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225)

“인디언 사이에서 담배는 친구에게 권하는 최고의 인사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한 모금, 친구가 한 모금. 그것으로 하나가 된 사이는 변치 않는다고요. 자! 그럼 제가 먼저...”

김자점은 슬쩍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호기롭게 한껏 들이마셨다. 그런데...

“콜록콜록.”

아주 멋쩍은 결과만 남았다. 김자점은 볼썽사납게 기침을 연발하고서야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순간 김자점의 눈에 오페칸카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포착됐다. 분명 웃음이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좀 더 나가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담배를 권하는 것!

그런데 그 전에 오페칸카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대의 재주가 참 좋군. 내가 그리 조심했건만... 잘도 찾아왔어.”

“대족장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사람 뒤에 꼬리를 붙이는 거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허나 불청객이지. 한국에 귀화하라는 것이 그대의 용건이라면 잘 들었네. 난 거절하겠어. 혹시 다른 용건은? 더 없나? 그럼 함부로 내 뒤를 밟은 죄, 또 함부로 입을 놀린 죄로 벌해야겠군. 모두 들어와 이자를 묶어라!”

그때 김자점이 외쳤다.

“아직 살아계십니다.”

순간 오페칸카누가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혹시 만에 하나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먹에 꽉 힘을 줬다. 마치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듯 했다.

김자점이 다시 힘차게 외쳤다.

“아직 살아계십니다. 대족장의 오랜 친구 와그니스카!”

오페칸카누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명령에 티피로 들어온 인디언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타닥타닥.

화톳불 소리와 함께 영겁과도 같은 순간이 지났다.

“참으로 고약하구나! 이미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은 친구를...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다니.”

이때 오페칸카누의 눈길은 마치 꿈을 꾸는 듯 과거를 쫓고 있었다.

영원하길 바랐던, 또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김자점은 그저 웃었다. 직접 확인시켜 주면 될 일이니까. 그리고 오페칸카누의 고통을 잠시라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의 투쟁은 오롯이 인디언을 위한 희생, 이젠 보답 받을 차례였다.

어느 순간, 오페칸카누의 입에서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한마디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와그니스카!”

두 사람의 눈이 선명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오페칸카누는 담배 파이프를 물고 가슴 깊이 담배를 들이마셨다. 또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철의 사나이 오페칸카누의 눈에서.

라스트 모히칸 5

1631년 5월 19일, 북아메리카 어느 곳.

동틀 무렵.

끼익.

철썩.

카누 노 젓는 소리만 무심했다. 

강을 거슬러 북으로 가는 길... 카누 백여 척이 일시에 움직였다. 그들은 선두 카누를 길잡이 삼아 끊임없이 노를 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덜컥.

척탄대대 제1중대장 이대길 대위는 카누가 강변에 닿자마자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같은 카누에 탑승했던 인디언 길잡이가 말없이 수신호를 했다. 인디언 길잡이가 가리킨 방향은 우측 산이었다.

탁탁.

카누에서는 척탄 1중대원과 인디언 사나이들이 연이어 내렸다. 척탄 1중대원은 중대장 이대길을 포함해서 약 150명, 인디언 사나이들도 100명이 넘었다.

인디언들은 길잡이와 함께 최근 귀화한 수도 인근 인디언 부족들에서 몇 명씩 골고루 선발했다. 그들은 전투원이 아니라 이번 작전의 참관인 격이었다.

이대길은 오도리 기병여단의 반대편 산악 방면을 포위하고 영국인의 퇴로를 차단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끼익. 

잠시 후, 카누가 다시 떠났다.

그들은 작전대로 인디언 길잡이의 안내를 받아 작전지역으로 향했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산악 7부 능선 사이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담배농장은 역시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 세워졌다. 강변에서 무려 5킬로미터나 깊숙이 들어가 작은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였다.

목적지인 분지까지 어이지는 길은 강변에서 멀어질수록 동부지역 특유의 원시림이 갈수록 짙어졌다. 원시림은 담배농장의 가림막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인디언 길잡이의 안내가 없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

척!

그때 이대길이 오른 손을 들어 행군을 멈춰 세웠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부대의 휴식을 명했다. 

“10분간 휴식!”

