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한국 공연마차가 ‘착한 곰 여인’을 공연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더군요. 분명 제가 아는 ‘착한 곰 여인’ 이야기인데 묘하게 달랐습니다. 그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착한 곰 여인’ 공연을 본 아이들이 한국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공연에서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곰이나 토끼인형,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각종 놀이기구를 나눠줍니다. 또 사탕이나 초콜릿도 아이들에게 나눠줍니다. 한국 놈들은 아이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정말 교활한 놈들이에요.”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제가 고심 끝에 한국 공연마차를 습격해서 불태우려고 했는데, 젊은 녀석들이 고개를 돌려버리더군요. 아뿔싸!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국 공연마차에는 죄다 어린애들이었습니다. 인디언 전사들이 어린애들을 해치다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니까요. 어린애들을 내세우다니! 한국은 진짜 흉악한 놈들입니다.”
쾅!
그때 누군가의 격렬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흥! 그렇다고 질질 끌려 다닐 순 없습니다. 젊은 녀석들과 어린 애들이 뭘 알겠습니까? 당장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우릴 꼬드기겠지만 결국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이 대대적으로 토지반환을 하고 농기구를 나눠주며, 소와 말을 공급하는 이유가 대체 뭐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그건 담배농장입니다. 우릴 담배농장의 노예로 부리려는 수작이라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결국 한국의 민낯이 드러날 겁니다.”
순간 좌중 모두의 눈길이 오페칸카누를 향했다. 오페칸카누는 그저 웃으며 두 눈을 감았다.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가.
뉴암스테르담(현대 뉴욕)에서 한국의 북아메리카 수도를 잇는 도로는 동부 해안가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한편에는 거대한 침엽수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다른 편에는 거친 대서양 바다가 넘실댔다.
동부 해안도로는 오래 전부터 인디언들이 애용하던 길이었는데, 최근에 들어서 한국이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보수했다. 도로의 갈림길마다 방향 등 표지석이 세워졌고, 수도까지의 거리가 표지석에 정확히 새겨졌다.
정말 실용적이며 아름다운 도로였다.
“헉헉!”
그때 인디언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거친 숨을 내쉬며 해안도로를 걷고 있었다.
털썩.
두 사람 중 뒤따르던 여자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앞선 남자가 황급히 뒤돌아 그녀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내 사랑, 차차울라(여자 이름 : 예쁜 여우라는 뜻)! 어서 힘을 내요.”
그러나 그녀는 슬픈 눈짓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미, 미안해요. 웅카스!”
웅카스라 불린 남자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발목 아래로 흐르던 피가... 어느 새 꺼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가망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웅카스는 굴하지 않았다.
“차차울라, 내게 업혀요. 함께 갑시다.”
웅카스가 차차울라를 업으려 등을 돌렸다. 허나 차차울라는 응하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은 너무나 편하게 들렸다. 또 평소처럼 장난스런 말투였다. 놀란 그가 다시 등을 돌리며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명백히 거절하는 말투였다.
“차차울라!”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 정말 환하게 웃었다.
“이런 바보! 난 차울라(여우)니까. 멍청한 네덜란드 인들은 감히 날 잡을 수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고 어서 떠나요.”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처절하게 부딪쳤다. 그도 그녀도 다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 길가 숲으로 옮겼다.
그리고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살아만 있어요. 반드시 돌아올 테니...”
그녀는 웃으며 남았고, 그는 울며 떠났다.
두 사람은 모히칸 족, 동부 알곤킨 족의 한 일파로 뉴암스테르담 근처에서 거주하는 부족이었다.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토지보상안을 거부했다는 건가?”
“네 폐하! 보고 드린 그대롭니다.”
나는 박연 사령관의 보고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토지반환은 쉬운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주 어려운 곳도 있었다.
예컨대 버지니아의 텅 비어있는 땅이야 인디언들에게 토지를 반환하겠다고 통보하기만 하면 쉽게 끝났다. 반면 북아메리카 수도나 뉴암스테르담(현대 뉴욕 맨하탄 섬)같은 땅은 일반적인 토지반환이 불가능했다.
당연히 토지반환이 불가능한 지역은 토지보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었다. 그러나 인디언 토지보상 명목으로 소와 말, 조리기구와 농기구, 각종 농사기법 등을 제공하기로 하면서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와의 1628년 암스테르담조약이 문제였다.
-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과 뉴네덜란드에서 영위하는 자국 사업의 기득권을 보장한다.
마땅히 암스테르담 조약의 해당 조항에 따라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모피 무역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네덜란드 회사 몇몇이 대구와 연어 어업에서 작은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등에 인디언 토지보상을 공동으로 책임지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28년 암스테르담조약에 따라 온전히 한국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발뺌했다.
다시 말해 기득권, 오직 단물만 빨아먹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겐 상부상조, 상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참, 알곤킨 족이라 했나?”
“네 그렇습니다. 사실 알곤킨 족은 알곤킨 어를 사용하는 인디언 부족들을 지칭하는 말이고 동부해안 북쪽부터 몬트리올 근방까지 아주 넓은 지역에 흩어져 거주합니다. 그들의 거주 지역이 다소 춥기 때문에 농업 규모는 작고, 대부분 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갑니다. 알곤킨 족 중에는 모히칸 족과 휴런 족이 숫자도 많고 유명합니다.”
“흠, 모히칸 족이라...”
“네 폐하! 모히칸 족은 뉴암스테르담 근처에 거주하는 알곤킨 족 계열로 네덜란드와 아주 가깝습니다. 반대로 휴런 족은 프랑스와 친밀합니다. 두 부족 모두 모피 무역에 종사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피 무역...’
