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25)

‘당분간 직접적인 전쟁 개입은 안 된다. 절대 스페인의 전철을 밟아선 안 돼. 최소 5년, 아니 10년은 북아메리카 통합에 힘써야 한다. 그 사이에 유럽은 계속 분열되어야 한다... 특히 스페인을 매개로 해서 말이야.’ 

북아메리카를 완전히 손에 넣기 전까지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형국이었다. 

쓱쓱. 

나는 여러 곳에 보낼 밀서를 쓰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 추기경의 집무실. 

“하하!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군. 두 분 모두 고국 프랑스를 잊지 않으셨어.” 

리슐리외 추기경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영국의 왕비 ‘앙리에타 마리’는 루이 13세의 친누이동생이고 스페인의 왕비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도 마찬가지로 친누이였다. 

앙리에타 마리는 몇 달 전에 밀서를 보내왔다. 

“흥! 비열한 영국 놈들, 또 뒤통수군. 수년 간 위그노를 지원하면서도 시치미를 떼더니... 이번에도 스페인과 손을 잡아? 주변 정리만 끝나면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사실 앙리에타 마리의 밀서만 해도 크게 기꺼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기쁜 소식은 스페인에서 도착했다. 

“크하핫! 알바공작이 귀족들과 함께 마드리드(스페인의 수도)로 출발했다고?” 

“네 각하! 톨레도(알바공작의 영지)에서 귀족들과 합세했는데 군세만 2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수하의 보고에 너무 기뻐서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그는 확인 차원에서 다시 물었다. 

“펠리페4세는?” 

“마드리드는 고요합니다. 펠리페4세의 생사여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빙긋 웃었다. 

스페인은 침몰하는 배, 또는 불타는 집과 같았다. 펠리페4세의 죽음은 시기가 문제일 뿐 확정적이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얼마 전, 루이 13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추기경! 당장 카탈루냐부터 치는 것이 어떤가? 스페인은 빈집이나 다름없으니... 

- 폐하! 지금은 내부 결속이 더 중요합니다. 우선 메스, 투르, 베르됭과 알자스까지 소화해야 합니다. 물론 스페인에 개입할 여력은 충분합니다만... 

- 음, 또 명분인가? 

- 폐하! 스페인에 개입하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상속자이니까요. 저희가 먼저 건드리면 유럽 전부와 싸워야 합니다. 

- 그런데, 알바공작이 가장 유력한가? 

- 그렇습니다, 폐하! 알바공작처럼 좋은 칼이 있는데 어찌 쓰지 않겠습니까? 괜히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습니다. 

- 알바공작이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루이13세의 친누이)까지 죽일까? 

- 제 생각엔 반드시 그래야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스페인의 왕위를 주장하실 수 있으니까요. 

바로 그랬다. 

루이13세는 1615년 스페인의 전대 왕 펠리페3세의 장녀 안 도트리슈(오스트리아의 안)와 혼인했다. 

스페인의 전대 왕은 펠리페3세였고, 장성한 아들은 펠리페4세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딸이었다. 또한 딸 중에 안 도트리슈가 장녀, 여동생 마리아 안나는 이종사촌인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3세와 결혼했다. 

다시 말해, 펠리페4세가 사망하고 카를로스까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면... 루이13세와 안 도트리슈의 자녀가 스페인을 상속할 수 있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3세와 기타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루이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힘이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이왕이면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루이13세의 친누이)를 깔끔하게 죽여줬으면 좋겠군. 다른 변수가 없게 말이야!’ 

리슐리외 추기경은 또 다른 가능성 높은 변수들을 떠올렸다. 

예를 들면, 알바공작이 섭정에 올라 카를로스를 허수아비로 만든다거나 하는 등의 경우를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의 수에서도...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는 반드시 죽어야했다. 그것이야말로 리슐리외 추기경이 생각하는 엘리자베트의 애국이며 낭보였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사명은 프랑스를 유럽 최강대국으로 올려놓는 것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유럽 최강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려야 했다. 

‘스페인이 무너지면 종교전쟁도 곧 끝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독일을 분열시키고, 스페인을 프랑스의 세력으로 편입시키면... 나의 사명도 끝난다. 대프랑스제국 만세!’ 

리슐리외 추기경의 뜨거운 외침은 그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 

같은 시각, 조선 한양. 

인정전(仁政殿). 

조선부왕은 남의 일인 듯 침묵했고, 수상 이원익은 거듭 외쳤다. 

“자자, 모두 정숙하세요!” 

웅성웅성. 

이원익의 노력에도 술렁임은 여전했다. 지난주에 도착한 천도 소식 때문이었다. 

