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225)

이번엔 개노미가 대답했다.

“제가 알기론 세인트 어거스틴(플로리다)과 서인도제도(쿠바)의 담뱃잎을 수입해서 담배를 만들어 파는 세비야(스페인 항구도시)의 담배업자들입니다.”

“그것도 정확하다. 그러나 이젠 과거일 뿐이다. 그들은 오직 담배만으로 40배가 넘는 엄청난 폭리를 취했지만, 그 누구도 담배업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다. 아메리카 담배의 독점과 함께 그들이 납부했던 담배관세만 해도 연간 수백만 굴덴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올해부턴 우리가 아메리카 담배를 완전히 독점했다. 이제 담배의 독점이익은 아메리카의 차지고, 그것으로 아메리카를 살찌워야 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김자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쑥 물었다.

“그대는 애국자의 희생이 뭔지 아는가?”

김자점은 곧바로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얼굴빛이 이내 창백해졌다. 결국 김자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고는 삼총사의 두 가지 책략을 모두 허락했다. 그리고 그 책략의 이면에 새겨진 김자점의 속내까지도.

...

한밤중, 국왕의 집무실.

나는 삼총사가 올린 [동부지역 인디언 토지반환 및 담배사업 재개에 관한 보고서]에 첨삭을 하면서 문득 혼잣말했다.

“내가 진시황이나 항우 같은 패왕은 절대 아니다. 허나 대규모 학살이 아닌, 어느 정도의 불가피한 희생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혹시 김자점이 나를 너무 무르게 봤나? 어쨌거나 칙령은 거짓말이니... 아니다, 그것만은 아니지.”

역시 김자점은 문제적 인간이었다.

나는 오페칸카누를 설득할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했었다. 

그런데 김자점의 책략대로라면 오페칸카누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러나 그를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결단하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나?

김자점의 책략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자나 깨나 꿈꾸던 토지반환이 남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면 기쁨보다는 무력감이나 자괴감에 빠질 것이고, 역린이던 담배사업이 순조롭게 재개되면 분노보다는 지독한 절망을 느낄 것이다. 결국 오페칸카누가 망국의 제 정신인 군주거나 충신이라면 스스로 희생할 자리를 찾을 거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

제정신 박힌 망국의 군주들이 분연히 나서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자결한 것은 부지기수였다. 망국의 충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백제 성충은 옥중에서도 탄현과 기벌포를 방어하라 상소하다 죽었다. 또 계백은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조선사대부들은 역사에 밝고 성리학적 충의를 부르짖는 자들... 

과연 김자점이 이를 몰랐을까?

그래서 나는 김자점에게 ‘그대는 애국자의 희생이 뭔지 아는가?’라고 불쑥 물었다.

그것은 오페칸카누를 반드시 살려서 내 앞에 데려오라는 의미였다. 

만약 오페칸카누가 애족자로써 장렬히 산화 또는 희생한다면... 당장은 편해도 나중에 크게 곤란할 수가 있었다. 

오페칸카누야말로 북아메리카 통합의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니까. 

‘김자점도 분명히 알아들었겠지?’

나의 손과 머리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그만큼 김자점에 대한 고민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호주에 남은 수상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쓱싹.

이제는 담배사업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선 담배사업은 생산과 판매의 분업화 및 전문화가 선행되어야 바람직하겠어. 그래야 담배사업의 이익이 1차적으로 담배농장에서 담뱃잎을 생산할 인디언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으니까. 담배공장은 충분한 자본을 가진 개인이나 법인에게 맡기더라도 적정한 1차 생산자 이익을 제때 분배하지 않으면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겐 식민지 수탈이나 다름없다. 담배사업자들의 담뱃잎 구입가격을 통제하고, 인디언들에게 세금으로 농업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좋겠다. 참! 담배농사가 지력을 크게 소모하니까 구아노를 보급해서 지력을 보조하도록 해야겠군.”

다시 곰곰이 생각하니 담배사업 자체가 엄청난 순환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나의 고심은 계속되었다.

“음, 버지니아든 아메리카든 담배농사의 가장 큰 문제가 엄청난 지력소모로 인해 휴경지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계속 새로운 땅이 필요했었지. 식량생산을 위한 농경지도 필요한데 말이야. 그래! 내가 아는 바로는 나우루는 물론이고 페루와 칠레에 구아노가 지천으로 쌓여있다. 나우루는 이미 확인되었고 페루와 칠레도 마찬가지겠지. 후우, 이거 단순히 담배농장과 담배생산, 수출문제가 아니군. 무역도 마찬가지겠지만 담배사업도 그렇다. 아메리카 전역을 연결하는 순환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담배사업의 이익은 담배사업자나 수출업자 누군가의 온전한 독점이익이 되고 만다. 1차 생산자인 인디언들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연합국 전체가 이익을 볼 수 있는 순환구조가 되어야 해! 물론 한국이 가장 큰 이득을 봐야겠지만.”

