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25)

‘그래 이거다! 이거면 되겠어...’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총독의 집무실.

“각하! 앞으로도 한국의 군수품을 제공받고 필요자금을 융통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은행의 영업개시를 허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유대인 자산을 전부 몰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대체 얼마인지 또 어디에 숨겨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은 재무담당관의 말에 다시 물었다.

“그럼 한국은행의 유대인 자산매입을 그냥 눈뜨고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재무담당관은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각하!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매각자산은 눈에 드러난 부동산, 회사주식과 채권, 개인과 회사의 기존채권채무가 대부분입니다. 몰수하려고 하면 할수록 숨길 것이고, 꽁꽁 숨기면 답이 없습니다. 아예 매각할 수 있도록 경매를 허용하고 헐값에 사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 유대인 자산의 절반 정도만 매입하도록 허용하시지요. 한국에 전부는 안 됩니다.”

“절반이라... 그것도 너무 아깝군.”

“각하! 우리가 전부 매입하면 좋겠지만 자금이 부족합니다. 한국에 절반을 허용하면 네덜란드 전체 금융시장의 2~3할을 내주는 셈입니다. 네덜란드 금융에서 유대인의 비중이 아예 없어지는 대신이니 그리 아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프레데릭 헨드릭은 고심 끝에 결정했다.

“좋다! 곧 남부 네덜란드를 병합하면 한국의 비중은 더욱 낮아지겠지. 허락한다.”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동부해안.

국왕의 기함.

철썩!

쏴아아!

오늘은 서울을 떠난 지 91일을 꽉 채운 날이었다.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가장 높은 돛 위에서 견시수가 육지의 출몰을 소리 높여 알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켜 갑판으로 나왔다. 호위대장도 두 눈을 번뜩이며 내 뒤를 따랐다. 

기함의 갑판은 분주했다. 

내가 갑판 위에 나타나자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소소하지만 갑판 일을 도왔다.

그때 함장이 급히 다가와 극력 만류했다.

“폐하! 저희들이 할 일입니다. 바람이 차니 옥체를 생각하시어 선실로 들어가시지요?”

“하하, 함장도 잘 알다시피 배의 일은 모두가 할 일입니다. 바다 위에서 우리의 목숨은 각자의 역할에 기대어 있습니다. 배의 누군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배의 누구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짐은 따뜻하게 입어 괜찮습니다. 아주 흥겨우니 함장은 괘념치 마세요!”

펄럭.

“모두 끌어당겨! 으라차차!”

곧이어 나는 갑판원들과 함께 돛을 조작하며 땀을 흘렸다.

잠시 후.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또 나의 기함 뒤로는 수백 척의 전함과 수송선이 위풍당당하게 대서양을 가르며 하얀 물길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서양의 새로운 물결이 되어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향해 끝없이 전진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장엄한 위용에 압도되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아니, 되돌려선 안 된다.’

북아메리카 수도 천도는 한국의 명운을 건 결단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대항해시대의 새로운 물결... 그 흐름을 타지 못했던 국가들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지어졌다. 

역사의 흐름, 세계사의 변곡점에서 그 주도권을 잡았던 유럽과 그 후예들이 결국 선진국으로 자리하고 세계문명을 이끌지 않았던가!

내가 읽었던 대항해시대의 가슴 뛰는 모험이야기들은 두 단어로 축약되었다.

바로 ‘선점(先占)’과 ‘모험(冒險)’이었다.

나의 선택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의 슬픈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아니 한민족이 조선, 호주를 이어 북아메리카에 완전히 뿌리 내리면서 영원히 종결되어야 한다.

이때 인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왕후 강씨가 태자를 안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태자의 얼굴엔 피곤함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양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그렇게 내가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가 되자, 그녀의 두 볼이 빨갛게 익어버렸다.

“폐, 폐하...”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나는 북아메리카를 두 눈 가득 담고 소리 없이 외쳤다.

‘드디어, 내가 왔다!’

북아메리카 입성

1631년 2월 25일, 북아메리카 체사피크만 입구.

국왕의 기함.

“폐하! 저 앞의 강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제임스타운입니다. 허나 명하신대로 곧 수도로 향하겠습니다.”

감회가 새로웠다.

체사피크만, 정말 오랜만이었다.

과거 해군장교시절,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최대의 해군기지였던 노퍽(Norfolk)에서 지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다시 봐도 천혜의 양항(良港)이군.’

나 역시 콕 집어 해군기지를 짓도록 명령한 곳이었다. 이제는 한국의 해군기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기함은 다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내 눈앞에 있던 해군기지는 어느 새 옆으로 스치더니 이내 뒤로 자리했다. 

왼쪽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임스타운이고 오른쪽으로 체사피크만을 항해하다 또 다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에 이르는 길이었다. 하지만 전함이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니 적당한 곳에서 하선해야 했다.

한편에는 활엽수와 침엽수들이 이어지고, 다른 편에는 잔잔한 체사피크만의 물이 넘실댔다. 그러나 잔잔한 바다와 달리 거친 해풍이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스쳤다. 이는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가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지나 드디어 강 하구에 도착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폐하! 저 쪽에 임시행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입경(入京)행사는 내일 성대하게 열릴 것입니다. 자세한 행사계획은...”

나는 부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한발 한발 무겁게 하선했다.

곧이어 북아메리카에 나의 두 발을 내딛은 순간,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흥망성쇠(興亡盛衰)!

인간, 국가, 문명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소멸한다. 그 누구도, 어느 국가나 문명도 비켜 갈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다. 

그러나 그 필멸의 운명에 도전하는 그 누군가, 또 어느 국가나 문명들이 항상 있어왔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 또 다른 국가나 문명들도...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명멸(明滅)한 위인들과 국가, 문명들을... 나는 결코 잊지 않겠다.’

순간 저녁놀과 땅의 대비가 강렬했다. 나의 상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행동은 오직 느낌이었다. 

언제든 누군가가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말없이 웃으리라! 

털썩.

나는 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부관이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주위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왕후 강씨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중에 나는 말없이 오른 손을 뻗어 흙 한줌을 거머쥐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그날 늦은 밤, 수도건설본부.

김자점의 집무실.

“크하핫!”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웃는 김자점의 모습에, 김련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김자점은 너무 웃어서 배가 당기고 아팠는지, 이내 꺽꺽거리다 눈물까지 쏟으며 웃음을 그쳤다.

김자점은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말했다.

“후우,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역시 폐하는 폐하시다!”

그리 말하고는 다시 숨을 고르느라 볼썽사납게 코를 벌렁거렸다. 또 ‘후욱!’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하, 나는 너무 기쁘구나! 역시 정답은 나였어. 폐하께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겠다.”

김자점은 희희낙락했다.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

김자점 부자가 흠칫 놀라며 귀를 기울였는데, 그 목소리는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덜컥.

“어이쿠! 내가 부자간에 좋은 시간을 방해했구려. 이거 미안하오.”

심야의 불청객은 개노미였다. 

그의 말은 무척 미안한 투였지만 얼굴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김련이 화난 얼굴로 째려봤지만 개노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빈자리를 차지했다. 

김자점은 웃는 낯으로 술 한 잔을 따라 건네주었다. 그리고 김련에게 이만 나가라며 눈짓했다.

잠시 후.

김련의 기척이 멀어지고 두 사람만 남았다.

개노미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김자점은 묵묵히 개노미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엔 자신의 잔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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