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225)

송준길이 의아해서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 한고립이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 다 들었지? 호르킨족이 우리와 한 핏줄이라는 거... 어쩐지 남 같지 않더라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송준길은 의구심이 들어 물었다.

“한 형께서는... 그걸, 정녕 믿으시는 겁니까?”

“그럼, 아주 딱 맞아 떨어지잖아? 얼굴 비슷하지, 곰을 어머니로 부르고 마을 어귀에도 장승까지 세워져 있어. 까마귀가 영물인 것도 똑같고... 참! 시열 동생도 그랬잖아? 호르킨족의 격언을 보면 우리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들이 많다고 말이야.”

“허허, 한 형! 그렇게 끼워 맞추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원인에 대한 철저한 고증 없이 단순한 외형적 결과만을 보고 대충 그렇겠거니 하고 판단한다면... 눈, 코, 입 숫자가 같으면 모두 인간이고 한 핏줄이라는 주장과 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특히 삼국유사는 고증오류가 많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하지만 난 폐하 말씀이 더 끌려. 어쨌든 호르킨족 말없는 새, 작은 돌기둥 아저씨가 우리와 한 핏줄이라는 거잖아! 그때 내 느낌도 그랬거든.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이야... 서로 남 같지 않고 끌리는 느낌, 이게 가장 강력한 증거 아니야?”

말을 마친 한고립이 동의를 구하듯 송시열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송시열은 가만히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송준길만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때 한고립의 말이 이어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못 비장한 말투였다.

“인디언은 우리와 한 핏줄이니 하나의 나라에서 함께 잘 살아야지... 여기에 나도, 한 몫 하겠어.”

송시열은 빙긋 웃었다.

...

다음 날, 국왕의 집무실.

“폐하! 김희두(개노미), 김자점, 송시열이 입궐했습니다.”

“어서 들라 하게!”

잠시 후.

나는 거두절미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친구에게 하듯 물었다.

“동부총독, 그대는 어찌 보는가?”

“듣기에는 좋으나 미덥지 않을 것이고, 가문 개울바닥처럼 곧 드러날 일이옵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냉혹한 평이었다. 순간 김자점의 얼굴이 퍼렇게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그대 말은 너무 길어. 그냥 거짓말이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그런 표현은 싫습니다.”

“하하, 역시 솔직하군.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로, 뭐든 그대를 믿는 이유다.”

나는 짐이라 칭하지 않고 ‘우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첫 항해 직전, 부산의 한 부두에서 만난 기막힌 인연이었다.

그의 의구심에는 곧 답이 내려질 것이다.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는 동부총독과 반대인 것 같군.”

김자점은 슬쩍 개노미를 곁눈질하더니 전혀 빼지 않고 답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 좋고 맛도 좋기 마련입니다. 또 듣기 좋은 소리일수록 사람을 움직이기 수월합니다. 가문 개울바닥이라... 만약 가문 개울바닥처럼 곧 드러날 것이 걱정이라면 개울바닥이 가물지 않도록 계속 물을 대면 그만입니다.”

개노미와 김자점은 서로 엇갈렸다. 

일단 국왕의 칙령이 얄팍한 권도(權道)이며 언젠가 드러날 거짓말이라 본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곧 드러날 일이니 그만 두자는 개노미와 달리, 김자점은 드러나건 말건 그냥 시치미 떼고 밀고나가자는 입장이었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대략 0.1초쯤일까? 바짝 날 선 눈초리가 마치 난도질하듯 서로를 훑었다. 

허나 나는 모른 척하고 물었다. 아직 송시열이 남았으니까.

“그대는 누구의 말이 옳다고 보나?”

지그시 지켜보기만 하던 송시열이 차분한 눈길로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틀렸습니다. 전제가 맞으면 맞는 대로, 틀리면 틀린 대로... 폐하의 결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북아메리카를 통합하시겠다는 폐하의 의지가 그대로인 이상, 전제가 거짓인지 여부는 문제되지 않으니까요.”

송시열은 잠시 멈칫하더니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방금 두 분은 전제를 거짓말로 보고 각자의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왜 전제가 거짓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시는지요? 저는 서부에서 직접 보고 느꼈습니다. 인디언의 기본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요. 게다가 그들의 외모, 언어, 생활상, 격언 등을 살피면 더욱 우리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북아메리카 통합은 불가피하고 그럴수록 현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현실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통합은 인디언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 우리부터 전제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의심하는데 어찌 인디언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문제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인디언이 한국인이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나는 기가 막혔다. 

‘그가 송시열인지 마키아벨리인지 모르겠군. 저 말은 결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뜻 아닌가?’

