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사내가 담배농장을 떠났다. 그러나 두 눈을 시퍼렇게 뜬 감시자들이 외곽을 삼엄하게 감시했다.
그들이 쉬이 탈출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인디언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제법 들어보였고, 또 지독하게 체념한 표정이었다. 간혹 원망과 분노의 빛이 보였으나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때,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위로하듯 말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가 말했네. 우리가 살고 있는 토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이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라고... 우리 아이들의 선택이 그렇다면 어쩌겠나? 안타깝지만 그대로 따라야겠지.”
그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또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께 들었다. 어차피 죽으면 바람결에 실려 떠나고 결국 까마귀밥이 되는 법. 우리의 내세는 걱정하지 말게. 나는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어.”
바람과 까마귀,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
인디언에겐 진한 슬픔이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이내 그들 중 일부가 절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은 풍장(風葬).
시체를 광야에 내버려두어 비바람에 쐬도록 하고, 자연스레 없어지게 하는 장법이었다. 기묘하게도 퉁구스족 계열의 부족들, 예컨대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들도 같은 방식의 풍장을 따랐다.
갑작스런 죽음엔 자식들이 시체를 옮겨 풍장을 치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죽음을 직감하면 모든 짐을 버리고 홀로 광야에 나섰다.
그것이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몇 년 전까지 부족장이었던 그의 말은 곧 다가올 죽음을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아직 ‘산 자’들은 묵묵히 일하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오페칸카누 부족 마을.
마을의 가장 큰 티피(Tepee, 원추형 천막) 안에서는 은밀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인디언 부족연합의 족장인 오페칸카누는 기가 막혔다.
“뭐? 이놈들이 미쳤구나!”
코노이족의 젊은 족장 호아탄은 잠시 말을 아꼈다.
얼마 전 그는 오페칸카누로부터 한국과 유럽인 등의 적세를 살피도록 일임받았고, 그에 대한 보고를 하던 중이었다.
보고 내용은 허무맹랑했다.
-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단군왕검의 자손이며 고조선부터 이어온 한민족의 한 갈래이다.
호아탄의 보고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으려 했지만, 그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온 말이었다. 오페칸카누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조용히 턱짓을 했다. 보고를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그들이 내민 근거는 얼굴과 피부색이 같다는 점, 우리의 어머니가 곰이고 그들의 선조가 웅녀라는 점, 까마귀를 대단한 영물로 믿는다는 점, 우리 장례방식이 풍장인 것이 그들의 과거 장례 방법과 동일하다는 점 등입니다.”
호아탄은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
“더 괴이한 주장은 우리가 수천 년 전에 그들의 땅인 고조선에서 함께 살았는데, 언젠가 바다가 꽁꽁 얼어붙은 시기에 고조선을 떠나 이곳으로 이주했다는 겁니다. 또 고조선에서 함께 살았다는 근거에 대해서는 우리의 격언들이 자신들의 것과 똑같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말로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의미인데 우리의 격언들 속에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겁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설마 이런 저급한 선동에 놀아나는 놈들은 없겠지?”
오페칸카누가 당연하다는 의미로 던진 질문, 아니 사실상 확인이었다.
그런데 호아탄이 전에 없이 머뭇거렸다. 순간 오페칸카누의 눈썹은 꿈틀거리다 못해 일그러지고 말았다.
“떽!”
갑작스런 고함에 호아탄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대답이 끝났다. 의외로 한국의 저급한 선동에 놀아나는 인디언들이 아주 많다는 의미 아닌가?
잠시 후,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이거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대족장님! 제게 화를 내신 것도 아닌데요.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하하! 나는 대족장이 아니다! 그냥 부족 연합의 대표일 뿐이야. 앞으로 말조심하게!”
오페칸카누는 쓰게 웃으며 다시는 대족장이라 부르지 말도록 가볍게 질책했다. 그리고 보고를 이어 받았다.
“... 따라서 한국의 확장정책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상입니다!”
“음...”
문득 오페칸카누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호아탄! 곧 네 아버지의 기일이구나. 그는 나의 오랜 친구였고, 코노이족의 위대한 부족장이었다. 허허, 내게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었다니!”
호아탄은 울먹이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저씨!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저도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흐흑...”
“울지 마라! 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의 땅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바람 길을 따라, 또 까마귀가 인도하는 길이니...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도 그리 무겁지는 않았을 터.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다만, 아직 ‘산 자’의 그리움만이 사무치게 남았을 뿐.”
그 말에 호아탄의 울음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오페칸카누의 무거운 위로와 달리, 그의 눈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
같은 시각, 김추성의 집.
“자자, 위하여!”
“하하, 이거 꿀맛이네!”
오도리족 김추성의 집 뒤채에서는 아주 거하게 술판이 벌어졌다. 술자리는 지난 3월 초부터 벌써 수차례였다.
참석자는 뻔했다.
