폐하께서 인디언들을 위해 하시고자 한 것들을 차근차근 해 나가시면... 그것이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오페칸카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나도 다 알면서 물었다.

‘역시 애국자, 아니 애족자라서 그런가?’

나는 오페칸카누의 선택에 반드시 보답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반쯤 성공한 셈이군. 이제 박연 사령관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되겠어. 이번 기회에 네덜란드를 압박해서 암스테르담조약의 독소조항을 파기해야 하니까.’

라스트 모히칸 6

1631년 5월 21일, 북아메리카 동부 대서양 해상.

대서양 함대 기함.

“모히칸 족 구원이 후순위로 밀려 아쉽지 않았소?”

송준길의 질문에 차차울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니오! 오히려 저는 더 안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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