군주론으로 널리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난 1527년 사망한 마키아벨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었다. 

모든 목적이 아닌 정치적으로 좋은 목적을 전제로, 국가 등 공동체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권모술수의 정치도 통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는 좋은 수단만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냉혹하고도 정직한 현실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여러 쟁점이 있었지만, 가장 큰 논란은 [좋은 목적을 누가, 또 어떻게 결정하느냐?]였다.

각설하고.

어쨌든 송시열은 마키아벨리와 다를 바 없는 지독한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국왕인 나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이었다. 

그때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니 그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송시열은 천년거암처럼 미동도 없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탁.

나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각자 고심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개노미, 김자점, 송시열... 조선에서 호주, 또 북아메리카까지 그들의 공적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한마디로 모두 유능한 인재였다. 그럼에도 각자의 성향과 재능의 영역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과연 누가 적임자일까?’

나의 고심은 끝이 없었고 그건 4자대담(四子對談)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고심 끝에 답이 나왔다.

‘맞아! 세 사람이 나의 삼총사가 되면 되겠군.’

나는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

수도의 어느 술집.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세 사람은 술을 시켜놓긴 했으나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서로 노려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때... 개노미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김자점 이 인간아! 이 원수 같은 인간아! 사대부였다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이런 인간하고 잘해보려던 게 미친 짓이었지.”

“훗!”

그저 쓴웃음이 고작, 김자점은 대꾸도 없었다. 서로 술 한 잔씩 따라 거칠게 들이키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윽고 개노미가 쓰게 말했다.

“뭐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허허, 당신처럼 음험한 사람과는 정말 상종하지 못하겠군.”

“이봐 희두. 자네가 아무리 비난해도 소용없어. 듣기 거북하겠지만 그게 옳은 판단이었어.”

“에잇!”

개노미는 또 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슬쩍 송시열에게 눈짓했다. 뭐든 말 좀 하라는 뜻이었다.

곧이어 송시열도 술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마셨다. 김자점은 조용히 송시열의 잔을 채웠고 송시열은 눈짓으로 고마워하고는 다시 들이켰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다시 몇 순배가 지났다.

이번에도 개노미가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이것이 사대부의 매운 맛인가? 김자점, 저 인간이야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치고... 송시열 그대까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 같은 노비출신들은 사대부의 상대가 되질 않아.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때 송시열이 대답했다.

“각자 판단이 달랐으니까요! 서로 엇갈렸던 것은 이제 잊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에 사대부나 노비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하구요! 우리는 폐하께서 명하신대로 힘껏 따라야 합니다. 그뿐입니다.”

그 말에 김자점이 끼어들었다.

“하하!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그때 서부전쟁이 끝나고 인디언 노예해방의 기치를 함께 들자고 권유한 적이 있지 않았나? 역시 그대는 깨어 있군. 아니 그런가?”

송시열은 쓰게 웃으며 서부전쟁이 끝났던 당시를 떠올렸다.

서부전쟁이 끝난 직후였고, 송시열은 김자점의 그 같은 권유에 기함했었다. 그가 듣기에 아무리 낮춰 잡아도 역모였으니까. 

국왕이 호주를 건국하며 내건 국시인 ‘노예해방의 기치’를 신하가 자신의 이름으로 내건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역모가 분명했다.

다음 대화는 이랬었다.

- 맛이 떫은 듯합니다.

- 떫은 것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깊은 맛이 우러나지

- 적당한 시간은 얼마고, 그 맛은 어디까지 깊어지는지요?

- 둘 다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묘미이자 세상의 이치 아닌가?

송시열은 김자점의 청을 거절했었고,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한 편으로 말이다.

그때, 개노미가 말했다.

“흥! 좋다. 폐하의 명이 우선이지. 그럼 지금부터 각자 밑천을 꺼내보자고. 속일 생각은 말고 말이야.”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이내 씨익 웃고는 머리를 한데 모았다.

산 자의 마지막 발걸음

1631년 3월 10일, 북아메리카 수도 근처.

“후우! 다시 묘상(苗床,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우는 자리)이 상한다면, 목숨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체구가 장대한 사내의 말에는 냉기가 풀풀 날렸다. 그의 앞엔 피 흘리며 나동그라진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은 사신의 낫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은 색 채찍이 핏빛으로 물들었을 정도였으니까.

사내는 다시 말했다.

“4월에 옮겨심기 전까지... 담배모종이 잘 자라도록 잘 태운 나뭇재와 삭힌 분뇨를 잊지 말고 수시로 뿌려라! 혹여 늦서리에 상하지 않도록 더더욱 주의하고...”

덜덜.

쓰러진 자들과 다른 주위 사람들은 마치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인디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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