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5/225)

그의 생각에도 정면대결은 승산이 없어보였다. 당장 나아가 영국인들을 찢어죽이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격론은 다시 이어졌다.

“흥! 그럼 뭘 어쩌자는 거냐? 네 놈이 한국과 담판이라도 벌여서 아버지의 땅을 되찾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이거 말조심합시다! 우리는 부족 연합입니다. 저 역시 나이는 어리지만 한 부족의 부족장으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보고 들었을 거 아닙니까? 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합시다. 한국은 영국을 압도하는 총과 대포, 거대한 군함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맞서 맨몸으로 싸우자는 말은 나가서 그냥 죽자는 말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담판? 그거 좋지요! 제게 전권을 주시지요! 한번 부딪혀 보겠습니다.”

“뭐? 이런 배신자 새끼가...”

“또 욕입니까?”

우당탕.

순간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주먹다짐을 하며 엉겨 붙자 오페칸카누가 노호성과 함께 좌중에 끼어들었다.

“그만!”

좌중은 금세 정돈되었다.

오페칸카누는 매서운 눈빛으로 둘러보다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나? 쯧쯧...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어떻게 적들을 몰아내고 아버지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봐 호아탄!”

“네 대족장!”

오페칸카누가 ‘호아탄’이라고 부른 자는 방금 신중론을 펼쳤던 젊은 족장이었다. 그는 오페칸카누를 제멋대로 ‘대족장’이라 부르며 열심히 따랐다.

“하하! 나는 대족장이 아니다! 그냥 부족 연합의 대표일 뿐이야.”

“하하! 부족 연합을 대표하는 족장이니 대!족!장! 아닙니까?”

호아탄은 ‘대족장’을 한 글자 한글자 힘주어 말하며 웃었다. 오페칸카누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숨기고 다시 말했다.

“후후, 네 멋대로 부르든 말든 상관없다. 하여간 호아탄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무턱대고 적을 공격할 순 없지. 우선 적세를 살피는 것은 네게 일임하겠다. 김자점의 제안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호아탄의 보고를 기다렸다가 다시 토의하자! 알겠나?”

웅성웅성.

오페칸카누는 부족 연합의 다른 족장들을 웃으며 배웅했다. 잠시 후,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자는 호아탄이었다. 

‘음, 저 놈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형 포우하탄(이전 족장이자 포카혼타스의 친부)을 닮았어. 말이나 행동 모두... 영국에 아버지의 땅과 딸, 형제들을 팔아먹은 배신자...’

그의 눈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

같은 시각, 제임스타운.

런던 버지니아 회사.

“그 호아탄?”

순간 개노미의 눈빛에 의구심이 어렸다. 그러나 수하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수하는 보고를 이어갔다.

“네 그 호아탄입니다. 수도 예정지 근처에 거주하는 코노이 족의 젊은 족장 말입니다. 인디언답지 않게 영어가 수준급이고, 한국어도 제법 합니다. 다른 인디언 부족들과 달리 한국인과 유럽인을 터부시하지 않고 생각도 트여있습니다. 또 새로운 문물을 들이는 것에 적극적입니다. 특히 관개농업과 농기구, 건축기술 등에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아차! 서부 인디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목격했고요...”

개노미는 두 손에 턱을 괴고는 고심했다.

현재 수도 예정지 근처는 기존 인디언 부족들, 영국계 한국인, 프랑스 위그노계 한국인, 제1차 이주민 등으로 혼돈의 중심지였다.

우선 인디언은 코노이, 델라웨어, 난티코크와 쇼니 족 등 열 개 이상 부족으로 최소 20만이 넘었다. 둘째 영국계 한국인과 프랑스 위그노계 한국인이 각 3만씩 6만 가량이었다. 마지막으로 제1차 이주민이 3만, 곧 도착할 제2차 이주민이 3만 정도였다.

개노미는 탁자 위의 지도로 눈을 돌렸다. 눈에 들어온 지도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뒤죽박죽이었다.

빨간 점은 인디언 부족, 노란 점은 위그노, 파란 점은 영국계, 초록 점은 기타 유럽 이주민, 흑점은 한국 이주민을 의미했다. 그 점들 아래엔 세필(細筆)로 부족명 등 출신지와 정착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뿌드득.

‘김자점, 이리 가까이 배치하면 싸움을 붙이는 꼴이 아닌가?’

인디언 입장에선 누구든 이방인, 아니 침입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바로 옆에 이방인의 정착촌이 들어서다니! 인디언 입장에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런 김자점의 속셈은 너무나 뻔히 보였다.

‘김자점아! 김자점아! 네 어찌 폐하를 뵈려 하느냐? 내 모든 것을 걸고... 기필코 너를 막을 것이다.’

개노미는 이내 생각을 멈추고 수하에게 일렀다.

“호아탄을 은밀히 불러들여라!”

“네 알겠습니다.”

수하가 물러나고 개노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의 눈길은 벽에 걸린 해도를 향했다.

‘곧 폐하께서 도착하실 터인데... 이 참람한 사실을 어찌 말씀드린단 말인가!’

개노미의 얼굴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연결고리

1631년 2월 5일, 수도 예정지 근처.

어느 위그노 정착촌.

“북아메리카는 우리의 새로운 고향이다. 당연히 라 로셸의 판박이여야 해!”

위그노 지도자 장 귀통(Jean Guiton)은 수도의 청사진(靑寫眞)을 살피며 눈을 빛냈다.

