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인디언 여인이 깨어나면 확인할 수 있겠지요. 대체 어떤 잔인한 놈들이기에 여인에게 총질을 해댔는지... 참! 아까 알곤킨 어를 썼으니 그녀가 알곤킨 족인 건 분명합니다. 아차차 한 형! 수건 좀 갈아주시오.”
송준길의 말에 한고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서 수건을 꺼내 적당히 식힌 후, 그녀의 이마에 얹어주었다.
말없는 한고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송준길이 다시 말했다.
“한 형! 아무래도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되겠습니다.”
한고립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유럽 사략선이든 인디언 부족 전쟁이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니까.”
라스트 모히칸 2
1631년 5월 11일, 뉴암스테르담 근처 모호크 족 마을.
모호크 족장의 막사.
“흐흐, 그대의 도움이 아주 컸소.”
모호크 족장은 비릿하게 웃으며 상대를 칭찬했다.
모호크 족은 ‘이쿼로이 어’를 쓰는 인디언 부족의 한 일파로 뉴암스테르담 근처에 넓게 거주하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알곤킨 어’를 쓰는 알곤킨 족과 대비되어 ‘이쿼로이 족’으로 구분되었다.
상대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우리는 동맹입니다.”
순간 불빛에 드러난 상대의 존재는, 놀랍게도 코노이 족의 젊은 족장 호아탄이었다. 모호크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우리 모호크 족(이쿼로이 족)은 코노이 족(알곤킨 족)의 도움으로 모히칸 족(알곤킨 족)을 몰아낼 수 있었소. 물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한몫했지만 말이오. 우선 모히칸 족 잔존세력을 완전히 처리한 다음, 오페칸카누를 함께 처단합시다.”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이쿼로이 족과 알곤킨 족!
그들은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오기 전부터 전통적으로 적대관계였고 서로 싸우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얄밉게도 언어만 아주 약간 차이가 날뿐, 영역 대부분이 겹쳤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코노이 족이 알곤킨 족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같은 알곤킨 족인 모히칸 족의 뒤통수를 쳤으니까.
호아탄은 빙긋 웃었다.
“오페칸카누의 세력은 이미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사실 제 힘만으로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꼬리를 흐리는 의미를, 모호크 족장은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코노이 족장께서 아버지처럼 정성껏 모시던 분이니, 제가 성심성의껏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시 볼 수 없더라도 너무 슬퍼하시진 마세요. 크하핫!”
호아탄은 오페칸카누의 제거에 차도살인(借刀殺人)이 제격이라 여겼다. 모호크 족장이나 네덜란드의 손을 빌리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인디언 부족연합의 새로운 대족장이 되어야 할 호아탄이니까.
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갑자기 목숨을 잃은 오페칸카누..., 그 후 흔들리는 인디언 부족연합을 호아탄이 나서서 수습하면 될 것이다. 전임 대족장인 오페칸카누의 죽음을 애도하고 동시에 복수를 맹세하면 될 테니까.
이때 호아탄이 화제를 전환했다.
“모히칸 족은 어찌하실 겁니까? 아직 웅카스를 잡지 못했다니 묻는 말입니다.”
“흐흐, 웅카스는 곧 잡힐 거요. 아니, 잡히지 않아도 그리 걱정할 건 없소. 웅카스처럼 나약한 놈은 무섭지 않으니까. 난 오히려 차차울라(여자 이름 : 예쁜 여우)가 두렵소. 그 이름처럼 아주 영리하고 예쁜 여우랍니다. 하지만 차차울라는 가망이 없지. 네덜란드 인의 총에 맞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그것도 두 번이나.”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얼마 후 호아탄이 떠나고 모호크 족장만 남았다.
그는 차차울라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미모와 영리한 두뇌가 너무나도 아쉬웠다. 모히칸 족은 그녀의 빼어난 지략 덕분에 네덜란드와의 모피 무역을 손쉽게 독점했고, 승승장구했었다.
‘그년은 꼭 생포해야 했는데...’
만약 웅카스와 그의 아버지인 모히칸 족장이 너무 순진하지 않았다면?, 또 차차울라의 조언에 따라 모호크 족을 꾸준히 견제했다면?, 둘 다 아니더라도 네덜란드의 담배사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모호크 족장은 거듭된 행운에 감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선 모히칸 족의 포로들을 네덜란드에 넘겨주고 두둑한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눈엣가시였던 모히칸 족이 노예가 되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또한 그는 모히칸 족의 영역까지 몽땅 차지한 다음, 호아탄의 코노이 족과 함께 한국에 전격 귀화할 생각이었다.