김추성의 아들 김공선, 호르킨족 ‘말없는 새’와 ‘작은 돌기둥’, 한고립, 송준길과 송시열 형제 등이었다. 그런데 오늘 송시열은 없었다.
첫 술자리 이후, 송시열은 무슨 이유에선지 일이 바빠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말없는 새가 술잔을 돌렸다.
“흐흐, 우리 한 장군한테 술 한 잔 올려야지!”
“아이고 아저씨! 무슨 한 장군입니까? 부끄럽게 시리...”
그때 작은 돌기둥이 끼어들었다.
“어허, 무슨 소리야! 우리 한 장군이 활약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었어. 난 지금도 기억한다니까! 서부전쟁 때, 쑤우족 ‘성난 들소’하고 격전을 벌이던 걸 말이야. 그때 정말 눈부셨어. 난 한 장군한테 늑대의 영혼이 깃든 줄 알았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돼! 한 장군은 우리의 영웅이야!”
순간 한고립의 얼굴색이 마치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 모습에 송준길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큭, 이거 한 형께서 하늘 높이 붕 뜨겠네. 꽉 붙잡아야겠습니다.”
김공선도 마찬가지였다.
“호위대장님께서 이렇게 유쾌하고 호방한 분인 줄 알았으면 초임장교 때부터 다가설걸 그랬습니다. 그땐 너무 무섭게 보였었는데...”
“어허, 지금은 호위대장이 아니라니까! 난 이제 일반인이야.”
한고립은 호위대장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말없는 새가 준 술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크으, 오늘 술 잘 받네! 참, 아저씨! 뭔지 모르겠지만 시열이가 많이 바빠요. 다음에 찾아뵙겠다고 하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말없는 새와 작은 돌기둥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서운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대접 잘 받고 있는데...”
그렇게 몇 순배가 더 돌았다.
“참! 아저씨, 요새 어디로 그렇게 다니시는 거 에요?”
갑작스런 송준길의 질문에 말없는 새가 대답했다.
“아, 호아탄이라고 코노이족 젊은 족장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어.”
작은 돌기둥도 거들었다.
“서부의 관개농업과 농기구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줬고, 최근엔 코요테담배(일명 씹는담배로 흡연의 시초로 여겨짐. 버지니아 담배종과 달리 건조한 기후에서 자람.) 재배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잘 가르쳐주고 있어. 기후가 맞지 않아서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알려달라고 사정하더군. 그래서 묘상(苗床, 모판)에 씨 뿌리는 법과 거름 주는 법, 옮겨 심는 법까지 전수하고 있다고. 어쨌든 돈 많이 벌려면 담배가 끝내주지. 유럽에서는 아주 사족을 못 쓰잖아!”
그때 한고립이 감탄한 듯 말했다.
“와! 그 호아탄이란 친구, 제대로 투자할 줄 아네. 기껏 모피로 푼돈 만지는 것보단 담배를 대규모로 재배하는 게 더 큰 부자가 될 테니.”
말없는 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내가 보기에 동부 인디언들의 담배 재배는 아주 어려울 거야. 동부 인디언들에게 담배는 착취와 증오 그 자체거든. 그때 영국인들이 좀 심했나? 그렇게 담배 재배를 강요하고 착취했으니... 사실 여기엔 포우하탄(포카혼타스의 아버지이자 오페칸카누의 친형)의 잘못이 더욱 크지. 무슨 이유에선지 인디언의 땅에다가 인디언의 강제노동까지 실질적으로 그가 눈감아줬거든. 그러니 그의 사후, 오페칸카누가 족장이 되고서 제임스타운 대학살을 벌인 거 아니겠어? 그 다음이야 다들 아는 이야기고...”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다.
또한 말없는 새와 작은 돌기둥이 같은 인디언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극히 내밀한 속사정이었다.
한고립은 조선의 과거를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에서는 자국백성을 신분으로 나눠 노비로 부렸었다. 그런데 설마 인디언 사이에서도 신분제가 있고 강제노동이나 노비가 있었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그냥 영국과의 개인적 결탁이나 착취의 방관이었을까?’
흥겨운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고립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
다음 날, 오페칸카누 부족 마을.
타닥타닥.
마을의 가장 큰 티피(Tepee, 원추형 천막) 안은 아주 따뜻했다.
“다시 말해보게!”
반면 오페칸카누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그의 위압적인 모습에 상대는 우물쭈물하며 쉬이 말하지 못했다. 허나 곧 눈을 질끈 감고 내뱉었다.
“작년부터 의심하던 그대롭니다. 버지니아 담배가 유통된 것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작년 늦가을에 영국인들이 담배상자를 선적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합니다.”
쾅!
“이런 *새끼들이!”
순간 오페칸카누의 눈에서 시뻘건 광망이 쏟아졌다.
버지니아 담배는 그의 역린, 아니 동부 인디언 모두의 역린이었으니까.
“대체 누구냐? 누구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