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25)

그렇게 조용히 몇 순배(巡杯)가 돌았다.

술잔을 돌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김자점의 눈은 빙글거렸고, 개노미는 사뭇 비장한 안색이었다.

이윽고 술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김자점이었다. 말은 반말.

“이봐, 김희두!”

그 말에 개노미의 눈썹은 꿈틀거리다 못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김희두’는 감히 그의 입으로 불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이름을 지어준 개노미의 주인, 김희범에 대한 모욕이었다.

개노미의 역린! 

그걸 모를 리 없는 김자점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순간 개노미의 눈에서 불꽃이 번뜩였다. 김자점도 그에 맞섰다. 바짝 날 선 눈초리가 마치 난도질하듯 서로를 훑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결국 먼저 눈빛을 거둔 것도 김자점이었다. 말은 또 반말.

“제법이로군. 예전처럼 달려들지도 않고... 제길, 관두자고. 한잔 더 하지.”

그의 말마따나 이런 식의 도발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듯했다. 아마 주먹다짐까지...

김자점이 새 술병을 꺼내서 술을 따랐다. 그리고 같이 마시자며 내밀었다.

“자 건배하세. 한국을 위하여!”

개노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저급한 수작, 대체 언제까지 할 건가?”

“하하! 친구끼리 순수하게 한 잔 하자는 거다. 나는 너를 친구로 받아들였어. 예전부터.”

“누구 맘대로?”

“흐흐, 너의 뜻은 중요치 않아! 나 김자점이 널 친구로 인정한 이상, 그걸로 끝이다. 너는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영광으로 알아!”

둘의 대작(對酌)은 밤새 이어졌다.

새벽녘.

아직 여명이 트기 전이었다.

개노미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자마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자네, 말도 없이 가나?”

김자점의 목소리엔 이상하게도 취기가 전혀 없었다. 개노미는 몸을 세웠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개노미의 목소리는 아주 냉랭했다.

“우리 사이에 굳이 그런 게 필요한가?”

“섭섭하군. 미운 정도 정인데...”

그 말에 개노미는 잠시 멈칫했다. 섭섭하단 말이나 미운 정이란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개노미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보내주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군. 내가 자네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하겠어.”

“그럼, 아닌가?”

김자점은 개노미의 반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곧이어 개노미가 낮게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김자점이 다소 익살 섞인 말투로 고쳐 되물었다.

“자네는 날 친구로 생각하나?”

개노미는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호기롭게 말을 받았다.

“하하핫! 꿈 한 번 야무지군. 우리 사이에 친구라니...”

그 말을 끝으로 개노미는 자리를 떴다. 김자점은 그의 뒷모습, 또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눈과 귀로 배웅했다.

‘거짓말.’

개노미가 멈칫한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네의 순수함에 어찌 반하지 않겠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도와주겠네...’

김자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1631년 2월 26일, 수도 입경(入京)행사장.

“아악!”

순간 비명이 터졌다. 누군가가 넘어지며 내지른 소리였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한고립은 멋쩍게 사과하며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려했다. 입경행사장이 너무 번잡해서 일어난 불의의 사고였다.

그런데 넘어진 사람은 한고립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크게 분한 듯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일어나더니 섬뜩한 시선을 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의 외모는 언뜻 한국인으로 보였는데 복장은 영국식이었다.

한고립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거참 사과하는 사람 무안하게... 내가 자기 엄마라도 죽였나? 정말 소름끼치는 살기(殺氣)로군. 살기만 따지면 조선부왕전하 못지않은데...”

이때 송준길이 다가서며 타박했다.

“한 형!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곧 행사음식이 나옵니다. 한 형답지 않게 여기서 머뭇거리다니요!”

“어어, 그냥 누구랑 부딪혔는데... 에잇, 별일 아니야. 어서 행사음식이나 받으러 가자.”

잠시 후.

“여깁니다, 여기 자리 있습니다!”

금세 식사를 마치고 송준길이 먼저 물었다.

“그래, 호르킨족 사람들은 찾았어?”

송시열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수소문해보니 오도리족 김추성의 집에 기숙한다고 합니다. 먼저 정착지를 배정받은 다음에 함께 찾아가시지요. 아마 한 형을 가장 반길 겁니다.”

한고립은 우쭐거리며 맞받았다.