‘흐흐, 우리가 한국에 귀화하면 네덜란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한국의 그늘에 숨어 네덜란드 모피 무역을 독점하고, 또 네덜란드 담배농장에 알곤킨 족 노예를 공급하면 돼! 혹시 들키더라도 네덜란드에 뒤집어씌우면 될 거야. 유럽 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었으니까.’
그의 생각은 또 이어졌다.
‘하여간 호아탄 저 놈은 진짜 인간쓰레기로군. 나도 교활한 놈이지만... 최소한 같은 이쿼로이 족의 뒤통수는 치지 않아. 그런데 호아탄은 같은 알곤킨 족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예사고, 자식처럼 아껴줬던 오페칸카누까지 배신하다니! 잠깐, 혹시 저놈이... 자기 아버지까지 죽인 건 아니겠지?’
순간 그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고심 끝에 결정했다.
‘후우, 호아탄 같은 놈은 절대 믿을 수 없다. 섣불리 믿고 있다간 내가 당할 수 있어. 그래 내가 먼저 뒤통수를 치자. 이참에 알곤킨 족을 분열시켜 그들의 힘을 쭉 빼버릴 수도 있으니... 아예 오페칸카누한테 호아탄의 패륜 사실을 은밀히 알려줘야겠어. 또 호아탄이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고 헛소문 내는 것이 좋겠군. 후후, 믿거나 말거나...’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가.
“이 분 아주 잘 드시네.”
한고립은 쌀죽 한 그릇을 다시 퍼서 차차울라에게 건넸다.
벌써 세 그릇째였다. 송준길이 끓인 쌀죽은 곱게 빻아 말린 쌀가루에 육포를 잘게 찢어 넣어서 그런지, 영양과 맛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두 사람은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탁.
차차울라는 죽 그릇을 내려놓고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인디언 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제 이름은 차차울라! 모히칸 족 사람입니다.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제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대로...”
송준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차차울라(예쁜 여우)! 참 좋은 이름이군요. 우선 몸 상태가 어떤지 말씀해주세요.”
“옆구리가 조금 아프지만 견딜만합니다. 당신은 총에 맞은 사람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훌륭한 의사가 아닙니다. 운이 좋았어요. 아, 그건 차차울라의 운이 좋았단 뜻입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나도 숨김없이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차차울라는 잠시 고심하다 결심을 굳혔는지 오히려 되물었다. 질문하는 그녀의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죄송하지만 먼저 당신의 신분을 묻고 싶어요. 하시는 말로 보아 한국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저도 한국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래도 정확한 신분을 알고 싶습니다. 저와 모히칸 족에게는 아주 중대한 문제니까요.”
송준길은 한고립과 눈을 마주치고는 사실대로 말했다.
“저희는 둘 다 한국군이고 오도리 기병연대에 속해 있습니다. 지금은 정찰대원으로 동부해안지대를 순찰하고 있는 중이구요.”
차차울라는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모히칸 족 사람입니다. 사흘 전, 저희 모히칸 족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았어요. 적어도 오백 넘는 숫자로 추정됩니다. 그 외에 얼굴을 가린 자들도 있었는데 그건 확실히 인디언이었어요. 모두 합치면 천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우리 모히칸 족은 네덜란드와 오랜 기간 모피 무역을 해왔기 때문에 그들을 몰라볼 수 없어요. 제 몸의 총상도 그들이 남긴 겁니다. 하지만 인디언 부족은 대강 어디라고 추정할 뿐 확실하진 않아요.”
송준길은 한고립에게 간략히 통역해주고 다시 물었다.
“네덜란드와 인디언, 그들은 목적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차차울라는 잠시 고민하다 툭 터놓고 대답했다.
“솔직히 한국을 끌어들여 우리 모히칸 족을 돕게 하고 싶어요. 제 작은 머릿속에서도 여러 가지 계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건 온당치 않아요.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의심되는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첫째,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그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모피 무역의 상대방을 바꾸려는 목적입니다. 그동안 모히칸 족이 네덜란드 모피 무역을 독점해왔지만 이제는 다른 부족과 거래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엔 의문이 생깁니다. 모피 무역 거래가 끊긴 모히칸 족의 반발쯤이야 네덜란드나 다른 인디언 부족들에겐 그리 두렵지 않으니까요.
