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225)

잠시 후, 쇼니 족장은 결심했다.

‘그래, 한국정부에 먼저 알리자. 그들이 이번 사건을 정당하게 처리한다면 더욱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에 귀화하기로 뜻을 굳힌 상황 아닌가?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 대족장께도 알리긴 알려야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엔 아무 고민 없이 오페칸카누에게 먼저 알렸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앞으로 쇼니 족의 삶과 운명,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또 누가 뭐래도 젊은이와 어린이가 한국에 보이는 호감은 절대적이었다.

‘나의 결단은 잘못되지 않았어. 대족장께 죄송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그저 한국이 담배농장 건을 잘 처리해주길 바랄 수밖에... 그런데 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영국인과 손을 잡았을까? 찢어죽일 놈...’

라스트 모히칸 4

1631년 5월 16일,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나는 먼저 한고립을 칭찬했다.

“호위대장이 정말 큰일을 해냈군.”

그렇지 않아도 오도리 기병연대장 김추성에게서 초도보고와 중간보고를 받고 의아해하던 찰나였다. 단순히 사냥을 목적으로, 백 수십 명의 중대병력이 완전군장을 하고 움직였을 가능성은 없었다.

처음 초도보고엔 네덜란드와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 단순한 알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두 번째 중간보고엔 혹시 네덜란드가 모피 무역을 넘어 인디언 노예 무역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허나 공교롭게도 한고립과 송준길이 대공을 세웠다. 

그들은 오도리 기병연대에 소속되어 동부 해안지역을 정찰하다가 천운으로 차차울라를 만났다. 또 김추성에게 급히 보고하고 차차울라를 데리고 수도까지 내달렸다.

나는 내심 아찔했다.

‘불과 어제 영국인 담배농장 사건을 보고받았는데...’

만약 한고립 등의 보고가 없었다면 ‘영국인 담배농장 사건’이야 확실히 처리했겠지만, 그것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실제는 자회사인 뉴네덜란드회사)’와 ‘모히칸 족 사건’까지 연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정말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필연이었다. 

‘영국인 담배농장에 분명 인디언 노예가 다수 있다는 보고였다. 물론 소규모로 비밀리에 운영했다면 쉽게 들키지 않은 것도 이해가 돼. 하지만 대규모 농장이라면 불가능하다. 결국 엄청난 자본과 많은 땅, 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지. 아마 영국 놈들도 그런 목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의견일치를 보았겠군. 영국 놈들이 담배농장을 맡아서 운영하고, 네덜란드가 필요한 자본과 인디언 노예를 제공하면 되니까.’

나는 ‘남의 땅에 알까기’라는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은근슬쩍 남의 땅에 들어가 내 땅으로 만드는 수법 아닌가? 

사실 네덜란드가 내부의 통일전쟁과 한국의 힘을 얕본다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네덜란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마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자적인 판단이리라!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자 곧 흥겨워졌다.

이때 송준길과 차차울라도 함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불쑥 물었다.

“호니추크 니모 차차울라?(그대의 이름이 차차울라인가?)”

순간 차차울라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인디언 말이라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웃으며 대답했다.

“호니아크 니모 차차울라 체로니.(제 이름은 차차울라입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우리말로 바꿨다. 모히크 족 여인 차차울라가 네덜란드어는 물론이고 한국어까지 곧잘 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으니까. 또한 총명한 그녀를 재차 시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웃으면서도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짐이 그대와 모히크 족을 돕고 싶지만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지만 괜한 시험이었나? 차차울라는 이름 그대로 ‘예쁜 여우’였다. 

그녀의 말은 조금 어눌했지만 확실한 우리말이었고 결단한 듯 자못 엄숙하면서도 당당한 표정이었다.

“폐하! 저 차차울라는 한국에 귀화하겠습니다. 저희 모히크 족도 함께.”

나는 크게 웃었다.

“하하! 짐과 한국은 그대와 모히크 족을 환영한다.”

드디어 ‘자국민보호’와 ‘영토수호’란 두 개의 대의명분이 완벽하게 바로섰다. 

먼저 북아메리카 전역이 한국의 영토인 것은 분명했다. 당연히 ‘영토수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피 무역에 국한된 암스테르담조약의 위반을 이유로 네덜란드를 압박하고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사실 국가의 존재는 오직 영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영토가 없어도 국가는 존속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차 세계대전 중의 프랑스 망명정부 등이 실존하는 역사적 사례였다. 

나는 국민, 그리고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믿음과 국가를 수호하려는 국민적 염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가의 밑바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역사적 진실... 국민 없는 영토는 텅 빈 껍데기고, 국가에 대한 믿음과 애국심이 없는 국민은 언제라도 결국 산산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들은 ‘자국민보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국민 한 사람의 목숨, 그 무게는 국가 전체의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 이유로 국민과 국가, 또 국가와 국민은 운명공동체였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국민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 전쟁을 선택한 국가들은... 바로 ‘자국민보호’를 통해 국가의 진정한 존재의의를 천명하려 한 것이었다. 

물론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처럼 왕의 개인적 욕망이나 또 다른 한심한 이유들이 섞여있던 경우도 무척 많았었지만...

하여튼 이 모든 것은 하늘이 나와 한국에 내려 준 천운(天運)!

나는 엄숙히 선언했다.

“차차울라! 그대는 한국인이다. 우리 한국은 국민의 부름에 응답한다. 이것이 국가로써 존재하는 진정한 목적이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짐의 대답이다. 우리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노예로 놔두지 않는다!”