“하하! 그건 당연한 거 아닐까? 만나면 거하게 한잔 하자고. 내가 살게. 그동안 호르킨족 마을 이야기도 무척 궁금했으니까.”

곧이어 세 사람은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으로 이동했다.

북아메리카의 새 수도는 호주의 서울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아직 사방이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지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해가 져서 어둑해지고 있는 중에도 인파가 줄지 않았다. 

곧 입경행사의 마지막 식순으로 국왕의 입궁행렬이 광장에서 거행될 것이니까.

한고립과 송시열 형제도 국왕의 입궁행렬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저기가 임시궁궐이고 그 옆이 새 왕궁이겠군. 임시궁궐도 투박하지만 힘 있어 보인다. 새 왕궁은 호주의 왕궁보다 최소 다섯 배는 더 크겠는걸. 우와, 저기 봐! 저기 저 처자들이 위그노인가 보다...”

한고립의 탄성에 송시열도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곱게 차려입은 위그노 소녀들이 임시궁궐 입구와 길 가에 도열하고 있었다. 아직 겨울인데도 어디서 구했는지 꽃으로 단장했다. 그녀들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행사를 빛냈다.

송준길은 한고립의 얼빠진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쯧쯧, 한 형! 침이라도 닦고 보세요. 아주 줄줄 흐릅니다! 당나라 이백(李白)이 소년행(少年行)에서 호희(胡姬)의 이국적 아름다움을 그리 칭송하더니 한 형이 바로 그 짝입니다. 뭐, 저도 가슴이 진탕될 정도로 아름답긴 하네요. 화장이나 옷이 날개긴 날개입니다. 서울에서 유럽인에 익숙해졌다 생각했었거늘...”

송시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백의 시구를 낮게 읊조렸다.

- 꽃같이 아름다운 호희(胡姬)가 술집에서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네. 호희가 흰 손으로 부르니, 주객들이 연이어 금준에 취하네.

한고립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역시 넋이 나간 듯 위그노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시열은 눈살을 찌푸리며 ‘당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를 떠올렸다. 거기엔 또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가 있었다.

- 천보 계년에 세월이 변하더니, 신하와 후궁들이 빙글빙글 도는 춤을 배우는데 여념이 없네. 그 중에 양귀비와 안녹산이 있으니, 두 사람이 호선에 가장 능하더라.

그때 위그노 소녀들을 바라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즐겁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위그노 지도자 ‘장 귀통’이었다.

송시열은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아! 폐하께서는 미인계에 현혹되실 나약한 분이 아니다. 혹시 다른 모략이 있을지 잘 살펴봐야겠군.’

와아아.

짝짝.

덜컹.

나는 왕후 강씨와 함께 행사용 무개(無蓋, 뚜껑이 없는)마차에 올라 마지막 입궁행렬에 나섰다. 호위병들이 엄중하게 경계하는 와중에 이루어진 행사였다. 

국왕 부부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은 당연지사.

“와아아!”

국민들의 열광적인 박수와 함성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행렬 좌우로 아름다운 위그노 소녀들이 꽃잎을 뿌리며 황홀한 춤사위를 뽐냈으니까. 

‘정말 헉 소리 나게 예쁘군. 마치 미스월드 심사하러 나온 거 같잖아... 어이쿠!’

나는 왕후 강씨의 날 선 눈빛을 너무 늦게 확인했다. 과거 스페인의 미인계, ‘마리아나 히메네스’ 사건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이럴 때는 뻔뻔함이 최고지. 내가 왕인데 새 후궁을 들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최대한 능숙하게 시선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왕후 강씨를 지긋이 바라보며 손을 이끌기도 하면서... 

이것이 입경행사의 마지막이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1631년 2월 27일, 북아메리카 수도.

국왕의 집무실.

“뭐, 6천만 굴덴?”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며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나도 펠리페4세와 함께 나란히 갈 뻔했다. 이 젊은 나이에 뇌출혈이나 심근경색으로...

‘다시 빈털터리군.’

호주의 전시채권을 백지화하고 국민투자칙령까지 내려 싹싹 긁어모았던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북아메리카 천도비용과 추가적인 재정소요에 투입할 돈이었다. 

한국이 세계 은 무역을 장악한 이상, 장기적으로는 별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아주 큰 문제였다. 당분간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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