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하며 포용정책을 펼친다고 어찌 일본에 대의명분이 바로 서겠는가?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을 경험한 호르킨족 등 서부 인디언 부족들은 한국을 나름 해방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김자점의 주장은 자신이 경험한 서부전쟁의 결론을 따른 것이었다.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나눠서 끌어안을 부족과 내쳐야 할 부족을 빨리 결정하자는 의미였다. 어차피 한국은 침략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말이다.
김자점의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서부전쟁을 생각해보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수도 있겠군.’
물론 나의 기존 생각, 한국인의 대규모 이주로 인구비중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 방법도 당연히 유효했다. 개노미는 기존 계획을 바탕으로 더욱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인내는 포용과 관용의 전제조건이고 이를 통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스스로 한국을 선택하게 만들자는 의미였다. 개노미도 어차피 한국은 침략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
‘둘 다 기본 전제조건이 같다. 나도 같은 생각이고.’
나의 고심은 갈수록 깊어졌다.
‘삼국지의 황건적조차도 대의명분이 확실했다. 그런데 내가 남아메리카 독립에 매몰되어 북아메리카의 대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얄팍했어. 일의 선후가 잘못된 셈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어.’
후회막급이었다.
...
늦은 밤, 임시궁궐의 침전.
나는 태자를 안으며 잠시 근심을 잊으려 했다.
“어이쿠 내 아들, 우리 태자 얼굴이 반쪽이구나!”
아직 네 살, 어린나이에 오랜 항해를 한 탓으로 태자의 얼굴은 딱 반쪽이었다. 너무 안쓰러워 더욱 포근히 끌어안아 주었다.
그때 왕후 강씨가 다소곳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태자가 폐하를 아주 쏙 빼닮았습니다. 폐하!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구료!”
나는 가만히 속으로 웃었다.
사실 태자는 내가 아니라 왕후를 쏙 빼닮았다. 특히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 갸름한 얼굴선이 그랬다. 나는 크게 만족했다. 내 눈에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전생을 통틀어 내 첫 아이였다.
하지만 왕후는 반대였다.
그녀는 조선의 옛 일들을 항상 걱정하곤 했었다. 조선에서 왕의 눈 밖에 난 세자, 왕자의 운명은 대부분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으니까. 또 내가 욕심과 의심이 많고, 모략에 능한 군주라는 악명(?) 탓도 있었다.
나는 과거 왕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태자는 나보단 왕후를 많이 닮았군.
- 폐,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 하하! 태자가 그대를 닮아 너무 예쁘고 귀엽다는 뜻이오. 그렇지 않소?
- ...
그때 왕후 강씨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순간 얼굴 전체가 새파랗게 변하고 입술부터 손발까지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렸었다. 그 후로 나는 태자가 왕후 강씨와 닮았다는 말을 일언반구도 꺼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왕후 강씨가 종종 ‘태자가 폐하를 쏙 빼닮았다’고 슬그머니 말하면 나 역시 적당히 그렇다고 맞장구쳐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태자는 나를 쏙 빼닮았군. 바로 그랬어. 으하하핫!”
아이네이스
1631년 3월 1일, 북아메리카 수도.
위그노 교회.
시민권 선서식이 끝난 후, 국왕의 목소리로 ‘위그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놀랍게도 상당히 유창한 프랑스어였다.
“종교의 자유를 잃은 모든 이여! 우리에게 오라. 시민권은 물론이고 땅과 일자리, 정착 자금까지 주겠다. 한국은 너희의 새로운 조국이 될 것이다.”
순간 위그노 지도자 장 귀통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민권 선서를 위해 교회에 모인 위그노들도 전에 없이 술렁였다.
칙령의 공포는 계속 이어졌다.
“예배를 프랑스어로 드릴 수 있는 권리, 위그노만의 교회설립도 약속한다...”
와아아!
국왕의 위그노 칙령 공포가 끝나자 위그노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북아메리카로의 이주.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었지만 모든 이에게 다소 의심스러웠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된 순간이었다.
위그노 칙령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제도적, 물질적 특혜를 제공하고 예배를 프랑스어로 드릴 수 있는 권리와 위그노만의 교회 설립까지 약속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회참여, 사회적 관용, 법에 의한 인신보호, 재산권 보장 등 위그노가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전제조건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국왕이 떠나고 위그노 지도자들이 다시 모였다.
쾅!
“역시 우리의 선택이 옳았어! 으하하!”
