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225)

박연 사령관의 보고는 정말 의외였다.

이제는 사라진 누에바에스파냐와 페루 부왕령의 스페인 군인들과 크리욜(스페인어: Criollo,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 자손. 보통 백인을 뜻함. 현재는 백인-인디오 혼혈인으로 크게 확대됨) 등 거의 대부분이 아메리카에 그대로 남았다는 보고였다.

즉, 과거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해당하는 멕시코 부족회의와 과거 페루 부왕령에 해당하는 아메리카 연합회의가 스페인 군인들과 크리욜을 자국 국민으로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네 폐하! 먼저 멕시코 부족회의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연합회의에서도 반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저 역시 크리욜들은 그대로 남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군인들은 의외였습니다. 그래서 당사자인 스페인 군인들에게 그들의 자유의사를 여러 차례 확인하고 고심 끝에 허락했습니다.”

나는 묵묵히 박연 사령관의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박연 사령관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스페인 군인들 대부분은 본국인 스페인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고, 그들이 일군 재산이라곤 아메리카의 광산 지분이나 농장뿐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패잔병으로 스페인으로 돌아가면 모든 재산을 잃고 다시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었던 로드리고 백작과 함께 아메리카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잔류를 간청했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음, 멕시코 부족회의와 아메리카 연합회의 입장에서도 불가피한 결정이었군. 행정 등 통치공백과 국정혼란을 막기 위해선 옳은 결단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멕시코를 필두로 아메리카 연합국 대부분은 스페인 식민통치로 과거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의 통치체계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현재는 스페인의 행정 등 통치체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한 스페인 식민통치는 하급귀족이자 군인 출신인 부왕을 정점으로 한 군정(軍政, 군대가 행하는 행정체계)이었다. 따라서 스페인 군인들이 평상시에는 행정 관료로, 전시에는 군인으로 나섰다.

나는 대항해시대의 유럽 식민통치가 명백한 군정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영국 등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은 상인이라기보다는 사설군대였고, 그들의 식민통치도 스페인의 군정을 그대로 본 딴 것이었다.

박연 사령관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 멕시코 부족회의와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한국의 통치체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과도기인 현재로서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 스페인의 과거 식민통치체계를 일정부분 계승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또한 현재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물론 폐하께서 내린 명대로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국제어이자 공용어로 한국어를 사용하기로 의결했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메리카의 국제어와 공용어는 한국어로 될 것입니다.”

“...”

“...”

그 외에 집단안전보장과 자유무역 등에 관한 여러 협정은 아메리카 독립의 대의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의결되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면담을 마치려 했다.

그러나 박연 사령관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폐하! 송구하오나 오늘 제출한 보고서 말미에 첨부된 특이사항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스페인의 세력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서 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에 불순한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략선들이고 불시에 나타나 해안 마을을 약탈한 후 곧장 사라집니다. 하지만 일부 사략선은 아예 자리를 잡고 마을 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그 자리에서 담배농장을 경영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최근 아메리카 담배수출을 완전독점하기로 의결했으니 더욱 창궐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유럽 사략선을 쫓아낼 방법이 없어 우리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공식요청한 상황입니다.”

탁.

나는 즉시 보고서를 펼쳐 해당 사항을 살폈다.

그것은 대항해시대 사략선의 일반적인 경제활동(?)이자 내가 유럽경제를 옥죄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나비효과였다.

대항해시대엔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국가에서 공인된 대규모 식민회사와 사략선이 있는 반면, 개별적으로 떨어져 나와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사략선주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거기에 나의 유럽경제 옥죄기가 결정타를 날린 셈이었다.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은(銀)은 물론이고 담배 등 아메리카 특산물들을 독점으로 묶어 유럽의 국부를 끌어와야 하니까. 한국의 동맹국에게는 달콤한 과실을, 한국의 잠재적 적국들은 국부를 키울 수 없도록 강제해야 한다. 특히 유럽과 명은...’

나는 아메리카를 한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경제로 묶고, 당분간 아메리카 경제는 한국의 주도 하에 유럽과 상대하도록 했다.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아직 유럽의 경제에 독자적으로 대항할 수 없기에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첫 번째 신호탄은 은과 담배의 수출통제였고, 그 다음에는 운송수단인 선박의 국적제한이었다.

‘유럽도 한국과 아메리카 항해조례의 쓴 맛을 좀 봐야지.’

최근 공포된 [한국-아메리카 항해조례]는 다음과 같았다.

[1] 오직 한국과 아메리카 연합회의 국적의 배만 아메리카 상품을 선적할 수 있다.

[2] 또한 국적 기준으로 한국과 아메리카 선원이 최소한 절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3] 은과 담배, 설탕과 직물 등 수출제한품목으로 열거된 상품들은 오직 한국을 통해서만 다른 대륙에 팔 수 있다.

[4] 아메리카로 향하는 다른 대륙의 모든 상품은 한국을 거쳐야 하며 수입관세를 내야 한다.

[5] 위의 사항은 한국과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결의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대륙 사이의 무역에 적용된다. 다만 다른 대륙일지라도 한국과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대의를 인정하는 동맹국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

이처럼 항해조례의 근본취지는 아메리카의 부가 유럽에만 일방적으로 이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국과 아메리카의 국부가 유럽에 비견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아메리카 무역장벽과 독점경제는 필수다.’

물론 나는 항해조례의 부작용, 아니 반작용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은 유럽의 종교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문에 눈 돌릴 틈이 없겠지만, 모든 전쟁이 끝나면 유럽의 통화부족과 함께 담배와 설탕 등 기호품의 가격 급등으로 유럽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최악은 유럽 전체와의 전쟁이겠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은 시대를 막론하고 현명한 외교정책이었다.

