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25)

“네 폐하! 얼마 전에 귀국했고, 지금 제임스 제너와 함께 천연두 예방접종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예산확보가 끝났으니 천연두 예방접종에 거부감이 없는 위그노와 영국계 순으로 접종할 계획입니다. 인디언은 나중이고요. 의사 숫자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아주 좋아! 그럼 이만 돌아가게.”

김세연은 날아갈 듯 내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나는 피식 웃고는 천연두 예방접종에 대해 생각했다.

김세준과 제임스 제너는 최초로 우두법을 발견한 의사들이었다. 호주의 양털깎기 경연대회에 참석했다가 소젖 짜는 아낙네들의 대화를 듣고 우연히 발견했었다. 

지금은 한국인 누구나 천연두 예방접종을 받는다. 속칭 ‘마마’라고 불렸던 무서운 전염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또한 나는 과거 조선의 사례들을 떠올렸다.

- 호환, 마마, 보릿고개...

- 총포갑사, 천연두 예방접종, 식량증산과 곡물수입자유화...

옛 조선 백성들은 호환, 마마, 보릿고개에 신음했었다. 마치 숙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모두 해결했으니까... 

총포갑사로 야생동물로부터 안전을 확보했고, 천연두 예방접종으로 마마를 몰아냈으며, 식량증산과 곡물수입자유화로 보릿고개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북아메리카도 '옛 조선'과 다르지 않았다.

호환은 아니지만 곰이나 야생의 위험한 동물들이 있었고, 유럽인과 한국인의 진출로 천연두가 전파되었으며, 어느 인디언 부족이나 마찬가지로 봄에는 항상 식량이 부족했다.

특히 보릿고개... 춘궁기(春窮期)는 세계 어느 곳이나 똑같았다. 봄은 인간에게 잔인한 계절이었다.

‘세계 어느 곳이나... 인간의 삶은 결코 다르지 않군.’

솔직히 국왕인 나의 인기는 조선, 호주, 북아메리카 등 넓은 영토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칭송받은 것은 ‘안전한 삶, 건강한 삶, 배부른 삶’을 의미하는 ‘총포갑사, 천연두 예방접종, 보릿고개 해결’등으로...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3대 애민(愛民)정책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모두 내가, 조선에서 성공한 정책들이다. 북아메리카도 조선과 다르지 않아. 조선에서 성공했던 정책은 북아메리카에서도 반드시 통한다. 다만 인디언들에게는 좀 더 신중하게 다가서야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쾅!

“개노미, 김자점, 송시열... 런던공사 신준묵까지. 두고 보자!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이었는데? 너희들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해야 할 거다. 흥, 황희가 대수냐? 내 사전에 너희들 정년퇴직은 없다.”

나는 굳게 다짐했다.

...

같은 시각, 수도 어느 관청.

“나는 이번 일을 끝내고 사직한 다음, 아내와 함께 해안가 경치 좋은 곳에서 편히 지내고 싶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내 처남이 천연두를 정복한 유명한 의사니까, 그 밑에서 허드렛일이라도 도우면 어찌어찌 되겠지. 하하, 내 꿈이 너무 소박한가? 난 은퇴한 이후의 편안한 삶이... 에, 에취!”

개노미는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심지어 머리끝이 쭈뼛하게 서며 오한까지 들었다.

“에취!”

그는 연신 재채기를 하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찻잔에 뜨거운 커피를 가득 채웠다.

쪼르륵.

그렇게 몇 차례 커피를 마신 연후에야 간신히 재채기가 멎었다.

개노미가 투덜거렸다.

“제기랄! 누가 내 욕을 하나보군.”

김자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자네만 사직하면 조정은 온통 내 세상이겠군. 아니 그런가?”

“흐흐, 김자점 이 원수 같은 인간! 그게 될 성 싶은가? 수상각하는 물론이고 런던공사가 우스워 보여? 하다못해 송시열도 자네보단 나을 걸. 그래, 자네는 딱 삼류구먼... 수상각하와 런던공사가 일류, 송시열이 이류, 자네와 내가 삼류겠어.”

김자점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뭐, 삼류? 이 김자점이? 그건 어림도 없어. 두고 봐! 자네가 편히 은퇴하지 못하게 내가 물고 늘어질 테니.”

“허허, 이 인간이? 아주 악담을 퍼 부어라! 혹시 방금 욕한 게 자네였어?”

친한 친구 사이의 정담이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다 슬쩍 미소 지었다. 

며칠 전, 둘은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오랜 친구처럼 지내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이뤘다. 사실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이미 친구였다.

그때, 송시열이 들어왔다.

“어서 오게.”

두 사람이 반갑게 맞았지만 송시열은 무척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해요.”

김자점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잘 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대체 뭐가 문젠가?”

개노미도 달리 묻지는 않았지만 눈 크게 뜨고 대답을 기다렸다. 