장 귀통은 미친 듯이 웃었다.
위그노 칙령은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칼뱅의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는 종교 때문에 분열됐고 오랫동안 다퉈왔다. 그러나 구교도에 맞서기엔 힘이 모자랐다. 결국 라 로셸 포위전을 기점으로 프랑스에서 내쫓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물을 뿌리며 고국 프랑스를 등졌고, 유럽 곳곳에 산산이 흩뿌려졌다. 프랑스, 아니 유럽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엘리트였던 위그노들이 보잘것없는 난민 신세가 된 것이었다.
위그노들의 선택은 다양했었다.
한국으로 향한 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등 다른 신교도 국가들을 선택한 위그노들도 많았으니까.
장 귀통은 눈을 빛내며 엄숙히 선언했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각지에 흩어진 위그노 형제자매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 그들이 한국에 와서 자유를 찾으라고 말이다. 또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수도 한복판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위그노 교회를 세우자! 교회 첨탑의 종소리가 북아메리카 전역에 울려 퍼지도록...”
...
그날 오후, 영국계 한국인 정착촌.
청교도 교회.
“영국이여, 이제 작별을 고하노라! 여기에선 우리는, 그대의 품에서 태어나 이때까지 그대의 품을 결코 잊지 않았네. 오, 그대 영국이여! 우리는 앞으로도 그대의 영광을 기원합니다. 그대도 우리의 앞길을 축복해주길... 신이여, 영국을 보살펴주소서!”
슬픈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영국에 고하는 작별의 기도... 영국 청교도들은 두 눈 가득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지난 1620년의 메이플라워 서약은 언제나 영국을 기억하고 영국 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이며 다짐이었다.
작별의 순간.
야속하게도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로마제국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대표작인 ‘아이네이스(The Aeneid)’의 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아이네이스는 로마제국의 탄생을 그린 대서사시로, 트로이 장군인 아이네아스의 유랑을 노래했다. 로마제국의 기원인 트로이의 영웅들이 이탈리아에 정착하기까지의 내용과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국 청교도 지도자들이 격론 끝에 선택한 것이었다.
‘트로이에서 로마’는 ‘영국에서 한국’을 상징했고, 한국에 귀화해 다시는 되돌리지 않겠다는 영국 청교도들의 약속이며 다짐이었다. 또 로마제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으로 만들자는 의미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꿈이었지만...
윌리엄 브래드퍼드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신들의 운명이 그 명령으로 우리를 떠밀어 그대들의 땅을 찾아오게 했소이다.
전능한 숙명,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운명은 자원(自願)하는 자는 데려가고 불원(不願)하는 자는 끌어가느니.
운명은 자원(自願)하는 사람을 요구하느니... 흐흑.”
마지막 구절에서, 윌리엄 브래드퍼드도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
이전의 기도에서 영국과의 슬픈 작별을 고한 그였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네이스 시 구절의 ‘그대’는 한국과 한국 국왕을 의미하고, ‘그대들의 땅’은 북아메리카를 의미했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하리라 믿었던 ‘메이플라워 서약’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잠시 후.
영국, 아니 이제는 영국계 한국인이 된 청교도 지도자들이 다시 모였다.
존 스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후련합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종교와 재산권, 인신보호령까지 헌법과 권리장전으로 보장되니 더 고민할 것도 없으니까요.”
다른 지도자도 맞장구쳤다.
“이건 제 생각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인두권 제도와 의회가 마음에 듭니다. 인두권 제도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게, 국가가 법과 제도적으로 도와주는 겁니다. 또 의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의회에 참가해서 평등한 법률과 관제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세금도 마찬가지구요. 영국처럼 왕이 맘대로 세금부과를 할 수 없으니 더욱 좋습니다.”
“저는 인신보호령입니다. 왕의 특별재판소만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려요.”
“그것들보단 한국의 은 무역에 편승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아시아·인도무역에 손쉽게 참가할 수 있지 않습니까?”
“...”
“...”
웅성웅성.
그들의 대화는 존 스쿼드에 의해 끊겼다.
“자자! 이제 결론을 내립시다. 더 의심할 것도 없으니 영국 내의 청교도, 젠트리와 요먼 등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괜히 영국에서 차별받느니... 다같이 한국에 건너와 마음 편히 살고 함께 부자가 되자고요. 그럼 표결합시다! 찬성하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드르륵.
사방 곳곳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만장일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