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225)

지난 1627년 나는 ‘폐세자 이지’를 북아메리카 동부총독, 개노미를 수석부총독(사실상 총독)으로 임명한 후에 북아메리카 동부를 일임했었다.

개노미는 1627년 런던조약에 이어, 1628년 암스테르담조약까지... 런던공사 신준묵과 함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공(大功)을 세웠다.

그런데...

김자점이 끼어들면서 둘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나는 무척 난감했다.

‘역사는 내가 틀어버린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바로는, 김자점을 꺼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김자점은 나로 인해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이자 공신이 되었다. 그뿐인가?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에 이어 대륙횡단까지... 김자점의 공은 정말 대단했고, 그 만큼 그의 위세는 감히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김자점에 대한 의문이 들어 그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었다.

‘혹시 원 역사가 김자점이란 사람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실제 몇몇 보고에 따르면, 김자점은 무늬만 성리학자였다. 

풍수설을 신봉함은 물론이고 무녀(巫女)를 정식 처로 삼았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이었다면, 언제든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이유로 참수되었을 것이다.

또 보고에 따르면 이중인격자가 분명해 보였다. 

내가 조선을 장악하기 전, 김자점은 그 누구보다 조선의 신분제도를 알차게 이용했었다. 물론 아주 나쁜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재빠른 태세전환으로 신분제도 혁파를 부르짖었다. 그 결과, 한국인 대다수는 김자점을 신분제 혁파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았다.

김자점이 인조반정 당시 서인(西人) 정권의 핵심인물로 수많은 업적(?)을 세웠고, 그에 따라 적이 많다는 것 등등...

이를 종합하면... 김자점은 모략에 능한 인재이나 기회주의자이며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였다. 

역시 역사는 거짓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의 엇나감, 특히 매국이나 반역은 단연코 없었다. 특히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김자점의 충성심이었다.

‘개노미가 아무리 김자점과 대립한다고 해도... 내게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다.’

김자점의 충성심은 그 누구도 아닌 개노미가 보증한 것이다.

나의 생각은 다시 이어졌다.

‘대체 무슨 해석문제라는 거야? 내가 말실수라도 했던가? 용광로든 관용이든 일단 도착하고 들어보자. 개노미는 물론이고 김자점도 각자 생각한 바가 있겠지.’

이때 나는 꿈에도 몰랐다.

내가 평소 어설프게 꺼냈던 말이 가장 큰 문제였단 사실을.

동부에 부는 바람

1631년, 2월 1일, 북아메리카 어느 곳.

“음, 여기가 맞겠군.”

김자점은 울창한 원시림의 바깥 쪽, 오래 전 벼락에 맞은 듯 기이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무 아래에 멈추어 섰다.

이곳은 버지니아 동부해안가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온 지점, 북아메리카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애팔래치아산맥)의 한 기슭이었다.

주변 좌우는 북아메리카 동부의 전형적인 풍경으로, 한편에는 산맥을 따라 원시림이 이어지고 다른 편에는 거친 광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휘이잉.

문득 그의 얼굴에 산바람이 사정없이 스쳤다. 

“에취!”

봄이 다가오는 시기... 땅이 꽝꽝 얼 만큼 춥진 않았지만, 산속이었기에 찬바람이 제법 매웠다. 불을 피우면 좋겠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홀로 잠행 중이었다. 

김자점은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육포 한 조각을 씹었다. 그러다 외투를 들썩이며 허리춤을 살피는데, 그곳엔 작은 술병 2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가 술로 추위를 녹이리라 마음먹은 찰나, 오른편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자점은 씹던 육포를 급히 삼키고 외투를 다시 여몄다.

‘그일까?’

곧이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놀랍게도 유창한 영어였다. 

“그대가 김자점이오?”

게다가 상대는 인디언이었다. 

김자점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나요!”

...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른 지 한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육포를 씹고, 간혹 술잔을 들이킬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인디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흥! 아주 고약하군. 이렇게 불러놓고서 말이 없다니.”

다시 들어도 정말 유창한 영어였다.

“하하! 먼저 통성명부터 할까요? 나는 김자점, 한국인이오!”

인디언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오페칸카누(Opechancanough). 그대도 잘 알겠지만 영국에 ‘아버지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인디언 부족장이다.”

그와 함께 놀라운 역사의 장막이 걷혀졌다. 오페칸카누는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오래 전부터 오페칸카누의 인디언 부족은 영국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이라 부르던 곳에서 평화로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1607년에 104명의 영국인이 제임스타운에 도착하면서 오랜 평화가 깨졌다.

그때 인디언 부족 추장 포우하탄(Powhatan)은 오페칸카누의 친형이었다. 포우하탄은 영국인을 침략자로써 적대시하기 보다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교역을 늘려가게 되었고 친분도 쌓았다.

인디언과 영국이 가까워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포우하탄의 딸 포카혼타스(Pocahontas)와 영국인 존 롤프(John Rolfe)의 결혼이었다.

특히 존 롤프는 버지니아의 기후가 담배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담배사업을 통해 대박을 쳤다. 이로써 담배는 버지니아 부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담배사업의 성공은 영국인에게는 행운이었지만 인디언에게는 불행이었다. 담배는 토양의 영양분을 너무 빨리 고갈시켜 더 많은 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과 인디언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오페칸카누는 형 포우하탄과 그의 딸 포카혼타스가 죽자, 1622년 인디언 부족 연합을 이끌고 제임스타운을 기습했다. 

