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225)

암브로조는 찻잔을 들이키고는 다시 타일렀다. 

“아들아! 우리가 한국과 손을 잡지 않으면 그대로 먹힌다. 아마 피렌체의 먹잇감이 되어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귀속되겠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뜻이다. 스페인이 군대를 보내주지 못하면 프랑스 군대를 어찌 막느냐? 또, 6천만 굴덴을 받지 못하면 파산을 어찌 막느냐?” 

죠반니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것은...” 

“떽!” 

암브로조는 노호성(怒呼聲)을 내지르며 죠반니의 말문을 막았다. 

“멍청한 놈! 저 합스부르크 왕가가... 우리가 돈을 댄다고 해서 전쟁을 하고, 돈을 대지 않는다고 전쟁을 하지 않을 것 같으냐? 왕과 귀족들의 역린이 뭔지 모르고 말하는 게야? 정말 한심하구나! 너무 한심해!” 

그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쯧쯧, 그건 제노바의 운명을 건 결단이었다. 우리 제노바는 지중해 무역업이 쇠퇴하자 금융업에서 희망을 찾았었다. 그러기 위해선 돈을 굴릴 대상, 다시 말해 숙주가 필요하지. 그래! 스페인은 우리 금융업의 숙주였다. 그런데 숙주가 죽으면 우리도 죽어! 이제 숙주를 바꿀 때야. 새로운 숙주, 한국이 원하는 것은 간단명료하다! 한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6천만 굴덴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무역업에 우리도 동승할 수 있다. 제노바가 기존 금융업 일변도의 구조에서 무역업을 아우를 수 있다는 의미지. 이는 단순한 업종다변화가 아니다. 과거 지중해 무역의 영광을 후대가 다시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죠반니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암브로조는 분노를 삭이고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보다 융성한 도리아 가문, 더욱 밝은 제노바를 너에게 물려주려 함이다. 제노바 은행가의 여론은 이미 굳어졌다. 프랑스는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유대인들에게서 자금을 조달한다. 전비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반면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은 아메리카의 금은보화가 말라버린 이상, 프랑스에 맞설 수 없다. 신성로마제국의 패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지. 하지만 우리가 지원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신성로마제국에 필요한 전비는 최소 2천만 굴덴에서 최대 4천만 굴덴으로 추산되니까... 우리 입장에서도 한국의 지불보증이 있으니 그 선을 유지하면서 적당히 뽑아 먹으면 돼! 전쟁물자를 한국산으로 보급하면서 그 차익을 나눠 먹으면 되니까. 결국 전쟁으로 돈을 버는 건, 한국과 우리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적 목적도 달성하는 셈이고...” 

... 

같은 시각, 스피놀라 가문. 

“형님! 또 떠나시려는 겁니까?” 

암브로시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심 끝에 결단했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상, 신성로마제국에서 새로 용병단을 조직하기로 말이다. 곧 왕위계승전쟁이 터질 것이고, 그 전쟁특수를 톡톡히 누리려는 속셈이었다. 

도리아 가문에 밀려 금융업을 버리고 용병업에 투신한 그였다. 이번 왕위계승전쟁은 실질적 물주가 한국이니까 더 큰 이득이 보장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한국 군수물자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었다. 

- [한국-제노바 기본협약] 제노바 은행은 한국의 지불보증을 받아 신성로마제국 측에 전쟁자금을 지원하고, 한국은 제노바 은행의 알선으로 군수물자 보급을 전담한다. (후략) 

스페인이 용병급료를 차일피일 미루던 것과 달리, 이번 왕위계승전쟁은 용병급료가 밀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군수물자 공급도 한국이 맡을 예정이었다.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던 암브로시오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의 진정한 의도는 유럽의 분열이다. 전쟁은 쉽게 종결되지 않아. 아마 한국이 원하는 시점에 종결되겠지. 그 전까지는 불승불패(不勝不敗)의 국면이 계속될 것이다. 용병업과 무기중개업이 활황이겠어. 여기에 가문의 부흥을 건다.’ 

암브로시오는 동생 페데리코에게 말했다. 

“매번 무거운 짐을 지워서 미안하다. 장남으로써 네 얼굴을 볼 수 없구나! 내가 부탁한 것을 알아보고 연락주거라. 부탁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한국도 형님의 군사적 역량을 곧 알게 될 것이고,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겁니다.” 

“하하! 내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는구나. 말이라도 고맙다. 정말 그랬다면... 그때 브레다 함락에 이어 네덜란드 공화국 자체를 멸망시켰겠지...” 

놀랍게도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의 말, 그대로였다. 

1602년 스페인과 용병계약을 체결한 이후, 그의 군사적 재능은 네덜란드를 정말 벼랑 끝까지 밀어붙였으니까. 스페인 지휘관의 무한 삽질과 고질적인 재정부족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결과를 몰랐으리라! 

잠시 후. 

암브로시오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제노바와 스피놀라 가문의 운명이 걸린 한판 승부다. 절대 소홀히 하지 말거라!” 

** 

1631년 1월 15일, 신성로마제국 수도 빈. 

페르디난트 2세의 집무실. 

“으음,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탄식했다. 