지난 1627년에서 1628년까지 이어진 ‘위그노 라 로셸 포위전’ 당시, 라 로셸의 시장이자 위그노 지도자였던 장 귀통은 루이 13세의 종교탄압과 군대에 맞서 맹렬히 항전했었다.

본래 라 로셸 태생인 장 귀통은 ‘위그노 라 로셸 포위전’의 치욕적인 항복 후에 위그노의 정치적·종교적 자유가 박탈되는 과정을 결코 감내할 수 없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칼뱅주의 신교도를 일컫는 말. 

15세기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이후부터 프랑스 내에서 세력을 키운 위그노는 구교도를 국교로 한 프랑스 발루아 왕가에 의해 꾸준히 탄압받아왔다.

수십 년간 이어진 위그노 전쟁, 끔찍했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잠시나마 환호했던 앙리4세의 낭트칙령... 프랑스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위해 라 로셸을 근거지로 굳게 응집했었다.

라 로셸은 칼뱅의 종교개혁 이전부터 자체 선거를 통해 매년 시장을 뽑았던 만큼 실리적이고 자유로운 도시였다. 그만큼 루터와 칼뱅 등 신교도 사상을 받아들일 사상적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위그노들은 라 로셸을 중심으로 나바르왕국이나 영국, 스위스 등 신교도가 강세인 국가들과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었다. 거기에 낭트칙령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위그노의 자유도시가 되어 프랑스 왕조차 함부로 건들지 못할 정치적·종교적 세력으로 급부상했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위그노는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었기에 바다를 통해 신교도 국가들과 자유로이 무역에 종사하며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부를 축적했었다. 다시 말해 라 로셸을 중심으로 정치, 종교는 물론 경제적 자유까지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라 로셸과 위그노의 성세(盛世)는 오래가지 못했다.

앙리4세의 죽음 이후,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에서 벗어난 ‘구교도 루이13세’가 절대왕권을 강화해야 할 상황에서... 라 로셸과 위그노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라 로셸 포위전.

루이13세의 입장에서는 구교도를 핵심으로 한 절대왕권의 강화뿐만 아니라 대서양의 라 로셸에서 나오는 막대한 무역이득까지 취할 수 있는 필연적이며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 결과는 뻔했다. 

치욕적 패전 이후, 알레의 화의(Peace of Alais) 조건에 의해 위그노는 그들의 자유도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여러 특권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낭트칙령, 프랑스 왕의 자비(?)에 기댄 불완전한 신앙의 자유뿐이었다. 

아예 없었다면 모를까!

그때부터 위그노는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그때였다.

덜컥.

갑자기 문이 열리며 수하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급보를 전했다.

“헉헉, 시장님! 드디어 교회 첨탑을 올렸습니다. 영국 촌놈들보다 훨씬 높고 웅장하게 말입니다. 등대에 이어 교회까지, 저희가 모두 이겼습니다!”

쾅!

장 귀통은 책상을 내리치며 기쁨의 환성을 내질렀다.

“좋았어! 어차피 영국 촌놈들은 성공회, 청교도...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종교와 지역으로 나뉘어 한데 뭉치지 못한다. 한국 국왕폐하께 우리의 위엄을 보여드려야 해! 궁전부터 대학까지 더욱 세심하게... 그리고 명심해라!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수의 한국인, 그리고 한국 국왕폐하께서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는 수하를 내보낸 다음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기존 계획과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 국왕폐하께서는 왕비가 있으니 어렵겠지만 차기는 다르다. 다음 왕비는 무조건 위그노 교도, 우리의 자매여야만 해!’

...

같은 시각, 영국계 한국인 정착촌.

쾅!

존 스쿼드는 격분한 나머지 청교도답지 않게 욕설까지 내뱉었다.

“위그노 돼지새끼들! 또 뒤통수를... 이럴 거면 수도건설 청사진은 왜 만드는 건데? 청사진대로 만든 우리만 바보가 됐잖아!”

좌중의 분위기는 격앙되었다.

“이런 *새끼들! 당장 교회첨탑을 깨부숩시다.”

“흥! 내가 먼저 나서겠소.”

웅성웅성.

그때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나서서 화제를 전환했다.

“자자! 모두 진정하시오. 지금 위그노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 오늘 회합의 목적이 뭡니까? 한국 국왕이 곧 도착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더 늦어선 안돼요! 이미 호주에서 시민권 선서를 한 사람들도 있고, 우리 역시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의 말에 좌중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의 말마따나 ‘위그노의 도발’은 작은 일이었다.

지난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폴리머스(현대 보스턴 인근)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은 소위 ‘메이플라워 서약’을 체결하며 특히 ‘영국 왕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메이플라워 서약’을 또렷이 기억했다.

- 영국 왕에 충성을 다하며

-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기약하고

- 자치사회를 형성하여 질서와 안전을 도모하며

- 평등한 법률을 만들어 관제를 정한 다음, 여기에 종속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첫째 북아메리카 전역이 한국의 영토가 되었고, 둘째 영국 왕 찰스1세가 청교도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독실하고 완고한 청교도였던 ‘올리버 크롬웰’이 뜻밖에 매국노로 몰리면서 그의 동료였던 청교도 출신 의원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와 함께 영국 정치계에선 청교도들이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찰스1세의 대중적 인기와 권위가 올라갈수록, 영국 청교도들은 매국노로 매도되며 영국대중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는 찰스1세가 종교와 지역의 편 가르기에 청교도를 마녀사냥 식으로 이용한 결과였다.

좌중은 침통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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