송시열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인디언들은 대개 선하며 감정이 아주 풍부합니다. 또 자연을 숭배하고 거기에 동화되는 것을 옳게 여깁니다. 예컨대 전사에게 늑대의 영혼이 깃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최고의 찬사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중요한 의식이나 행사에 앞서, 마을에서 춤과 노래를 부르며 희로애락을 함께 합니다. 게다가 춤과 노래를 통해 그들의 모든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인디언들을 한국인으로 만들려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서부에서 보았던 것과 동부에서 지금 본 것은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우리의 춤, 노래가 인디언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대신 그들의 춤과 노래에선 자연에 대한 숭배, 신성함과 영적인 부분이 좀 더 도드라지더군요. 그걸 감안해서 인디언의 심금을 울리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한국인과 인디언의 민족적 정서를 한데 아우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춤과 노래가 첫 시작이고 그 다음은 서사시 등 역사와 문학입니다.”

김자점과 개노미,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음, 그건 좀 나중에 해도 될 거 같은데?”

뒤로 미루자는 김자점의 말에 송시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그 누구보다 자연과 영혼, 또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밥과 재물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북아메리카의 진정한 통합은 영원히 늦춰지게 됩니다. 이건 무조건입니다. 춤과 노래로 시작해서, 역사와 문학, 공연까지... 우리의 모든 문화 역량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인디언 전통설화인 ‘착한 곰 여인’을 연극으로 만들어 인디언 전통 춤과 노래를 곁들여서 공연하는 겁니다. 또 우리한테 익숙하게 각색하는 것도 좋습니다.”

송시열의 열변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듣기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때 송시열이 몇 마디를 보탰다.

“제가 생각한 북아메리카 통합의 연결고리는 바로 문화입니다! 우리가 고조선부터 이어온 수천 년의 시간은 혈연을 비롯해 역사적·지역적 동질성으로 연결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홍익인간 등 이념적·문화적 동질성으로 서로 끌리는 점이라 판단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한 연결고리! 북아메리카 통합의 핵심 전제조건입니다.”

두 사람 역시 송시열의 주장에 강한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개노미가 그 대책을 물었다.

“그럼 우리가 어찌해야 하나?”

송시열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기쁠 흥(興), 관청 청(廳)... 바로 흥청(興廳)을 세우는 겁니다. 한국인과 인디언의 가교 역할을 할 가장 중요한 관청입니다.”

두 사람은 홀린 듯 이구동성으로 되뇌었다.

“흥청, 흥청이라!”

송시열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흥청’이란 단어의 역사적인 유래, 또 그에 따른 부정적 인식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한자 단어 하나는 의미가 달랐지만, 붙여서 불러보면 그게 그거였다.

그것은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나쁜 놈

1631년 3월 15일, 북아메리카 수도.

수도 광장.

척척.

와아아.

무려 1년 만의 개선이었다. 수도 광장에선 아메리카 연합군의 장엄한 개선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인아! 저기 제일 잘생기고 늠름한 분이 우리 정인이 아빠란다.”

언년이는 딸의 조막만한 손을 잡아 개선행진대열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개선군의 최선두에는 박연 사령관과 친위대 척탄병들이 줄지어 섰고 거기엔 척탄중대장인 이대길이 또렷이 보였으니까.

그의 늠름한 모습에 언년이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남편 이대길의 무사귀환은 정말 꿈만 같았다. 대길이 종종 편지를 보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쉬이 믿기지 않았었다.

- 여보, 나의 언년이! 몰락한 양반가의 철부지로 태어나 매번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내게는 당신을 호강시켜줄 수만 마지기 땅이나 금송아지는 없어. 하지만 당신을 호강시켜주겠다는 나의 다짐만은, 저 하늘에 두고 맹세컨대 사실이야. 여보, 나의 언년이! 그때 당신이 내게 말했었지.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 말에 난 홀린 듯이 당신의 손을 잡았고, 또 평생을 함께 하기로 굳게 약속했었지... 하하! 어쨌든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은 아들이라면 ‘정국’, 딸이라면 ‘정인’으로 하면 좋겠군. 내가 귀환해서 다시 만날 때, 어찌 지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해 봅시다! 곧 리마에서 큰 전투가 있을 것이니 당분간 소식을 전하지는 못할 거야.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언년이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이대길의 멋진 행진을 두 눈 가득히 담았다.

‘여보! 당신의 딸, 정인이도 함께 보고 있답니다.’

잠시 후.

“여보!”

개선식이 끝나고 군중 속에서 뾰족한 외침이 들렸다. 너무나 익숙한 소리, 이대길의 귀는 곧바로 반응했다.

“언년이?”

순간 군중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가 이대길에게 달려들었다. 

그림자는 그의 허리께를 한 쪽 팔로 와락 끌어안고는 매달렸다. 다른 팔로는 아이를 껴안고서... 곧 그가 조심스레 아이를 이어 받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 바라보고, 또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울고 웃을 뿐이었다.

와락.

드디어 세 사람이 북아메리카에서 하나가 되었다. 

짝짝!

와아아!

군중은 물론이고 척탄중대원들까지 크게 박수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중엔 눈물을 훔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

해질녘, 국왕의 집무실.

“그게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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