...

같은 날 해질녘, 비상작전회의.

왕궁 대회의실.

먼저 나는 네덜란드와의 전면전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하! 그대들의 걱정은 기우다. 물론 짐은 자국민보호와 영토수호란 대의명분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대의명분도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에 해가 없는 경우에 한해서, 또 국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 네덜란드와의 전면전?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번 작전의 최종목적을 밝혔다.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릭 헨드리크는 영리한 자! ‘남부 네덜란드’란 ‘황금알 낳을 거위’가 있는데, 아메리카 담배 전부도 아니고 몇몇 담배농장 때문에 한국과 척을 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암스테르담조약의 독소조항을 파기하는 것이 좋겠다.”

박연 사령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그럼 네덜란드 무리들은 나소 요새(Fort Nassau)를 해상에서 포위하면 잘 마무리 될 듯합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짐의 뜻이 그대와 같다. 우선 기동함대를 보내 포위한 다음, 외교사절을 보내도록. 아마 지레 겁먹고 스스로 꼬리를 잘라낼 할 것이다. 또 어쩌면 자백할 수도 있겠지. 참! 네덜란드 무리들이 포위당한 후, 주위에서 제풀에 놀라 움직이는 자들을 특히 주의하라. 모름지기 불 난 배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놈들이 불을 낸 놈이거나 배신자일 터이니...”

이때 오도리 기병연대장 김추성과 그의 아들 김공선, 또 전직 호위대장 한고립까지 참석해 있었다. 

우선 나는 김추성 등을 치하했다.

“오도리 기병연대는 실로 짐과 한국의 간성(干城)이다. 그대들은 정묘년의 난리에서 스스로 일어나 짐과 조선을 보위했었다. 그뿐인가?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번에도 대공을 세웠다. 오도리 기병연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오도리 기병여단으로 승격한다. 그대들의 충성심과 업적은 만고에 빛나리라!”

나의 말에 김추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크흐흑, 폐하! 소신은 오직 한국군으로써 폐하께 충성하겠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다시 명령했다. 상을 줬으면 그에 걸맞은 일도 시켜야하니까. 아주 잘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오도리 기병여단은 친위대 척탄대대와 함께 영국인 담배농장을 급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가 된 인디언, 아니 우리 국민을 구원하는 것! 그 외에는 그대들의 재량에 맡긴다. 단, 순순히 항복한 자들은 살려서 데려와라. 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추악한 전모(全貌)를 명명백백히 밝히고, 일벌백계하겠다. 또한 다수의 인디언들을 대동해서 이번 작전의 진실을 모든 인디언들이 상세히 알 수 있도록 하라.”

“네 폐하! 알겠습니다.”

그 후로도 비상작전회의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

같은 시각, 코노이 족 마을.

족장의 비밀막사.

코노이 족의 젊은 족장 호아탄은 미쳐 날뛰었다. 그토록 애써 모았던 총이 불량품들이란 사실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니까.

쾅.

콰직.

“크크큭! 죄다 쓰레기야, 죄다 쓰레기였어. 야, 이 *새끼들아!”

호아탄은 절망하고 격분했다.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영국인들은 총과 탄약을 아주 비싸게 팔면서도 사격술 등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은 계약을 핑계로 총 500정을 모두 구입하면 가르쳐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참았는데, 얼마 전 한국에 귀화한 인디언이 사격술을 배웠다기에 불러서 확인해보니... 호아탄이 보유한 총들은 하나같이 핵심부품인 ‘부싯돌’과 ‘공이’가 빠져있었다. 또한 탄약도 저질품이었다.

영국인이 나눠준 탄약은 분말형태로 나무통에 담겨 있었는데 태반이 습기를 먹어 덩어리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질산염, 탄소, 황 등이 서로 분리되어 아예 불발되거나 성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탄약이라도 살려보려고 습기를 먹어 덩어리가 된 탄약을 잘게 부수라 명령했는데, 그 탄약 덩어리가 갑자기 폭발해서 인명사고까지 발생했다.

그 다음은 불문가지였다.

코노이 족 전사 중에 몇몇 심복을 제외하곤 모두 등을 돌려버렸다. 그들의 경멸 섞인 시선은 소름끼칠 정도로 매서웠다. 이대로 있다간 은밀히 세를 불린 다른 전사에게 족장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호아탄은 이를 갈았다.

“이 죽일 놈들... 내가 가만 놔두지 않겠다. 우선 담배농장에 있는 놈들부터...”

...

같은 시각, 오페칸카누 부족 마을.

마을의 가장 큰 티피(Tepee) 안은 극도로 싸늘했다.

타닥타닥.

오페칸카누는 그저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마치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장승처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반면 김자점은 오페칸카누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글거리며 말했다.

“하하!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만, 저는 언제고 대족장님 댁을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역시 사람이 친해지려면 서로 왕래가 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 보다는 제임스타운 근처가 훨씬 더 좋은 듯합니다.”

“...”

김자점이 일부러 고향 땅인 제임스타운 근처를 언급했지만 오페칸카누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퐁.

김자점이 가져온 술병 마개가 경쾌하게 뽑혔다. 또 인디언들이 애용하는 담배 파이프가 바닥에 놓였다.

순간 오페칸카누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김자점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김자점은 술 한 잔을 따라 건네주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오페칸카누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둘의 대작이 몇 순배 지났다.

그때 불쑥 이야기를 꺼낸 것은 김자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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