그의 격분은 잠시였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신중히 검토해 본 결과, 고질적인 재정부족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아메리카 상실이 정말 뼈아프군.’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통치자였던 ‘카를 5세’ 이래... 아메리카의 금은보화는 두 나라의 화수분이었다. 

카를 5세가 친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물려주고 나서도, 스페인의 재정지원은 끊기지 않았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네덜란드로 향하는 스페인 로드(Spain Road)의 유지, 네덜란드 독립전쟁, 프랑스와의 영토분쟁 등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은 영원한 동맹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였다. 

그런데... 

문제는 재정뿐만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가의 살리카 법’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위계승 관습법’도 큰 문제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정말 난감했다. 

‘절대로, 스페인을 부르봉 왕가에 빼앗길 순 없다. 그러려면 스페인 왕위계승에 [살리카 법]을 주장해야 하는데...’ 

그의 선조인 합스부르크 ‘필리프 대공’, 다시 말해 ‘펠리페 1세’는 광녀(狂女) 후아나와 혼인하면서 그 후손이 스페인을 넘겨받았다. 

만약 스페인이 살리카 법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어지는 나라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살리카 법은 ‘여성의 왕위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였으니까. 

광녀 후아나의 경우, 스페인이 살리카 법을 따랐다면 여자인 후아나는 여성으로써 왕위를 얻을 수 없었다. 당연히 후아나와 펠리페1세의 아들도 스페인 왕위계승이 불가능했다. 

결론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이 ‘살리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에 직면했다. 

스페인이 ‘살리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서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빼앗길 상황이었다. 

프랑스 루이13세의 왕비인 ‘안 도트리슈’는 펠리페3세의 적통 딸이고, 신성로마제국 황태자비인 ‘마리아 안나’의 손위 자매였으니까. 

이는 광녀 후아나가 카스티야와 레온 연합왕국을 물려받은 이유와 같았다. 

페르디난트 2세는 절망했다. 

‘스페인을 살리카 법의 적용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얼굴에 철판을 깔면 된다. 그런데 돈이 없다. 돈이...’ 

그때였다. 

“폐하! 제노바 사절이 폐하께 접견을 요청했습니다.”

유럽30년전쟁 : 평화협상의 시작

1631년 1월 20일, 신성로마제국 수도 빈. 

페르디난트 2세의 집무실. 

“막시밀리안을 불러들여라!” 

페르디난트 2세는 종교전쟁을 끝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굳은 얼굴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이 역력했다. 

‘그래 내가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도... 나여야 하겠지!’ 

지난 1617년 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한 후 벌어진 일이었다. 보헤미아는 동군연합국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법한 영지였다. 

그가 즉위한 후, 구교도 신앙을 강요하자 신교도가 대부분이었던 보헤미아 귀족들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처음에는 종교적 갈등으로 일어난 국지적 분쟁으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독일 영토’에 눈독을 들이던 덴마크, 스웨덴 등이 순차적으로 참전하면서 대규모 국제전 양상으로 변질·확대되었다. 스페인이 먼저 시작한 네덜란드 독립전쟁도 확전 일로였다. 

무려 14년 간, 유럽 전역은 전쟁터였다. 

‘내가 너무 순진했어...’ 

페르디난트 2세는 눈을 감았다. 

과거 구교도 신앙으로 뜨거웠던 그의 심장은, 점차 열기를 잃더니 이내 차게 식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종교전쟁의 외면과 달리 내면의 실질은 영토에 대한 야욕이었으니까. 그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십자군 전쟁의 본질도 이랬을까?’ 

후회막급이었다. 

그때였다. 

“폐하! ‘막시밀리안 폰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백작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오! 어서 들라 하라.” 

... 

잠시 후. 

막시밀리안은 경악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폐, 폐하! 지...진심이십니까?” 

반면 페르디난트 2세는 아무 변화 없이 담담했다. 

“아까 말한 그대로라네! 이젠 전쟁을 끝내야겠어. 프랑스가 아직 참전하지 않은, 지금이 전쟁을 끝낼 적기다. 시간을 더 끌다간 프랑스가 참전할 것이야. 프랑스가 원하는 땅은 알자스와 로렌이니 전쟁이 더욱 확대되겠지. 평화협상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더 많은 땅을 잃을 수 있다. 어서 진행해! 나의 결심은 확고하니까 의심치 말라!” 

“폐하! 결심이 확고하시다면,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대략적인 선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막시밀리안의 질문은 그의 협상권한 및 지위가 ‘신성로마제국의 전권대사’인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만약 ‘양보할 수 있는 선’의 결정권이 황제에게 있다면 얼굴마담처럼 ‘들러리’일뿐이니까. 그 ‘선’은 종교와 영토를 포괄했다. 

막시밀리안의 머릿속은 팽글팽글 돌아갔다. 황제의 답변에 좌우되겠지만 대략적인 예상치가 있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의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유럽에 종교의 자유를 전면 허용한다! 영토는 프랑스 내의 3개 주교령(메스, 투르 베르됭)과 알자스·로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임하겠다.” 

우르릉 쾅! 

마치 귓전에, 천둥벼락이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폐, 폐하! 제가 잘못들은 건.... 신교를 전면 허용하신다는 말씀이... 진정이십니까?” 

페르디난트 2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 다 양보해도 좋다! 오직 프랑스만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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