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6/225)

다시 한기가 몰아쳤다. 오페칸카누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그에 상대는 머뭇거리다 힘겹게 말했다.

“족장!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쇼니족은 작은 부족이고, 위그노 정착촌들 사이에 끼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으니까요. 또 한국의 수도가 가까워 그저 숨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 국왕의 칙령이 반가울 정도니 말 다했습니다.”

이제 보니 상대는 쇼니족 족장이었다.

오페칸카누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미안하네.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어. 그나저나 쇼니족의 안위가 걱정이군 그래... 혹시 그들이 쇼니족의 땅을 넘보거나 하는 일은 없나?”

쇼니족 족장도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분명 예전엔 위그노 정착촌과 자잘한 충돌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왕의 칙령이 내려진 다음부터는 아주 조용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순 없지만요.”

“그 외에 다른 건?”

쇼니족 족장은 잠시 고심하다 말했다.

“며칠 전, 한국인들이 찾아와 카누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크기와 종류가 다양하고 숫자도 꽤 됩니다. 아무래도 봄이라서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식량과 대구, 연어 등으로 대금을 치르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대금은 먼저 받았고, 카누 제작에 필요한 재료도 일부는 그들이 제공해줬습니다. 이제야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페칸카누는 지그시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쇼니족 족장이 떠나고 혼자된 그의 눈이 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디언 부족연합의 대족장이자 철혈의 사나이 오페칸카누의 눈에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보게 친구! 어찌 나 혼자 두고 덧없이 떠났는가? 나는 너무 외롭다네. 자네와 함께 영국 놈들을 쳐부수고 아버지의 땅을 누비던 때가 그리워... 그리워 미칠 것 같네. 하지만 곧 자네를 볼 수 있겠어. 한국은 영국을 능가하는 교활한 놈들... 쇼니족을 대하는 한국 놈들의 간계를 보니 더 이상 희망이 없군. 이보게 친구! 아쉽지만 내 마지막 발걸음은 ‘산 자’의 것이 아닐 것이네. 어차피 아버지의 땅을 지키지도, 되찾지도 못한 못난 놈이니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도 사치 아니겠나? 하하하! 부디 하늘에서 지켜봐주게...”

등잔 밑이 어둡다

1631년 3월 13일, 제임스타운.

전(前) 버지니아 총독부.

“곧 런던에서 공식문서가 도착할 것이다. 공식문서를 접수하고 잔류할 영국시민들의 기득권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도 본국으로 귀환한다. 아마 연말쯤이면 모두 끝나겠지. 참! 최혜국대우와 관련된 무역협정 문제도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돼! 우리의 돈줄이니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전(前) 버지니아 총독 로크 남작은 엄하게 명령했다. 

지난 3년 전, 영국의 왕령식민지인 버지니아에 총독으로 부임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국 버지니아 총독이 아니었다. 

바로 작년, 영국 찰스1세가 한국의 재정지원 1천만 파운드의 대가로 버지니아는 물론이고 북아메리카 동부 전역의 세금징수권을 완전히 포기한 까닭이었다. 다시 말해, 1627년 런던조약 체결 당시 영국이 심어둔 독소조항인 세금징수권이 완전히 철회되었고, 이후부터는 영국의 북아메리카 동부지역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얼마 전, 1627년 런던조약의 최종개정작업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로크 남작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최종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당연히 그의 수하들부터 엄히 단속하는 것이 순리였다. 비록 하급귀족이지만 귀족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그였으니까.

로크 남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엔 수하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말투였다.

“그동안 너희들이 고생한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번 협상이 잘 마무리되면, 너희들도 두둑하게 한 몫 챙겨서 본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라!”

“네 알겠습니다!”

수하들은 애써 힘차게 대답했다.

잠시 후.

