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225)

개노미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김자점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거야말로 천재적 발상이었지. 아니 그런가?”

탁자 위의 지도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뒤죽박죽이었다. 

빨간 점은 인디언 부족, 노란 점은 위그노 이주민, 파란 점은 영국계 한국인, 초록 점은 기타 유럽 이주민을 의미했다. 그 점들 아래엔 세필(細筆)로 부족명 등 출신지와 정착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특히 수도와 북아메리카 동부에 거주하는 코노이, 델라웨어, 난티코크와 쇼니 족 등 수십 개 이상의 인디언 부족들이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었다. 

지도는 김자점이 그의 아들 김련과 오도리족 김추성에게 명하여 만들어졌다.

사실 김자점의 의도는 아주 불순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구분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국왕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오! 이 지도를... 김자점 그대가 만들었다고? 정말 잘했네, 아주 잘했어.

당시 개노미는 아연실색했었다. 그러나 이어진 국왕의 설명에 넘어가고 말았다.

- 하하! 동부총독의 걱정은 기우다. 물론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정말 나쁜 의도가 되겠지.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역으로 생각해 보라! 우리가 인디언이라면 과연 어떨까? 말 그대로 오페칸카누가 ‘나쁜 놈’이라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침략을 당하는 인디언 입장에서는 오페칸카누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이자 ‘착한 놈’이지. 이건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년에 당한 치욕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사실 오페칸카누 같은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 나머지 ‘착한 놈과 이상한 놈’은 우리의 대의에 쉽게 설득되거나 그저 시류에 따르는 자일 것이다. 또는 진짜 야심을 가진 ‘이상한 놈’도 간혹 있을 터. 그것을 솎아 내는 것이 그대들의 임무가 된다. 그나저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쁜 놈들’이다.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

개노미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자네 너무 희희낙락하지 말게. 난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아! 오페칸카누 같은 애국자, 아니 애족자(愛族者)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그렇지 않나?”

그때 송시열이 끼어들었다.

“저도 공감합니다. 그가 진정한 애족자라면 부러질지언정 절대 굽히진 않을 테니까요. 예컨대 징비록을 쓰신 서애 유성룡 공이나 난중일기를 쓰신 충무공 이순신 공께서 일본에 항복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김자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웃는 모습이었다.

“흐흐, 나도 그리 생각한다네. 그래도 그리 절망적이진 않아. 내가 생각한 꼼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겠나?”

실마리

1631년 3월 17일, 수도 김자점의 저택.

김자점은 어제 있었던 개노미, 송시열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국왕폐하께서도 인정한, 아주 유능한 인재였지만 음모(陰謀)와 이간계(離間計)엔 별 달리 재능이 없었다. 

반면 1623년 인조반정과 1628년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김자점 자신은 오직 음모와 이간계로 인조반정 1등 공신과 서부전쟁 1등 공신에 올랐었다. 

물론 누가 보더라도 개노미와 송시열은 대단한 인재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각자의 전문분야가 따로 있는 것처럼 그 전문가도 따로 있는 법이었다.

역사의 일반론으로 볼 때 북아메리카의 완전한 통합 방법론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원주민인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모조리 죽여 없애거나 완전히 동화시키는 것, 그게 아니면 적당히 갈라서 분열시키는 것.

그 세 가지는 그나마 쉬운 것, 도저히 불가능한 것, 적당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모두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첫째,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은 한국의 건국이념과 대의에 명백하게 저촉되었다. 

또한 이는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대의인 식민통치와 노예제 반대에도 명백하게 모순되는 행위였다.

만약 한국이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모조리 죽여 없앤다면,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한국의 대의가 거짓이라는 걸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곧이어 아메리카 연합회의가 붕괴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리라!

둘째,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완전히 동화시키는 것도 첫째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모순이었다. 인디언 입장에서는 한국인도 유럽인들과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은 원주민이 아닌 이방인이자 침략자였으니까.

‘그나마 두 번째 방법이 가장 부드러운 정복이고 아메리카 연합회의도 적당히 수긍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틀렸어. 누가 뭐래도 우리는 침략자! 둘째 방법은 불가능해.’

그래서 그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적당히 갈라서 분열시키는 것은 첫째와 둘째 방법의 절충이었다.

바로 김자점의 특기인 음모와 이간계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철저히 분열시킨 다음, 이이제이 정책으로 순차적으로 한국에 동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한국 입장에서 ‘나쁜 놈’들은 철저히 골라내 완전히 씨를 말리고, 말 잘 듣는 ‘착한 놈’과 적당히 이득을 취하며 빌붙는 ‘이상한 놈’들은 시간과 공을 들여 한국인으로 동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그랬다.

김자점이 세 번째 방법, 이합집산과 이이제이를 선택한 것은 불가피했다. 

‘후후, 나도 처음엔 이합집산과 이이제이로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려 했었다.’

그러나 국왕의 칙령 공포로 판이 완전히 뒤집혔다.

-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단군왕검의 자손이며 고조선부터 이어온 한민족의 한 갈래이다.

‘이제 북아메리카 통합의 대의는 굳건하다. 또 국왕폐하의 진의도 명백하게 드러났어.’ 

북아메리카 통합의 대의! 그리고 국왕폐하의 진의!

그가 보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북아메리카 통합의 대의였지만, 가장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은 국왕폐하의 진의였다.

순간 김자점의 눈이 반짝였다.

‘내 생각과 달리 폐하께서는 진시황이나 항우 같은 패왕(霸王)이 아니셨군. 물론 단군왕검의 같은 자손이란 말은 판을 뒤엎기 위한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북아메리카 통합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폐하의 판단이 지극히 옳다. 나는 신하로써 폐하의 명을 그대로 따르면 될 뿐. 나의 잘잘못은 오직 폐하와 후세가 판단할 일이다.’