이대길은 특별한 몇 사람을 찾아갔다. 그 사람들은 바로 김자점과 오페칸카누, 그리고 한고립과 송준길, 차차울라였다. 이대길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곧 작전이 시작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척탄예비소대와 함께 후방에 계셔야 합니다.”

바로 김자점이 오페칸카누에게 통역했다. 오페칸카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자점이 다시 물을 권하며 말했다.

“좀 섭섭합니다. 한국에 귀화하지 않으시겠다니요? 그때 담배를 들이마신 것으로 시원스레 결정하신 줄 알았었는데...”

오페칸카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자네를 친구로 대접하겠단 뜻이었네. 난 어제 족장 자리를 내려놓았어. 이젠 보잘것없는 늙은이일 뿐이야. 친구를 만나고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가 조용히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지.”

“아직 하실 일이 많으십니다.”

“아니야! 미래는 젊은이와 아이들의 것. 난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한다네.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토지는 조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이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선택을 믿고 뒤로 물러날 생각이야. 다시 말해, 자네들의 선의를 이제는 믿기로 했어.”

말이 끝나고 오페칸카누는 눈과 입을 굳게 닫았다. 김자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고립 등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같은 시각, 오도리 기병여단.

“여단장님! 척후조가 수상한 놈들을 발견했습니다.”

김추성이 눈짓으로 계속하라고 말했다.

“분명 인디언인데 담배농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군 표식이 전혀 없습니다. 숫자는 대략 50여명입니다. 추측컨대 무기를 들고 은밀히 접근하는 중인 것으로 보아... 영국인과 한패는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추성은 잠시 생각하다 척후조장에게 물었다.

“그들이 먼저 도착할 것 같나?”

“네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쯤 담배농장에 도착했을 겁니다.”

이때 김공선이 말했다.

“아버, 아니 여단장님! 바로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한패일 수도 있으니까요. 기습의 묘를 살려 일망타진 하는 겁니다.”

“좋다! 작전대로 시행한다. 후방차단은 척탄대대와 인디언들을 믿고, 우리는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노예구출에 최선을 다한다. 이번 작전은 적 10명보다 노예 1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 알겠습니다.”

...

같은 시각, 담배농장 입구.

퍽.

으악.

이른 아침, 코노이 족 전사들의 기습으로 시작된 대혼란.

이 혼전 속에서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마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저 각자가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하느냐! 오직 그뿐이었다.

“헉헉!”

코노이 족의 젊은 족장 호아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몇이나 베었는지, 몇 번이나 베였는지... 아예 세지 않았다. 오로지 시야에 든 적을 베어 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의 온몸은 핏빛이었다.

호아탄은 동맹이자 친구였던 영국인의 목을 인디언 도끼로 후려쳤다.

“꺼억!”

영국인이 목젖을 꿰뚫려 짧은 숨을 토하는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바로 뒤에 있던 다른 영국인의 당황한 얼굴이 드러났다.

호아탄은 오른 손으로 도끼를 휘저으며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당황한 영국인이 무얼 하기도 전에 도끼자루로 냅다 면상을 찍어버렸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찰나,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끄윽, 호아탄! 왜 우, 우릴 공격하는 거냐?”

하지만 그 영국인 누군가는 호아탄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다른 코노이 족 전사가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으니까.

퍽.

털썩.

“끄윽...”

그 영국인은 호아탄도 나름 친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호아탄은 그의 얼굴에 침을 내뱉고 돌아섰다.

그때, 호아탄의 눈에 혼전의 끝이 보였다. 그는 남은 코노이 전사들의 숫자를 셈하고는, 나직하게 다음 공격을 명령했다.

“놈들이 눈치를 챘으면 바로 덮치고, 만약 눈치 채지 못했으면 먼저 숙소에 불을 지른다. 어서 움직여!”

코노이 전사들은 묵묵히 움직였다. 호아탄은 그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뿌드득.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후회한들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 없었으니까. 

호아탄은 다시 있는 힘껏 도끼를 꽉 쥐었다.

‘어쩔 수 없다. 증거만 없애면 돼. 영국 놈들, 담배농장, 그리고... 아버지까지...’

이때 그의 눈에는 사이한 핏빛 광채가 번뜩였다. 

잠시 후, 담배농장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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