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희망봉 총독부.
“... 따라서 추가적인 수색작업은 모두 중단했습니다.”
나는 이광상 총독 겸 사령관의 보고를 받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대항해시대에서 실종은 침몰, 사략선의 약탈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실종되고 몇 년이 지나 되돌아 온 기록도 그리 적지는 않았다.
희망봉 기동함대, 나머지 15척의 생환은 낮은 확률일망정, 그저 기다림만이 답이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는 말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다음, 이광상 총독에게 다시 물었다.
“총독! 인도와 동아시아로 향하는 유럽 상선들은 어떻습니까?”
“네 폐하! 오랜 전쟁(유럽30년전쟁)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 무역거래량도 비단, 도자기 등 사치품 부문에서 크게 줄었습니다. 당연히 유럽 상선들의 숫자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초석, 차와 향신료만큼은 꾸준합니다. 특히 네덜란드는 식민지(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재배하는 차와 향신료를, 영국은 인도 무굴제국의 자국 상관에서 향신료와 초석 등을 교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는 16세기 이래 향료산지의 중심이었다.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와 영국은 아시아 곳곳에 상관을 설치하고 향신료를 비롯한 교역에 종사했다.
처음엔 두 나라의 사이가 무척 좋았다.
두 나라는 상호 적대행위와 경쟁을 중지하고, 향신료 거래의 안정을 위해 공동으로 매입하고 적정선에서 판매가격을 유지하자고 약속했다.
그것은 일종의 무역 담합이었다.
스페인의 은 무역은 감히 끼어들 수 없으니 나름의 틈새시장을 찾아 두 나라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기투합은 길지 않았다. 곧 두 나라 모두, 향신료 무역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압도적 병력에 영국이 패퇴했다. 현재 영국은 인도 무굴제국으로 밀려 간신히 체면치레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와 초석만 교역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와 커피 등도 꾸준히 거래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이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특히, 한국이 세계 은 무역을 거의 독점하게 된 것이다. 일본 은 무역에 이어 아메리카의 포토시와 멕시코까지 장악했으니까.
대항해시대, 무역거래의 기축통화나 다름없는 은의 독점으로 한국의 무역이익은 단순히 상품교역이익에 국한되지 않았다.
현대의 달러 등 기축통화로써의 효과, 다시 말해 화폐의 주조차익(작가 주:세뇨리지 효과는 기축통화국, 곧 국제통화를 보유한 나라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은 아니었지만 기축통화나 다름없는 은을 독점한 만큼, 세뇨리지 효과에 비견되는 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누가 뭐래도 동맹국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니 유럽이 성장하도록 가만 놔둘 순 없다. 어느 정도 억제를 해야 나중에 편하다!’
나는 경제적으로 그들을 옥죄기로 결심했다.
‘유럽 가격혁명이 통화량의 증가로 인해 일어났다고 했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금과 은으로 말이야! 명나라도 스페인으로부터 은의 유입이 끊기면서 경제가 위축되며 대혼란에 빠졌다. 내가 은을 틀어쥔다면 유럽의 성장을 일정기간 둔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메리카에는 충분한 통화량을 공급해야겠지. 유럽에서도 눈치 빠르고 똑똑한 자들은 부자가 될 기회를 찾아 아메리카로 찾아올 것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아메리카에 기업을 세우면 경제적 자유, 선택권을 주는 방식으로... 그래! 유럽의 상공인, 인재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게 하자. 단순히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유능한 유럽 이주민에게도 경제적 메리트(Merit)를 줘야지!’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이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총독을 자리에 앉혀두고 혼자만 너무 몰두했군. 은 공급을 억제할 구체적인 정책수단은 똑똑한 자들에게 지시해야지.’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바꿨다.
“크흠, 총독! 백의종사(白衣從士)들을 희망봉에 배치한 이유를 아십니까?”
...
해질녘, 희망봉 어느 숙소.
“폐하께서 ‘노동교화’에 이어 ‘외국어교육’을 시킨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왕은 호주로 강제로 끌려왔던 당시를 떠올렸다.
호주에 강제로 끌려온 능양군, 송시열 등 왕실 종친과 유학자들은 ‘노동교화’란 이름의 요상한 강제교육을 빠짐없이 수료했다. 그들은 조선에서 성리학과 인격을 도야하는 고상(?)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그 반대였다.
