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25)

... 

‘살리카 법’은 과거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의 법전에서 시작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북이탈리아를 아우른 제국이었고 거기에 기원을 둔 유럽 국가들은 살리카 법에 의해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 

물론 유럽 국가라도 그 기원이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이 살리카 법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반면 합스부르크나 부르봉 왕가는 살리카 법에 의해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1580년,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2세는 포르투갈의 왕통이 끊어지자 그의 어머니가 포르투갈 왕족인 것을 이유로 포르투갈 왕위까지 거머쥐었다. 

이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가능했었다. 살리카 법은 ‘여성의 왕위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였으니까. 

같은 논리로... 

스페인 왕위는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만약 남성 후계자인 펠리페4세와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사망한다면, 펠리페3세의 두 딸에게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펠리페3세의 두 딸은 안 도트리슈(프랑스 왕비)와 마리아 안나(페르디난트 3세의 아내이자 신성로마제국 황태자비)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황태자 페르디난트 3세와 황태자비 마리아 안나를 기다리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종교적 신념으로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저버릴 순 없다. 카를로스는 겨우 한 살, 언제 요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내 모든 것을 걸고 합스부르크를 지켜 내리라!” 

** 

같은 시각, 영국 런던. 

런던공사의 집무실. 

“그래, 뭐가 그리 궁금한가?” 

런던공사 신준묵이 수하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하던 수하였으니까. 

수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공사님께서 폐하께 허락받지 않으시고 이탈리아 은행에 지불보증을 약속하셔서 그렇습니다. 분명 엄한 문책이 있을 것입니다.” 

신준묵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폐하께서는 유럽의 합종연횡에 관한 모든 것을 내게 일임하셨다. 종교전쟁 이상의 더 좋은 수가 생겼는데... 그걸 버릴 순 없는 것이다. 그까짓 돈이 대수냐?” 

수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스페인이 진 빚, 그 원금만 6천만 굴덴입니다. 이자까지 포함하면 매년 1천만 굴덴씩 12년간 지불해야 하는 돈입니다. 아무리 관대하신 폐하께서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실 겁니다. 항상 돈에 민감하셨던 분 아닙니까?” 

신준묵은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 

“내가 보기엔 겨우 6천만 굴덴, 겨우 매년 1천만 굴덴으로... 무척 하찮게 느껴지는구나! 그 돈이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 밑천이다. 아까워 할 필요가 없어. 폐하께서도 흔쾌히 용인하실 터!” 

“그, 그래도...” 

“어허! 잘 생각해 보아라. 스페인이 몰락하면서 유럽의 종교전쟁은 끝난 것이다. 그건 합스부르크의 한쪽 팔이 잘린 것이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양면 포위를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다. 거기에 스페인을 프랑스에 넘겨준다? 그건 유럽 전체를 프랑스에 헌납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어. 내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극약처방을 하는 이유다. 돈이 없는데 어찌 싸우겠느냐? 겨우 그 돈으로 유럽 곳곳에 싸움을 붙이고, 우리는 북아메리카를 손에 넣을 시간을 벌 수 있다. 무엇이 이득이더냐?” 

“저는 단지, 공사님께서 해를 입을까 염려되어서...” 

신준묵은 다시 수하를 위로하며 말했다. 그의 충심을 아는 까닭이었다. 

“정말 고맙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이런 모략은 폐하께서도 항상 즐기시는 바이니...”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스페인 알바 공작의 뒤통수를 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작가 주] 

합스부르크 왕가는 원칙적으로 ‘살리카 법’에 의해 왕위 계승이 이루어집니다. 반면 스페인의 경우는 살리카 법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는 살리카 법의 적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사망(사실 대항해시대 1살짜리가 요절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했으니까요!)하는 경우, 스페인의 왕위는 손위 자매인 안 도트리슈에게 넘어갑니다. 당연히 부르봉 왕가인 루이13세와 펠리페3세의 딸인 안 도트리슈의 자녀가 스페인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연재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를 확인해야 이번 연재가 수월하게 이해가 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탈리아 제노바의 선택

1631년 1월 12일, 이탈리아 제노바. 

“정말 오랜만이군.”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그의 두 눈에 고향 제노바를 담았다. 갑작스런 가문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스페인에 기댄, 구교도 용병단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였다. 

그의 눈부신 활약은 스페인의 영광이자 네덜란드의 악몽이었다. 당연히 펠리페4세는 그를 총애했고, 한때 네덜란드 전장의 지휘를 일임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급변(急變)에 유럽의 모든 전장이 그대로 멈춰 섰다. 

멈춰 선 이유는 뻔했다. 