둘째, 이번에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우리 모히칸 족을 노예로 팔겠다는 목적이에요. 물론 첫째 방법과 연계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모피 무역 상대방을 바꾸면서 성가신 모히칸 족까지 함께 처리하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도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제가 알기론 북아메리카 인디언 노예는 오직 스페인만 일부 사들였어요. 당연히 네덜란드는 어떤 아메리카 인디언 노예무역도 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저는 한국의 해상 검문검색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네덜란드 인들의 푸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노예제 자체를 반대하는 한국의 영역에서 노예무역을 할 수 있을까요?
셋째, 이건 조금 생각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우리 모히칸 족은 물론이고 뉴암스테르담과 뉴네덜란드의 모든 인디언들을 없애거나 쫓아내는 방법입니다. 참, 저는 네덜란드어를 제법해요. 그래서 암스테르담조약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네덜란드의 모피 무역 기득권을 무기한으로 보장한다면서요? 그럼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의 모든 인디언을 죽이거나 쫓아내고 네덜란드 인으로 가득 채우면 됩니다. 그게 바로 남의 땅에 비집고 들어가 내 땅으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음, 하지만 이건 네덜란드가 한국의 힘을 능가해야 가능하니까...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넷째, 이건 아주 생각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냥 제 상상력, 아니 추측이라고 봐야 해요.
그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북아메리카에서 확보한 인디언 노예를 동원해 무언가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겁니다. 어차피 북아메리카 땅이 광활하니 단기간에 들키기는 어려워요. 네덜란드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시아 곳곳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노예를 사용한다고 해요. 네덜란드는 아시아 향신료를 노예농장에서 싸게 키워 유럽에 비싸게 팝니다. 그런데 그걸, 꼭 아시아에서만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오히려 담배는 아메리카 특산품입니다. 최근 한국 국왕폐하께서 담배를 독점하겠다고 하셨으니 가격은 더욱 오르겠지요? 네덜란드에게도 아시아 향신료 노예농장처럼 절실한 필요성이 느껴질 겁니다. 특히 버지니아 담배 농장이요. 대부분 들은 말, 제 추측이라 그리 신빙성은 없겠지만...
이상입니다.”
송준길은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이어 그는 한고립과 심각한 표정으로 상의한 다음,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들 선에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동부 어느 곳.
김추성의 임시막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분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행차하셨을까요?”
그것은 명백한 책임추궁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무단으로 동부 깊숙이 나타난 것은 아주 큰 문제였다. 그들은 명칭만 동인도회사지 실제론 사설군대였고, 하나같이 완전무장까지 했다. 마치 누군가를 급히 뒤쫓는 모양새였다.
잠시 후, 오랜 침묵 끝에 나온 네덜란드 책임자의 대답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크흠, 우리는 그냥 사냥을 즐기러 나왔소이다. 또 사냥하다 잠시 길을 잃었습니다.”
김추성은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어이쿠 사냥을 즐기려고 백 수십 명이 완전무장까지... 이거 중대병력인데, 혹시 아프리카 사자나 코끼리라도 잡으시려고요! 게다가 길까지 잃었다? 그것도 뉴암스테르담에서 사흘거리를? 허허, 농담도 정도껏 하셔야지. 그걸 믿을 것 같습니까?”
“크흠, 귀국이 믿거나 말거나 사냥하러 나온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본인은 암스테르담조약에 의거, 네덜란드 참사관의 입회하에 이번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곧이어 네덜란드 책임자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김추성은 더욱 분노했다.
“네네, 암스테르담조약! 아주 좋습니다. 저는 네덜란드 참사관의 입회하에 이번 문제를 원!만!히! 처리하겠습니다. 허나 네덜란드 참사관이 도착할 때까지 그대들은 여기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김공선 대위! 네덜란드 분들을 편히 모셔라. 참, 무장해제도 잊지 마.”
“네, 연대장님!”
잠시 후.
김공선이 돌아와 걱정스레 보고했다.
“아버님! 그건 분명히 사람의 핍니다. 네덜란드 인들의 무장을 압수해서 확인하니 총과 칼에 사람의 핏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 전의 것입니다.”
“음, 전령은?”
“초도보고는 급보로 이미 보냈고, 중간보고도 방금 보냈습니다.”
“잘 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을 발견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북아메리카는 만주나 조선과, 정말 비교할 수 없이 넓은 땅 아니냐?”
“저도 같은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눈 뜨고도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인디언들의 적극적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 인디언들의 신뢰와 협조가 있으면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북아메리카 전역을 훤히 지켜볼 수 있겠지. 네덜란드 놈들이야 어차피 고이 보내줘야겠지만 일단 사령부 명령을 기다려보자꾸나.”
“네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