로크 남작이 떠나고 수하들만 남았다. 그 중 체구가 장대한 사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씨* 짜증나는군! 두둑하게 한 몫은 제길... 그까짓 푼돈 안줘도 되니까 그냥 잔류하게 해주면 좋겠네.” 

“후우, 나도 그래.”

수하들은 체구가 장대한 사내의 말에 대부분 공감하는 눈치였다. 체구가 장대한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참! 너희들 한국이 아메리카 담배수출을 전면독점체제로 전환하고 있는 거 알지? 최근 아메리카 연합회의에서 공식결정이 떨어졌다고 하더군. 멕시코와 서부의 ‘코요테담배(일명 씹는담배)’는 이미 독점에 착수했고, ‘버지니아 담배(피우는 담배)’는 아직 독점 전이야. 올해까지 바짝 벌어서 나가야겠어. 독점으로 담배가격도 치솟을 테니 거하게 챙길 수 있겠지.”

다른 수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젠장! 이렇게 꿀을 빨다가 런던으로 가면 어떻게 하냐?”

“나도 그래! 런던에서는 시궁창인생이었지만 여기선 왕이나 다름없잖아?”

“야! 그냥 몰래몰래 담배농장 운영하면 안 될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놈들이 아시아에서 대농장 운영하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 담배농장도 네덜란드 놈들 하는 방식, 똑같이 따라하는 거잖아.”

그때 체구가 장대한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렵겠어. 아시아는 한국 영토가 아니지만 북아메리카는 한국 영토잖아. 너희들 한국 기동함대가 눈에 불을 켜고 동부 전역을 순찰하는 거 잊었냐? 한국이 노예제 반대하는 것도 잊었냐고? 동부에서 담배농장을 운영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들키게 된다. 그냥 이번을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하고 담배농장은 정리하는 것이 맞다. 괜히 걸려서 죽는 것보단 낫다는 거야.”

그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참! 얼마 전에 호아탄이 서부 인디언한테 코요테담배 재배방법을 알아냈다고 했어. 괜히 동부에서 가슴 졸이며 지내느니 그동안 모은 밑천으로 코요테담배를 키우기 적당한 곳을 찾는 게 좋겠어. 멕시코든 어디든...”

다른 수하도 동의했다.

“그래, 네가 우리 대장 아니냐? 우리야 네 말에 따라야지... 그런데 멕시코는 좀 어렵지 않을까?”

“나도 동의! 그리고 멕시코는 역시 어려울 거 같아. 멕시코나 서부와 기후가 비슷한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아.”

체구가 장대한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장기과제니까 새로운 담배농장 후보지는 좀 더 생각해 보자고. 참, 호아탄한테 줄 총과 탄약은 망가지기 직전인 최하품으로 주는 거 잊지 마! 올해 담배농사가 마지막이니 대금지급은 가능한 늦가을까지 미루고 말이야. 또 담배농장은 그때 완전히 정리하도록 하고, 수틀리면 호아탄도 입막음해야겠지.”

“하하, 옳은 말이야!”

로크 남작의 수하들은 비릿하게 웃으며 은밀한 대화를 마쳤다.

...

같은 시각, 코노이족의 마을.

족장의 비밀막사.

“흐흐흐, 이제 200정만 더 받으면 1차 목표가 끝난다.”

코노이족의 젊은 족장 호아탄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어루만지듯 소중하게 영국제 총과 탄약을 쓰다듬었다.

그는 과거, 제임스타운의 대학살을 떠올렸다. 

1622년 제임스타운 대학살은 오페칸카누와 그의 아버지가 주축이 되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해 일어난 동부 인디언 연합부족의 일대쾌거였다. 

당시 호아탄은 코노이족의 젊은 전사로, 족장인 아버지와 직접 참전했었다.

첫 전투는 대승이었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제임스타운의 영국인들은 혼비백산했고, 반면 인디언들은 엄청난 전과를 올렸으니까. 

그런데 승리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영국인이 보유한 무기, 바로 총과 탄약이었다.