고급 모피는 비단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모피로 만든 코트와 담요는 부르는 게 값이었으니.
북아메리카 담비, 비버, 늑대, 여우, 다람쥐 및 산토끼의 날가죽이 크게 인기였고 유럽에서 아주 비싸게 팔렸다.
그러나 현재, 유럽의 오랜 전쟁과 경기침체에 따라 비단이나 모피 등 사치품 소비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였다.
나는 의아했다.
‘최근 모피 무역 이익이 눈에 띄게 줄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뭐, 아직은 괜찮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정말 의문이었지만 내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박연 사령관에게 내릴 명령이 있었으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먼저 물었다.
“세인트 어거스틴(플로리다)과 서인도제도의 상황은 어떤가?”
“폐하께서 명하신대로 가지런히 정돈하고 있습니다. 두 곳은 담배와 사탕수수 천국이었습니다. 스페인 귀화자들에게 적당히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노예를 부리거나 소유한 곳은 철저하게 혁파했습니다. 특히, 흑인노예들은 모두 거두어들여 고향 아프리카로 돌려보냈습니다. 적당한 급료를 챙겨줘서 어떤 불만도 없었습니다.”
“정말 수고했군. 앞으로 해군 기동함대는 유럽 사략선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해안순찰을 강화하고, 아메리카 전역에서 [한국-아메리카 항해조례]가 엄수될 수 있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하네...”
나는 박연 사령관과 [한국-아메리카 항해조례]에 대한 논의를 오래도록 이어갔다.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가.
“한 형! 여기 참 시원합니다. 풍경도 아주 그림 같지 않습니까?”
송준길이 대서양의 짠 내 머금은 바람을 만끽하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반면 한고립은 뚱한 표정이었다.
“그저 그렇군. 바다는 바다고, 풍경도 죄 똑같은데...”
그때 송준길이 말했다.
“흐흐, 한 형! 그만 포기하시지요. 저는 괜찮은 궁수(弓手)입니다. 사대부들도 하루에 여러 순 이상 활을 쐈습니다. 제 등에 매인 각궁(角弓)이 애들 장난감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형제, 그 이상입니다.”
그래도 한고립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두워졌다.
‘나도 똑같아. 그래서 나 혼자 나선 거였어. 혹시라도 준길이 네가 다치면... 내가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송준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흥! 제가 그동안 한 형 수발을 들면서 이렇게 키워줬건만...”
지난 두 달, 한고립은 재기를 위한 몸부림을 쳤다. 거기에 송준길이 온 힘을 다해 도왔고...
한 사람은 검(劍), 한 사람은 궁(弓)이었다.
“후우!”
할 말이 없어진 한고립은 왼쪽 팔꿈치에 연결된 금속제 의수(義手)를 ‘딸깍’ 소리 나게 시험했다.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에서 왼팔을 잃고 생긴 버릇이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마치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말투였다.
“그럼 내 말 잘 들어야 해.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 임무는 정찰이야! 전투가 아니라 정찰! 우리 두 사람은 오도리 기병과 함께 동부지역을 정찰하는 중이다. 수상한 세력이 나타나면 위치확인하고 물러나거나, 정 위급할 땐 신호탄을 쏘고 달아나면 그만이야. 내가 알려준 독도법에 따라 위치확인은 수시로 해야 해. 알았지?”
그 말에 송준길이 웃으며 답했다.
“하하! 또 호위대장 시절로 돌아가셨네. 한 형께서 그리 신신당부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한 두 살 먹은 앱니까? 제가 이 활로...”
순간 송준길이 흠칫 말을 멈췄다. 한고립이 ‘쉿’하며 오른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으니까.
곧이어 한고립이 눈짓을 하며 조심스레 숲으로 들어섰다. 그의 오른 손이 투박한 검갑에 대어진 것도 동시였다. ‘스릉!’, ‘퉁!’하는 낮은 울림과 함께 매끈한 칼날과 억센 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고립, 송준길... 두 사람 모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선명한 핏자국을 먼저 발견한 것은 송준길의 눈, 동시에 한고립이 어느 한 곳을 노려보았다. 그 곳에서 누군가의 거칠고 낮은 숨결이 느껴졌으니까.
“철컥.”
한고립은 칼을 집어넣고 천천히 다가섰다. 내공이 깊은 무인은 저리 숨 쉬지 않았다. 거칠고 낮은 숨, 모름지기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아픈 사람이리라! 송준길도 고개를 끄덕이며 각궁을 갈무리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나뭇가지를 치우며 걸었다.
그때 덤불 사이에서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일추카 히 닷피!(올바른 자라면 그냥 두고 가세요)”
송준길이 멈칫하다 대답했다.
“호크니 헤일추카 호니아 쿠피.(우리는 올바른 자니까 그대를 그냥 두고 가지 않겠소)”
털썩.
“아니, 이것 보시오! 한 형, 어서 응급처치를...”
몇 시간 후, 해질녘.
타닥타닥.
보글보글.
송준길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후우! 한 형, 분명 이 총탄은 한국군 제식총탄이 아닌 듯합니다. 하필이면 인디언 여인에게 총을 쏘다니... 진짜 유럽 사략선이 나타난 걸까요? 아니면 인디언 부족들끼리 전쟁이라도 벌인 걸까요?”
한고립은 묵묵히 바닥에 누워있는 인디언 여인을 바라보았다. 방금 송준길이 기적적으로 뽑아낸 총탄은 분명 한국군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