인디언 부족 연합은 갑작스런 기습과 이어진 제임스타운 대학살로 초기에 승세를 굳히는 듯 했으나, 총기 등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내륙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로써 버지니아 담배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런던 버지니아 회사까지 파산하게 되었다. 제임스타운의 안전보장은 물론이고 담배사업을 이어나갈 인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국 제임스1세는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 대한 특허장을 취소하고 버지니아를 왕령 식민지로 삼았다. 

이처럼 1624년 버지니아가 왕령식민지가 되고 곧이어 1627년 런던조약으로 한국에 할양된 것도... 어쩌면 오페칸카누의 공(?)이라 할 수 있었다.

꿀꺽꿀꺽.

김자점은 술을 병째 거칠게 들이키고서 말했다.

“후후,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한국은 영국과 다릅니다. 믿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우선 길을 내어 주시지요. 새로운 수도, 또 제임스타운과 연결되는 교역로를 먼저 잇고 산맥을 넘어 내륙까지 사통팔달하는 길을 뚫겠습니다. 그 길 위로는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움직일 것이고 결국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해줄 겁니다. 통행의 안전보장은 물론입니다. 둘째 한국과 정식으로 교역을 시작하시지요. 이 역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

“...”

서로의 문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생각해보고 사람을 보내 답변을 주겠다.”

그 말을 끝으로 오페칸카누는 자리를 떴다.

...

그날 해질녘, 김자점의 야영지.

타닥타닥.

김련은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님! 그가 우리를 믿을까요?”

김자점은 김련의 의문에 피식 웃으며 밝게 말했다.

“훗! 믿으면 좋고, 안 믿어도 그만이다.”

반면 김련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버님! 오페칸카누는 영국과 죽기로 싸운 전력이 있고, 내륙으로 밀려난 후에도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빈틈을 보아 다시 공격하곤 했습니다. 영국인들 말로도 성정이 잔혹하고 매사에 의심이 많다고 합니다. 그의 성정과 행적을 미루어보면... 가도멸괵지계(假道滅虢之計)에 쉽게 응하지는 않을 겁니다. 술수가 너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김자점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페칸카누가 우릴 믿건 말건... 가도멸괵지계에 반드시 응할 것이다. 사람은 참 단순해서, 자기가 성공했던 방식을 답습하거든. 그가 제임스타운을 무너뜨렸던 방식을 떠올려 보거라! 당시에도 총기에 의한 화력 열세가 확실하니 감히 영국에 대들 수 없었다. 영국에 자신의 땅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도 말이야. 그런 그가 절치부심하면서 세운 작전이 뭐였더냐? 바로 병불염사(兵不厭詐)! 적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다음에 뒤통수를 치는 것이지. 이것은 병가의 오랜 교훈이니라. 아니 세상사의 올바른 이치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인디언의 화력열세는 여전하다. 당연히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지. 게다가 한국인과 유럽인 등 이방인의 인구, 영역이 갈수록 증가가고 있다. 그 차이는 너무나 확연해! 그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갈수록 세력이 쪼그라들어 더 깊숙이 내륙으로 쫓겨날 터이니...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법. 더는 의심치 말아라!”

“아버님 그렇다면...”

“그래! 어차피 일어날 일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믿지 않는데 그가 우리를 믿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믿으면 믿는 대로,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철저히 대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김련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님! 과거의 적은 영국이었지만 최종적인 적은 결국 우립니다. 그도 이를 알게 될 것이고 그의 칼끝은 곧 우리를 향할 겁니다. 그냥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이...”

벌컥.

김자점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훗!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인디언들을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들로 구분한 다음... 그 성향별로 이합집산을 유도해야 한다. 순종하는 부족들은 품에 안으면 되고, 오페칸카누같은 반골(反骨)들은 이번 기회에 철저히 솎아내야지...”

...

같은 시각, 오페칸카누 부족 마을.

마을의 가장 큰 티피(Tepee, 원추형 천막) 안에서는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 놈도 영국 놈과 똑같은 침략자요!”

“내말이 그겁니다! 피부색과 얼굴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국도 이방인이고, 침략잡니다. 영국이 빼앗은 아버지의 땅을... 한국이 사들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 형제인 코노이, 델라웨어, 난티코크, 쇼니... 여러 부족들이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수도를 짓는다고 하면서 우리 형제들의 땅에 영국인과 프랑스인 정착촌을 세웠다니까요!”

“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수도 근처 시장에 다녀왔는데 서부에서 왔다는 인디언 형제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 서부 인디언 형제들을 전혀 핍박하지 않고 의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우대한다고 합니다. 또 멀리서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도록 도와주고, 말과 소 등 가축도 제공한답니다. 서부 인디언 형제들의 말이 진짜 사실인지 사람을 보내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닥치시오! 그것은 우릴 현혹하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하오.”

“뭐, 얄팍한 술수? 적과 싸우기 전부터 눈을 가리고 있는 건 그쪽 아닙니까? 한국이 진짜 호의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부터 하자는 겁니다. 적의 세력이 얼마인지, 적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과거 우리는 수백에 불과한 영국인도 몰아내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내륙으로 쫓겨났습니다. 싸우더라도 제대로 알아보고 싸워야 합니다. 에잇!”

웅성웅성.

오페칸카누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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