나머지는 그가 보기엔 하품이 날 정도로 단순한 일이었다. 

그건 딱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면 아주 간단했다.

먼저 적대관계였다.

‘침략과 식민통치의 원죄는 모두 영국과 유럽에 있다. 잘못은 영국과 유럽에 뒤집어씌우고, 우리는 인디언의 동족이자 해방자로 줄기차게 주장하면 그만이야. 백년이든 천년이든 나중에 진실이 드러난다고? 흐흐흐, 그때는 모두 한국인이 되어있을 테니 아무 상관없지.’

그 다음은 이해관계였다.

‘북아메리카 서부도 그랬지만, 동부의 알력도 마찬가지다. 토지 등 재산권부터 시작해서 생활양식, 인종과 제도, 문화에 이르기까지 아주 복잡한 문제야. 하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인디언 토지문제가 해결되면... 나머지는 그저 시간이 걸릴 뿐,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김자점의 고심은 끝이 없었다.

‘과연 폐하께서 나의 책략을 받아들이실까?’

잠시 후,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기대하진 말자. 인디언 토지반환문제야 어렵사리 허락하시겠지만 담배 문제는 인디언의 역린이니... 하지만 두 개의 선결조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오페칸카누를 밖으로 끌어내 처단하거나 설득할 자신이 없다.’

그의 책상 위엔 밤새 작성한 국왕에게 올릴 보고서가 있었다.

[동부지역 인디언 토지반환 및 담배사업 재개에 관한 보고서]

(전략)

2. 버지니아 등 동부 담배사업 재개의 필요성

가. 아메리카 담배 생산현황

나. 유럽 개황(槪況)

다. 동부의 담배사업 적합성

라. 버지니아 담배의 품종 및 생산성

(후략)

‘혹시 폐하께서 너무 무르게 대응하신다면 자칫 실기할 수도...’

보고를 앞둔 시점임에도 김자점의 고심은 더욱 깊어졌다.

...

그날 오후, 국왕의 집무실.

“인디언이 키운 담배로 유럽을 정복한다? 으하하핫!”

나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웃는 나의 모습에, 김자점 등 삼총사는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거의 5분 가까이 배가 당겨 아플 정도로 웃고 나서야, 눈물과 함께 웃음을 그칠 수 있었다.

설마 김자점과 내 생각이 비슷하다니! 나로서는 정말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다만 김자점과 나의 접근방식은 달랐다.

최근 나의 고심은 두 가지.

하나는 영국이 빼앗았던 북아메리카 동부 인디언 토지반환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버지니아 특산물인 대규모 담배산업의 활성화문제였다.

우선 토지문제...

김자점은 북아메리카 통합의 대의도 고려했지만 기본적으로 음모와 이간계의 선결조건으로 접근했다.

반면 나는 대의에 충실하게 해석해서 한 핏줄인 인디언이 영국에게 빼앗긴 토지를 반환하고, 수도건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토지의 반환이 어려우면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자 했다.

그 다음 담배문제...

김자점은 담배가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된다는 것도 고려했지만 오페칸카누를 자극하고 오페칸카누를 따르는 핵심추종세력들을 피아식별 하듯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내가 [한국-아메리카 항해조례]를 통해 은과 담배, 설탕과 직물 등을 수출통제품목에 넣은 것은 유럽경제를 옥죌 뿐만 아니라 한국과 아메리카의 국부(國富)를 신장시키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솔직히 내가 북아메리카 통합의 대의에 충실하게 동부의 인디언 토지를 반환한다고 결정했지만, 이것조차도 대규모 담배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전제조건이 토지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과거에 런던 버지니아 회사가 돈을 쓸어 담은 것도 포카혼타스의 남편인 영국인 존 롤프가 재배한 버지니아 담배 덕분이었고, 인디언 땅과 노동력의 강제적 수탈로 가능했었다.

이처럼 버지니아 담배문제는 과거의 인디언 식민역사와 현재의 증오심, 또 미래의 경제적 국부가 교차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버지니아 담배로 인한 수탈기간은 불과 몇 년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의 고민은 당연했다.

‘우선 토지반환으로 인디언들의 경계와 증오를 크게 누그러뜨릴 수 있겠지만... 버지니아 담배문제만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부의 신장과 인디언들의 소득수준을 높이기 위해, 국가적인 대규모 담배산업육성은 불가피하다.’ 

조만간 향신료 무역에 버금가게 될 정도로 커질 담배산업육성에 대한 나의 결심은 이미 섰지만 동부 인디언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삼총사가 머리를 맞댄 끝에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어설픈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쟁이든 뭐든 대의와 구호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 인디언 담배로 유럽을 정복하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자!

물론 김자점의 지분이 가장 높았지만 개노미와 송시열도 한몫 단단히 했다.

탁.

나는 웃음을 거두고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담배의 유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송시열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 폐하! 인디언에게는 과거 수백 년 전부터 평화의 상징이자 천사의 선물이라 불렸고, 현재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가호이자 만병통치의 약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당도했을 때 인디언들이 담배를 권한 것은 평화를 위해서였습니다. 유럽에 전파된 이후로 만병통치약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다. 인디언에게 담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지. 아메리카는 물론이고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모두에게... 그런데 지금은 일부 부유한 유럽인의 흡연용 기호품, 또 일부에겐 만병통치약이자 의료용 의약품이 되었다. 혹시 스페인 제일의 부호가 누구인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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