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225)

막시밀리안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황제의 의도는 아주 간단했다. 

‘모든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에 집중하시려는 것이군. 아니 오직 프랑스만을 상대로 전쟁을 하시겠다는 의미다. 참! 그런데... 종교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폐하의 위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자존심을 버린다는 의미인데? 그 정도로 프랑스가 눈엣가시라는...’ 

이내 결론이 났다. 

외교의 천재인 막시밀리안은 황제의 내심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 무례를 무릅쓰고라도... 

“폐하!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와의 개전 시기는 언제쯤 생각하십니까? 그래야 협상의 속도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끝나자 페르디난트 2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막시밀리안이 그의 의도를 정확히 읽었으니까. 

“첫째 시점은 평화협상이 끝났을 때, 둘째 만약 평화협상이 끝날 때까지 여유가 없다면 네덜란드와 영국이 우리 편으로 참전이 가능할 때, 셋째 이도 저도 아니라면 프랑스가 스페인에 진입했을 때다. 나머지는... 일임한다.” 

“네, 폐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만세!” 

페르디난트 2세는 막시밀리안이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를 갈았다. 

뿌드득.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리라! 프랑스 네 이놈... 감히...’ 

그의 눈빛은 갈수록 스산해졌다.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총독의 집무실. 

“이거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의 의문은 지극히 타당했다. 

물론 유럽의 종교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지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도 1년 넘게 마찬가지였다. 

사실상의 정전(停戰)상태. 그 이유는 뻔했다. 

그러나 여기에 오직 ‘돈 문제’만 결부된 것이 아니기에 의문이 생긴 것이었다. 내면의 실질이야 ‘돈’이지만, 외면의 ‘위신(威信, 위엄과 신망)’도 너무나 중요한 요소였다. 

네덜란드가 어떤 땅인가? 

‘북부 네덜란드 공화국’뿐만 아니라 ‘남부 네덜란드’까지... 스페인 이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법한 영지로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왔다. 

그런 네덜란드에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고서 ‘완전한 독립’을 허용한다는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것이다. 

‘어떤 귀족도 자기 영지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하물며 저 오만한 합스부르크가?’ 

프레데릭 헨드릭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말 자존심 빼면 시체였으니까. 

“총독각하! 정말 믿을만한 소식통이라니까요?” 

에른스트 카시미르, 네덜란드의 나사우디츠 백작이 강하게 주장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그런 거 아닙니까? 신성로마제국의 소식통만 있었으면 저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스페인의 왕위계승이 위태로워졌습니다. 만약 남성 후계가 끊어지면 스페인의 왕위계승법에 따라 프랑스가 어부지리를 얻는 겁니다. 스페인과 프랑스에도 교차검증했습니다. 빈에서 도착한 따끈따끈한 소식과 함께 말입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침음했다. 

“흐음, 그래서 종교전쟁을 끝내고 스페인 왕위계승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의미인가? 그러기엔 힘이 모자랄 텐데... 신성로마제국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 

“각하! 그래서 종교전쟁을 끝내고 타국에 손을 내밀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저희한테요.” 

쿵! 

프레데릭 헨드릭에게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의 훼방과 프랑스의 견제 때문에 남부 네덜란드를 통일하지 못했는데... 정말 그렇다면 엄청난 기회다!’ 

남부 네덜란드는 남부 왈론족의 존재가 문제였다. 역사적으로 국경, 정치, 언어뿐만 아니라 종교까지 너무나 프랑스와 밀접했다. 

다시 말해, 남부 네덜란드를 진정 하나로 통일시키려면 두 가지 선결조건이 있었다. 

첫째,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남부 네덜란드 포기. 

둘째, 프랑스의 양해와 허락. 

이 두 가지 조건은 전쟁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남부 네덜란드 통일! 

네덜란드가 한국이 주도한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에 가입한 이유였다. 

프레데릭 헨드릭의 생각은 쭉 이어졌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고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편에 서서 프랑스와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전리품으로 남부 네덜란드를 받으면 되니까 말이야.’ 

그때였다. 

수하가 들어와 말을 전했다. 

“각하! 신성로마제국의 사절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어떡할까요?” 

“뭐, 신성로마제국 사절이? 어서 들여라!”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어느 곳, 유대가문들이 은밀하게 모였다. 

그들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리 무척 심각했다. 

베어링 가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 정보를 취합해 봤을 때, 유럽의 전쟁이 모두 끝나가는 수순입니다. 음... 좋지 않아요. 전쟁이 오래갈수록 우리에겐 이익인데 말입니다. 특히 네덜란드 전쟁이 끝난다니! 정말 뼈아프군요.” 