그때 조선의 인삼, 또 한국의 공기업이었던 담배인삼공사가 떠올랐다.

담배 독점의 순환시스템에서는 공기업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 사기업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도 각각 있었다.

쓱싹.

이윽고 담배사업의 순환시스템에 대한 생각이 끝났다.

“하하! 유럽은 인디언을 정복했었지만, 인디언들은 [평화의 상징]인 인디언 담배로 유럽을 정복할 수 있겠군. 아메리카 담배로 유럽의 돈을 긁어 모으면 그동안 유럽인에게 수탈당했던 돈을 고스란히 되찾는 셈이야. 아주 좋군, 정말 좋아!”

그런데 묘하게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

같은 시각, 호주 서울.

수상의 집무실.

“고작 토끼 몇 마리, 고양이 몇 마리가 벌써 이렇게 불었다니?”

수상은 어이가 없어 수하에게 되물었다.

“저희도 난감한 상황입니다. 사람을 풀어 발견하는 족족 죽였지만 역부족입니다. 서울 근교만 어림잡아도 토끼는 최소 수천 마리가 넘을 듯합니다. 고양이 역시 서울에서 수시로 발견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양이와 토끼문제는 스페인 함대가 원흉이었다. 

유럽의 모든 배들이 그렇지만 스페인 전함들도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식용으로 염소와 토끼 등을 실었다.

오직 한국만 국왕의 이해하지 못할 명령으로 고양이와 토끼를 호주에 들이지 못하게 금지했었다.

수상은 국왕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조선 호랑이도 아니고 겨우 스페인 토끼와 스페인 고양이라네! 이 넓은 호주대륙에 그런 작은 동물들이 어찌 큰 해를 끼치겠는가? 결론적으로 폐하의 명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것도 하늘의 섭리겠지. 우선 토끼와 고양이 사냥을 상시 허용하고, 많이 잡는 시민들에게 적당한 포상을 지급하게. 폐하께는 내가 보고하겠네.”

“네 알겠습니다!”

수하가 나가고 수상은 다음 안건을 떠올렸다. 사실 호주 수상에게 고양이와 토끼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수상은 국왕의 빈자리를 대신해 호주를 온전히 책임지고 있었다. 

현재 수상의 최대 관심사는 조선과 호주시민의 북아메리카 이주와 인구폭발이었다.

조선과 호주 시민들 중에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지만 조선과 호주에 잔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주민과 잔류를 인구비율로 따지면 거의 7 : 3 이었다. 

또한 조선과 호주 인구는 여전히 폭발적인 증가추세였다.

가장 주요한 인구증가 요인은 첫째가 충분한 식량공급, 둘째가 천연두 예방접종과 위생의식 향상으로 소아사망이 크게 감소한 점, 셋째가 국민소득 향상으로 가족부양능력이 크게 늘었고 그에 따라 출산율이 함께 폭증했다.

수상은 호주를 떠나기 전 국왕의 신신당부를 떠올렸다.

- 수상,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인구증가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인구는 다다익선입니다. 조선, 호주에서 북아메리카까지 한국인으로 가득 채워야하니까요. 어차피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이 돌며, 큰 전쟁이 일어나면 인구가 자연히 감소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머나먼 미래의 일입니다. 북아메리카를 온전히 한국인으로 채울 때까지 절대 멈추지 마세요! 제 말은 인위적으로 인구문제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 아시겠지요?

그러나 국왕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었다.

‘배고픈 백성들은 외적 백만 대군보다 무섭다!’는 옛말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명백한 진실이었으니까.

수상의 우려는 분명 합리적이었다.

‘지금은 식량이 남아돌지만 언제까지나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의 무역과 해상운송역량으로 식량이 남아도는 곳에서 식량이 부족한 곳으로 언제든지 운송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어. 예를 들어 같은 면적의 땅에서 생산력을 크게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말이야. 폐하께서 고민하신 관개농업이나 비료도 있지만 그 이상의 방법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겠어.’

수상은 고심 끝에 결심했다.

‘나도 3년 후면 후임자에게 호주를 맡기고 북아메리카로 떠난다. 그때까지 호주의 안정과 식량문제 해결에 힘써야겠어. 또 남동도(현대 뉴질랜드)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지.’

대가

1631년 3월 18일, 수도 어느 관청.

이른 아침.

김자점은 두 사람의 사전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먼저 송시열이 담담하게 김자점을 타박했다.