결국 영국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하자 인디언 부족연합은 아버지의 땅에서 쫓겨 내륙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치욕적인 패전!

젊은 전사, 호아탄은 극심한 좌절감에 방황했었다. 그리고 그 자괴감에 견딜 수 없었다.

그 후로...

‘나에게 총과 탄약이 있었다면! 또 영국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라도 있었다면!’

그의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좌절감, 자괴감은 깊은 상실감으로 옮겨갔고 또 다른 욕심을 낳았다. 그 결과 그의 눈에는 오페칸카누와 그의 아버지가 아주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싸워왔으면서 총이나 탄약, 말조차도 얻지 못했으니까.

젊은 호아탄은 족장인 아버지에게 반발했었다.

- 아버지! 영국을 이기려면 우리에게도 총과 탄약이 필요합니다. 그들과 협력하는 척 하면서 총과 탄약을 얻고, 그들의 무기를 이용해 쫓아내는 겁니다.

- 아들아, 그건 안 될 말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의 말씀처럼...

- 그런 말씀은 그만하시죠! 이젠 식상하다 못해 지긋지긋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총이 필요합니다.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적들을 몰아내자는 겁니다. 아버지! 격언은 이제 지겹습니다.

- 아들아! 내가 죽으면 네가 족장이다. 그땐 네 마음대로 해라. 내가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기 전까지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

- 에잇...

실의에 빠진 호아탄은 그때부터 막 나갔다. 족장인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기도 여러 차례였다.

그런데...

1627년 말, 버지니아 총독의 수하인 어떤 영국인을 만나면서부터 새로운 야망에 불타올랐다. 호아탄은 그와 의기투합한 후, 아버지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코노이족의 새로운 족장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영국인들과 함께 다른 인디언 부족을 습격해서 담배농장의 노예를 공급하기도 했다. 물론 들키지 않도록 항상 복면을 하고, 아주 작은 부족마을만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호아탄은 다시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제가 당신을 계승한 이후로 코노이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강해졌습니다. 곧 코노이 전사 5백 명을 무장시킬 총과 탄약이 완비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국을 물리칠 순 없겠지요. 한국은 영국을 크게 능가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동부 인디언 중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 하나를 일구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아버지, 제가 당신의 오랜 친구 오페칸카누를 무릎 꿇리고 새로운 인디언 부족연합의 대족장이 되면 어떻습니까? 당신께서 어이없게 양보했던 대족장 자리를 아들이 차지하는 것이지요! 크하핫!’

순간 빛에 드러난 그는, 광인(狂人) 그 자체였다.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삼총사가 올린 정책보고서는 분명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아니 이것들이, 또 돈인가? 이거 런던공사하고 똑같이 돈 먹는 하마로군!’

나는 차마 화 낼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한 최상의 방향일 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과거 유능한 국왕비서였고, 지금은 개노미의 아내인 김세연까지 있었으니까. 그녀는 삼총사의 연락담당관으로 함께 일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흐흐, 수고했어. 아주 훌륭하군.”

“킥!”

역시 김세연이었다. 

그녀는 나의 비서로 무려 3년 넘게 일했고, 그런 이유로 내 표정변화에 익숙했다. 그녀는 건국과정에서 재정부족에 힘겨워하던, 또 돈에 민감한 나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감히, 국왕 앞에서 ‘킥!’하고 웃은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최대한 숨죽여 참다가 어쩔 수 없이 터진 것이겠지만.

나는 짐짓 표정을 굳히고, 또 일부러 크게 말했다.

“크흠, 개노미에게 전하라! 창고를 비웠으면 반드시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고 말이다. 김비서, 알겠나?”

“네 폐하, 알겠습니다.”

허나 김세연은 더욱 웃는 낯이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내가 ‘개노미’, ‘김비서’라고 부른 건...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그때, 집무실을 떠나려는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참! 김세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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