리카도 가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동감입니다. 네덜란드의 독립이야 저희도 지지하는 바지만, 전쟁은 계속되어야 하는데... 쯧쯧, 그나마 북부만 독립하는 것이 다행이긴 하군요. 네덜란드의 완전한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남부 네덜란드는 그대로 잔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때 호프 가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최근 극비리에 들어온 소식통에 의하면 한국이 제노바와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군수물자를 실은 배가 제노바에 정박했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더 믿기지 않는 것은... 한국이 스페인의 부채를 전액 지불보증 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그 말에 베어링 가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헛소문일 겁니다. 스페인의 부채는 6천만 굴덴이 넘는 거액입니다. 우리도 단 번에 제공할 수 없어요. 자자, 그런 거 말고 전쟁이 끝나면 어찌할지 논의를 해봅시다.” 

리카도 가문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아마 스페인의 왕위계승문제가 곧 불거질 겁니다. 유럽에 이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을 날름 삼킨 이야기를요! 광녀(狂女) 후아나를 필리프 대공(펠리페1세)이 미남계로 구워삶은 그거 말입니다. 하하! 이번에는 프랑스 부르봉이 삼키겠지요. 합스부르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을 겁니다. 스페인 왕위계승법은 차치하더라도 돈줄이 말랐는데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베어링 가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호프 가문의 말은 달랐다. 

“글세, 제가 보기엔 좀 다릅니다. 합스부르크가 양보하면 충분히 세를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독일 영토를 포기하면 되니까요. 독일 제국(諸國)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각자 숨통을 틔워주면 될 듯합니다. 그 다음에 그 세를 모아 프랑스를 압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참! 돈이 부족한 것은 좀 어렵겠군요.” 

“...” 

“...” 

리카도 가문과 베어링 가문은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결국 호프 가문의 어색한 말로 자리가 정리됐다. 

“하하! 제 상상이 너무 과했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저도 그냥 꺼내 본 말이니까요.” 

유대 가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파했다. 

** 

같은 시각, 스페인 궁정. 

호국경의 집무실. 

“크하핫! 역시 한국이야.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 

알바 공작은 미친 듯이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의 손에는 한국이 스페인의 부채를 전액 감당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밀서가 들려있었다.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결하고, 아메리카의 병사들까지 무사히 귀환한다면... 나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을 것이다. 재정적자는 의회에서도 그냥 채무불이행하자고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아주 잘됐군. 서인도제도와 세인트 어거스틴(현대 플로리다)은 어차피 넘겨주려고 했으니 말이야. 재정적자 해결을 기화로 합스부르크의 과오를 더욱 또렷이 알리는 효과가 있겠어. 흐흐...’ 

알바 공작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한국 런던공사에게서 들은 조조(曹操)는 정말 대단한 존재였다. 

한나라 헌제를 꼭두각시로 삼아 제후들의 거센 도전을 물리쳤고, 결국 천하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괜히 펠리페4세와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를 죽여서 욕먹을 필요가 없어.’ 

알바 공작의 책상에는 새로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이름이 새겨진 임명장과 명령서가 가득했다. 

이는 ‘조조’가 적대적인 제후들을 통제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후후, 이름뿐인 작위를 주는 것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반대하는 놈들을 제거하는 것에 내 손을 쓸 필요도 없어.’ 

런던공사의 말을 듣기 전만해도, 펠리페4세와 그의 가족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반대하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 돌아올 결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충신인 척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고...’ 

알바 공작은 피식거리며 다시 런던공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각하! 프랑스와의 전쟁은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 그건 무슨 말이오? 

- 하하! 각하께서도 이미 생각해놓으셨을 겁니다. 그건... 

- 정말이오? 진짜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 걱정하지 않고 한국 편에 서리다! 

- 각하께서는 그저 중립만 지키시면 됩니다. 만약 한국 편에 서는 모습을 보이시면 곤란합니다. 아메리카 상실로 가뜩이나 여론이... 

- 그럼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싸우도록 분위기만 조장하면 된다... 이 말이군? 싸움을 붙이고 흥정도 말리는... 그런 식으로... 

- 네 각하! 너무 정확합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죽도록 싸워야 하니까요. 예를 들면, ‘스페인의 왕위계승은 오직 스페인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살리카 법’은 스페인의 왕위계승법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의회에서 결의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신성로마제국이 각하께 애걸복걸할 겁니다. 반대로 프랑스는 아주 흡족해 하겠지요. 

런던공사의 말은 핵심을 찔렀다. 

- 스페인은 스페인의 방식대로... 

알바 공작은, 그 말에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를 몰아내는 것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상잔해서 기진맥진했을 때가 적당한 시기다. 스페인은 스페인의 방식대로 왕을 결정해야 한다. 의회가 광녀 후아나를 카스티야 왕으로 인정하고, 합스부르크 필리프 대공을 펠리페1세로 인정했던 것처럼... 나도 의회를 통해서 왕이 되면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닌 알바 왕가로 말이야!’ 

그의 생각은 쭉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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