용병단장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이 지급해야 할 용병급료가 그때부터 차일피일 미루어졌으니... 바로 ‘돈’ 문제였다. 

전장(戰場)은 용병의 일터. 

그의 용병단 역시 1년 넘게 휴업상태를 유지하다,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그때 가문에서 도착한 편지가 그를 제노바로 이끌었다. 

덜컹. 

히잉. 

“음... 어찌 이렇게...” 

그의 눈에 비친 제노바 항구는 전에 없이 한적했다. 텅 빈 조선소 선거(船渠) 역시, 제노바의 막막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년 넘게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며 양분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이슬람 세력과의 밀실담합과 독점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대항해시대의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쇠망(衰亡)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또 독점에서 경쟁으로. 

무역의 중심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뀌고, 지나친 독점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시장의 욕망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결국 제노바는, 생존을 위해 스페인의 손을 잡았다. 아니, 사실상 스페인의 보호국이 되었다. 

다른 이탈리아 제국(諸國)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혼인동맹을 맺었고, 이탈리아 동부 베네치아는 스페인과 프랑스 모두에게 손을 뻗었다. 

무려 천년의 세월. 

이탈리아 각국이 천년동안 쌓아온 막대한 자본을 이용해 금융업으로의 대전환을 꾀한 것이다. 

특히 제노바의 선택은 탁월했었다. 

스페인이 패권국이 되자 그에 따라 달콤한 과실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거기에 구교도란 종교적 동질성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스페인 쇠망의 직격탄을 맞았다. 

제노바 항구는 텅 비었고, 거리는 활기를 잃었다. 

... 

해질녘, 스피놀라 가문. 

“이게 얼마 만이냐?” 

환영인사는 잠깐이었다. 곧 저녁식사를 마치고 머리를 맞댔다. 

쾅! 

“뭐! 도리아 가문하고?”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격분했다. 

스피놀라 가문의 장남으로써 도리아 가문과의 연합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제노바는 사실상 스페인의 보호국이었지만,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스페인의 재정을 좌지우지했다. 그 정도로 제노바의 금융업은 빼어났고, 스피놀라 가문도 금융업으로 융성했었다. 

하지만 오랜 경쟁관계, 아니 오랜 원수인 도리아 가문과의 소송에서 패배하고는 뼈아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스피놀라 가문의 장남인 그가 금융업이 아닌 용병업에서 가문의 명운을 건 것도 도리아 가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인 페데리코 스피놀라의 태도는 완강했다. 

“형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원수, 아니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고 하신 말씀! 잊었습니까? 예전의 형님이 맞느냐는 말입니다.” 

암브로시오는 입을 굳게 닫았다. 

페데리코의 말은 계속되었다. 

“스페인의 패망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호주로 출발했던 무적함대는 생사조차 알 수 없을 정도구요. 아마 패전이 확실할 겁니다. 그런 스페인이 제노바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또, 아메리카를 상실한 이상... 그동안 빚진 막대한 부채를 상환할 수 있겠습니까? 도리아 가문이 저희에게 손을 내민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 

“형님! 이제 한국이 아메리카의 은을 독차지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구요! 한국이 스페인의 재정부채를 지불보증해준 이상, 우리는 한국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도리아 가문뿐만이 아니에요. 제노바 전체가 들끓고 있습니다. 6천만 굴덴을 고스란히 떼이면 저희는 전부 파산입니다. 형님께서는 가문의 멸망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가문의 장자로써!” 

“...” 

결국 암브로시오는 하릴없이 고개를 떨궜다. 

다음 날, 제노바 은행연합은 도리아 가문을 주축으로 한국과의 지불보증 협약에 정식 합의했다. 덧붙여 한국의 무역업에 협력하기로 추가 논의를 이어갔다. 

... 

저녁 무렵, 도리아 가문. 

“후후, 의리와 종교가 대수냐? 이슬람과도 손을 잡았던 우리다!” 

‘암브로조 도리아’는 도리아 가문의 가주이자 제노바의 도제(Doge, 최고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아들 ‘죠반니’에게 차갑게 비웃으며 힐난했다. 그깟 종교와 의리를, 도리아 가문과 제노바의 명운에 견주냐고 말이다. 

죠반니는 그저 침묵했다. 

암브로조의 힐난은 계속 이어졌다. 

“너는 내 뒤를 이어 가주가 되고, 또 도제가 되어야해! 그런 멍청한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아라.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을 필두로 프랑스와 손을 잡았어. 베네치아는 여기저기 빌붙는 박쥐같은 놈들이라 더욱 믿을 수 없고...” 

“...”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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