- 땀 흘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국왕의 해괴한 말을 시작으로, 스스로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해야 했다.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할 재료와 농기구 등은 모두 지급되었지만, 그 일하는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그렇게 반년에 걸친 눈물겹던 ‘노동교화’가 끝나고, 그들 모두 번듯한 집과 갈아먹을 땅이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국왕이 조선으로 떠나면서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 강제 외국어 교육이었다. 마지막으론 외국어 실력을 제대로 검증한다는 이유로 다양한 외국서적들을 번역하게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호주에 거주하는 종친과 사대부들은 뛰어난 외국어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왕의 말에 한고립이 펄쩍 뛰었다.
“야! 왕이 넌... 왜 지난 이야기를 꺼내고 그래? 나는 폐하께서 내린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야! 난 어쩔 수 없었다니까.”
이왕은 쓰게 웃으며 한고립을 달랬다.
“하하! 형님을 탓하려는 게 아니고요. 폐하와 형님 덕분이란 뜻입니다. 제가 보다 넓은 세상, 더욱 다양한 생각들을 알 수 있는 단초가 되었으니까요! 처음엔 다소 서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성리학은 세상일과 동떨어진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백성들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론에서요. 형님들도 소제와 같은 생각이시지요?”
송준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겠지? 더 자세한 건...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에게 물어 보거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송시열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과거 호르킨족 마을에서 깨달은 바를 떠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나 역시 백번 공감한다. 법(法), 도(道)와 예(禮)는 멀리 있고 무법(無法), 무도(無道)와 무례(無禮)가 바로 옆에서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논하고, 도와 예를 부르짖을 시간은 없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 참다운 인간,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은 없다. 다시 말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충의를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좇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고 배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더냐? 그런 식이면 온전한 나라도 없다. 모든 나라는 국익을 좇아 국가를 운영하니까. 뭐 요순시대? 과거의 현인? 그런 이상적인 국가, 이상적인 인간이 오직 과거에만 있으니 문제다. 탁상공론이 다른 것이 아니다. 과거는 배우는 것이고, 현실에 적용해서 보다 발전적이어야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라! 그래야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으니.”
짝짝.
그때 송준길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호르킨족 마을에서 함께 도끼를 들었던 사람이라 생각의 깊이가 다르군! 현실을 직시하라! 말이 입에 착착 붙는구나. 그런데 시열아? 사람들이 널 패유(霸儒, 패도적인 유생)라고 부른다는 거 아니?”
“글쎄요? 저는 금시초문이군요.”
“하하! 법, 도와 예를 도외시하고 오직 현실을 중시하는 유생이 패유가 아니면 뭐냐? 나도 패유할 테니 받아줘! 참, 왕이 동생만 희망봉에 남을 테니 한잔 하러 갈까?”
그러자 한고립이 반색하며 말했다.
“뭐 술? 그럼 가야지! 오늘도 내가 산다!”
“역시 한 형이 부자라 좋구려! 모두 나갑시다!”
그들은 박장대소하며 숙소를 나섰다.
계승전쟁
한밤중.
희망봉 임시행궁.
“칼레, 노르망디, 아키텐이라... 과거 존 왕이 상실한 앙주 제국(=플랜태저넷 제국)을 재건하고자 함인가?”
나는 찰스1세의 엄청난 야심에 혀를 내둘렀다.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은 13세기 초반까지 영국 왕이 지배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내의 영토를 합쳐서 부른 명칭이었다. 프랑스에선 플랜태저넷 제국(L'Empire Plantagenet)이라고 불렀다.
특히, 존 왕의 아버지인 헨리2세가 아키텐의 엘리노어(Aliénor d’Aquitaine)와 결혼하면서 획득한 아키텐은 오늘날의 카스코뉴, 푸아투, 리무쟁 지역들을 포괄하는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였다.
당시 프랑스, 특히 아키텐의 생산력은 엄청났다. 아키텐에서 거두는 세금만으로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거기에 노르망디와 칼레 등도 프랑스의 알짜배기 땅이었다.
영국 왕이 소유한 칼레, 노르망디, 아키텐은 당시 프랑스 전체 영토의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그런데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빼앗아 앙주 제국(플랜태저넷 제국)은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다.