‘10년 후쯤이면 유럽 누구와 붙어도 상관없다. 영국 등 몇몇 유럽 국가들은 우리와 동맹이 되어 한국과 아메리카의 이익을 공유할 것이고 그들이 먼저 나서서 유럽의 결집을 방해할 것이니까...’ 

오히려 지금은 유럽의 소규모 사략선들, 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의 안전이 시급한 문제였다.

나는 결심했다.

“아메리카의 집단안전보장은 우리 한국이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맹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또한 한국-아메리카 항해조례의 순조로운 정착을 위해서도 선결되어야 할 문제다. 그대는 내각에 이를 보고하고 국방부장과 함께 대책을 마련하라!”

“네, 폐하!” 

...

같은 시각, 한고립의 집.

“후우...”

실로 지독한 고통에 찬 숨이었고 뒤늦게 온몸이 떨렸다.

부들부들. 

한고립은 내심 탄식했다.

‘팔 하나 잃은 것이 이렇게 클 줄이야! 아니면 너무 오래 쉰 탓일까?’ 

이래서야 한사람 몫은커녕 걸림돌이 될 지경이었다. 그때 휑한 바람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비웃는 듯했다.

순간 그의 입이 힘껏 비틀렸다. 그리고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다시 기합을 내질렀다. 

“이얏!”

그러나 악문 잇새로 ‘끄응’하고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또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

곧이어 그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투박한 검갑을 집어 들었다.

‘스릉!’하는 낮은 울림과 함께 매끈한 칼날이 드러났다. 그곳엔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비춰졌다.

한고립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잠시 후.

덜컥.

송준길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놀리듯 말했다.

“하하, 한 형! 아메리카 연합군 개선식도 참석하지 않고 뭐했습니까? 한 형 좋아하는 행사음식도 잔뜩 나왔는데 한 형답지 않게... 아니 한 형?”

툭.

송준길은 깜짝 놀라서 행사음식꾸러미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고립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흠뻑 흘러내린 땀과 지저분한 옷까지... 과거 서부전쟁의 악전고투를 겪은 상황과 다름없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감히 누가 한 형을...”

그러나 한고립은 송준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칼을 들어 굳은 재활의지를 내비췄다.

“이얏!”

조선의 호랑이 한고립은 다시 구슬땀을 흘렸고 송준길은 그 모습에 감격해 몰래 눈시울을 적셨다.

...

다음 날, 내각 대회의실.

“폐하! 흥청(興廳)은 망청(亡廳)입니다. 한국과 조선의 그 누구도,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유래를 모르는 자는 없사옵니다. 부디 연산군의 전례를 기억하소서.”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흥청(興淸)은 연산군이 전국의 기생 중에서 엄선한, 미모가 출중한 기생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사실 한자의 뜻 자체로는 ‘맑음을 일으킨다!’는 아주 좋은 의미였다.

- 과인은 흥청(興淸)과 함께 나쁜 기운을 씻어 없애겠다.

연산군은 국정을 뒷전으로 하고 흥청의 기생들과 어울려 놀면서 마음속에 쌓인 나쁜 기운을 씻어낼 수 있는 좋은 제도라고 강변했다. 

이런 사치와 향락 때문에 결국 백성들이 ‘이렇게 흥청거리다 나라가 망하겠다.’고 탄식했는데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쯧쯧, 작명센스가 이래서야...’

사실 각료들의 걱정에는 그저 흥청이란 이름에만 있지 않았다.

누가 조선 사대부출신이 아니랄까봐 국민의 사치와 향락을 경계하고, 혹시 그것이 국왕인 나에게도 번지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었다.

이처럼 각료들의 걱정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화부 신규설립을 결정했다.

“짐이 보기에 ‘국민을 통합하고 문화를 일으킨다!’는 설립 취지는 아주 훌륭합니다. 흥청은 단순한 작명의 실수일 뿐이니 설립 취지대로 ‘문화부’라고 합시다. 더 이상 이견은 받지 않겠습니다.”

웅성웅성.

나는 흥청문제를 적당한 웃음거리로 넘기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의 동족이자 한 핏줄이니 마땅히 한국인입니다. 특임각료인 김희두(개노미), 김자점, 송시열의 보고에 따르면 춘궁기에 대한 대비가 절실하다고 합니다. 상무부장?”

나의 호명을 받은 상무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춘궁기에 대한 대책을 적극 시행중입니다. 특임각료들과 협의하여 카누 제작, 인디언 마을 진입로 등 자잘한 건설공사를 긴급 발주했습니다. 물론 대금으로는 식량과 대구, 연어 등 건어물을 선불로 전액 지급했습니다.”

상무부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감자는 벌써 몇몇 인디언 마을들이 가져다 심었습니다. 씨감자를 나눠주면서 재배방법도 상세히 알려줬고, 실제 감자요리를 먹어보도록 했더니 반응도 좋았습니다. 또 후추 등 향신료와 치즈, 설탕 등도 조금씩 전달해주고, 모피 등 인디언이 가진 물품들과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한국의 건설공사나 각종 사업에 참가하면 정당한 급료를 지급할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선 공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인디언들은 거지가 아니라 우리와 동족입니다. 그렇기에 인디언과 우리는 같은 핏줄이며, 서로 이익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신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신뢰는 작은 것부터 차곡차곡 쌓아야 하니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북아메리카 전역이 사통팔달하는 것에는 앞으로도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릴 겁니다. 가장 먼저 수도 주변과 동부지역부터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

늦은 오후, 수도 어느 관청.

“자네는 참 운이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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