스페인과의 전쟁, 그 빛나는 승리의 환희도 사그라졌다. 그만큼 천도의 후폭풍은 거셌다. 

조선 내각도 국왕의 북아메리카 천도는 익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제2차 채금열풍(골드러시)을 타고 서부를 다녀온 자들이 입을 모아 외쳤으니까. 

- 북아메리카 서부는 그야말로 황금의 땅이다! 

- 자연환경도 좋고, 넓은 땅이 그냥 널려있다. 

그러나 서부가 아닌 동부는 예상 밖이었다. 

‘북아메리카 동부는 멀어도 너무 멀다. 혹시 폐하께서... 조선을 빈 땅으로 두시거나 홀대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군. 폐하께서 나고 자란 곳은 이 조선이다. 조선의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염두에 두셨어야 하는데...’ 

이원익과 내각의 우려는 이처럼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지난주 내내 격론이 오갔고, 국론이 분열됐다. 조선 전역은 극도로 어수선했다. 

부수상 박승종이 너무 답답해서 조선부왕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조선부왕은 딱 한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 태자(太子)! 

박승종이 의아해서 되물었지만 조선부왕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원익은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그때 밖에서 비서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서울에서 폐하의 칙령이 도착했습니다.” 

“어서 들라 하게!” 

잠시 후. 

국왕의 칙령은 여러 개였다. 그러나 맨 처음 울려 퍼진 것은 다음과 같았다. 

[짐의 공식 칭호 맨 앞은 영원히 ‘조선’이다. 그건 태자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시작은 조선이며 조선의 지위는 가장 특별하다. 짐은 조선에서 태어났고 가장 먼저 조선의 말을 배웠다. 태자 역시 나와 같다. 앞으로 짐의 뒤를 이을 계승자는 마땅히 조선의 태자여야만 한다. 짐은 태자에게 조선의 말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짐은 거듭 밝힌다. 

인간은, 국가는, 문명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소멸한다. 이는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리라! 그러나 필멸의 운명을 벗어나고자 용감하게 나아가는 자에게 그를 인도하는 빛이 있을 것이다. 

서방의 대제국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는 지중해 진출에만 500년을 절치부심했다. 또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내내 착실하게 길을 닦으며 싸웠다. 그렇게 닦은 길이 로마를 잇고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조선 역시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길이 필요하다. 

사람과 물자를 유통시켜 조선을 넘어 호주로, 다시 북아메리카를 넘어 유럽으로 가야 한다. 조선을 시작으로 호주, 북아메리카까지 사통팔달하는 경제와 생활공동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짐이 생각하는 그 길은 바다에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삼면의 바다에 속절없이 갇혀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바다야말로 세계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조선의 아들딸들아! 

인식의 한계를 깨어다오. 

앞으로 모든 길은 바다로, 또 조선으로 통할 것이다. 세상 모든 길이 조선에서 시작되어 조선으로 끝날 것인데 어찌 조선이 외로울까? 

조선의 아들딸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도전하라. 그리고 선점과 용감함으로 더 넓은 세상에서, 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쟁취하자! 

훗날, 후손들은 우리의 위대한 도전을 자랑스럽게 말하리라! 

모두가 갇혔다고 생각한 조선에서 새로운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합스부르크의 분노

1631년 1월 10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스페인 의회. 

격론 끝에 ‘카스티야-레온’, ‘아라곤’ 의회가 한데 뭉쳤다. 

“이로써 스페인 의회(Cortes, 코르테스)는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와!” 

귀족과 각 도시의 대표자 의원들은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 

과거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등 제국(諸國)이 스페인의 기원이었다. 

세 나라 모두 중세봉건국가로 출발했고, 그에 따라 귀족 등 봉건주의의 영향으로 의회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최초, 약 8세기에 생겨난 의회는 봉건귀족들 중에 영향력이 강했던 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협의체였다. 

놀랍게도 초기 각국의 의회는 왕을 능가하는 권능을 가졌었다. 

이는 봉건귀족들의 세력이 막강한데다 군대를 갖고 있었고, 전비 등 세금에 대한 권한을 쥐고 있었기에 귀족들의 충성을 대가로 세금을 거둔다는 묵시적 합의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2세기경 오랜 레콩키스타로 왕실과 귀족들의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자, 전비를 거두기 위해 각 도시의 대표자들을 의회로 모았다. 

각 도시의 대표자들은 신흥세력으로 부유층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전비를 감당하는 대신, 귀족과 함께 새로운 의회 구성원이 되어 왕의 명령에 대한 거부권을 인정받았다. 

특히 왕의 부당한 명령, 주로 무분별한 세금징수를... 그래서 의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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