존 왕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거의 상실했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거두었다. 이는 영국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끝내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치욕까지 맛보았다.
그 다음 수순은 치열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13세기 초 존 왕의 치욕은 물론, 14-15세기의 백년전쟁을 지나 최근 1628년 라 로셸의 위그노 전쟁까지... 틈만 나면 서로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수백 년 간, 영국과 프랑스는 앙숙이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엔 영토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두 나라의 신분제와 종교문제까지 얽혀있었다.
탁.
“휴, 이거 한일관계 저리가라군. 영국과 프랑스도...”
나는 런던공사의 극비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17세기는 절대왕정이 당연한 시기였다.
찰스1세는 왕권을 절대적이며 신이 내려준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아니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모든 왕과 귀족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유럽의 신분제와 종교 문제는 아주 복잡했다.
다른 나라는 차치하고, 프랑스와 영국만 보더라도 그랬다.
우선 프랑스는 절대군주인 국왕을 정점으로 완고한 신분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교도 국가지만 낭트칙령을 통해 신교도인 위그노 세력의 자유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지원 하에 라 로셸의 위그노 전쟁 등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국은 프랑스의 골칫거리였다.
반면 영국은 존 왕에 의해 들어선 의회로부터 시작해서,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1세 시절에 힘을 키운 젠트리와 요먼까지 신흥세력으로 등장했다. 그에 따라 프랑스에 비해 신분제가 매우 느슨한 편이었다. 또한 헨리8세의 수장령에 의해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성공회가 들어섰다.
그렇다고 영국이 성공회로 통일된 것도 아니었다. 청교도는 물론이고 성공회 내에 구교도에 가까운 사제들도 많았다. 헨리8세부터 엘리자베스1세까지 엄청난 피를 흘렸기에 서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종교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게다가 영국 신교도들은 찰스1세의 왕비 앙리에타 마리가 구교도란 것에 불안해했다. 혹시나 찰스1세가 구교도로 회귀하지 않을까 미심쩍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거 런던공사가 아주 바쁘겠어. 스페인 알바공작은 본토를 지키는 것도 버거울 거야. 프랑스를 견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결국 영국과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맞서야한다.”
나는 복잡한 셈법에 다시 고심을 거듭했다.
‘영국이 칼레, 노르망디, 아키텐을 되찾는 것은... 음, 영국 혼자선 국력에서 게임이 되질 않아. 거기에 네덜란드를 더해도 부족하다. 네덜란드 역시 남부 네덜란드(북부 플랑드르-게르만, 남부 왈롱-프랑크)를 원한다. 하지만 스페인 알바공작이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부 네덜란드 영지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설령 포기한다 해도 프랑스의 세력권에 들어가기 쉽겠어... 프랑스 입장에선 파리에서 지척인데다 수천 년간 민족적·언어적 동질성이 있는 남부 네덜란드를 가만 놔둘 수 없다. 지금이야 합스부르크 영지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최소한 위성국가나 완충지역으로 놔두길 원할 거야.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긴 어려워...’
쪼르륵.
나는 차를 들이키며 목을 축였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상, 유럽30년 전쟁은 길어봤자 수년 안에 끝날 것이다. 스페인이야말로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구교도의 맹주였으니... 신성로마제국도 곧 돈이 말라 지리멸렬하겠지. 스페인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 구교도의 돈줄인 이탈리아 은행들도 곧 파산할 테고...’
런던공사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는 인접한 독일의 통일을 원치 않았기에 결국 신교도 편에 설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모두 나의 결정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내가 스페인과의 전쟁에 프랑스를 끌어들였으니까.’
프랑스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던. 프랑스 내의 영지(메스, 투르, 베르됭의 세 주교령)와 독일에 맞닿은 알자스까지 거머쥐었다.
손쉽게 프랑스 내부 영토의 통합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스페인이 몰락하면서 네덜란드가 완전 독립했다. 거기에 남부 네덜란드의 영유권을 주장할 기회까지 생겼다.
이탈리아 북부도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근심을 덜었으니, 오랜 숙원이던 독일만 분열된다면...
프랑스 루이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꿈이 이루어질 찰나였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프랑스가 유럽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확실했다.
‘쯧쯧,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키운 셈인가?’
나는 다시 역사의 오랜 교훈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