“폐하께 그런 식의 꼼수는 피해야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개노미는 한술 더 떴다. 익살스런 말투였지만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비난이었다.

“이거 어린 친구의 식견이 자네보다 훨씬 낫구먼! 참, 서인(西人)은 능양군처럼 허접한 자를 택군(擇君)했었지?”

지난 1623년 인조반정에서 서인은 광해군을 혼군(昏君)으로 보고, 그를 대체할 새로운 임금으로 능양군을 선택했다. 그것이 서인의 택군이고, 하필 그 서인 중에서 반정 1등공신이 김자점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피식 웃었다. 그까짓 타박과 비난엔 생채기도 나지 않는 듯. 오히려 뻔뻔한 표정으로 개노미의 비난을 정정했다.

“흐흐, 그건 서인의 택군이었지. 나의 택군은 보다시피... 내가 전심전력으로 따른 것은 오직 폐하뿐이시다.”

그러자 개노미가 화들짝 놀란 척하며 큰일 났다는 투로 말했다.

“뭐? 사대부가 스스로 택군을 입에 담는 것은 역모야!”

“후후, 여기는 조선이 아니고 나는 사대부가 아니야! 나 김자점은 태생부터 성리학을 혐오하는 사람이었어. 무슨 일이든 공맹을 따지고 들기가 죽기보다 싫었단 말일세. 차라리 풍수지리와 주역이라면 모를까. 김자점이 어떤 사람인지 더 확인시켜 줘?”

개노미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김자점은 과거 국왕이 호주에서 ‘여기는 조선이 아니고 나는 이성계가 아니다.’라고 말해서 한국이 조선의 구체제를 계승하지 않고, 태조 이성계의 자손이 아니라고 천명한 것을 빗대어 말했다.

그때 송시열이 손뼉을 딱 쳤다.

“저도 동감입니다. 여기는 조선이 아니고 저 역시 사대부는 아닙니다. 아직은 성리학의 효용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우리가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모자랍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송시열의 제안에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좋아, 이제 일하자고!”

잠시 후.

개노미와 김자점은 옥신각신했고, 송시열은 묵묵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선공은 개노미였다.

“시침 떼도 소용없어! 내가 자네 꼼수를 모를 거 같아?”

“후후, 어제까진 그랬었지. 오페칸카누를 사로잡기보단 처단하는 게 훨씬 낫다고 여겼었으니까.”

“그럼 이젠 아니다?”

“당연히! 나 김자점은 현 시대의 풍운아이자 한국 제일의 충신을 자임하고 있어. 폐하께서 내린 명에 단 한 치도 거스를 생각이 없단 말일세!”

“그럼 오페칸카누를 심복시키는 것은?”

“흐흐, 그건 답이 없지. 처단하는 것이 가장 쉽고, 사로잡는 것은 어찌어찌 가능해! 하지만 오페칸카누 같은 자를 심복시키는 것이 가당키는 한가? 체념하고 투항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그 좋은 머리를 쥐어 짜!”

개노미의 머릴 쥐어짜라는 말에 김자점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페칸카누 같은 자는 빨리 처단할수록 우리에게 이로워. 그는 동부 인디언 연합부족의 대족장이고 동부 인디언들에게 훌륭한 부족장으로 추앙받고 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만약 그의 장렬한 희생으로 동부 인디언들이 규합해 마치 들불처럼 타오른다면? 또 만약 그가 투쟁 끝에 동부에서 쫓겨 중부 깊숙이 들어가 중부 인디언들까지 선동해서 우리에게 경각심 내지는 증오심을 가지게 한다면?”

“그건 다 아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해.”

“그러니까 그게, 아직은 답이 없다는 말이야. 가장 편하고 쉬운 건, 오페칸카누가 인디언의 희망이 되기 전에 싹을 잘라 버리는 것! 그런데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지. 그를 사로잡는 것은 그나마 쉽겠지만 어떻게 그를 심복시키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그게 가장 어려워! 오페칸카누 같이 신념이 투철한 자에게는 광해군 주변의 탐관오리처럼 뇌물이나 미녀가 통할 리 없으니까.”

그때 송시열이 끼어들었다.

“두 분께서는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오페칸카누가 진정한 애족자라면 동부 인디언들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항복하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현재 동부 인디언들은 한국에 저항할 힘이 없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겁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칙령을 내려 한 핏줄로 인정하셨고 토지반환까지 허락하신 이상, 동부 인디언들도 이제는 반신반의할 겁니다. 게다가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된 미래까지 보입니다. 오페칸카누도 힘의 격차를 절감할 테니, 동부 인디언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항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능성은 아주 적겠지요. 그래도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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