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태자를 빼앗아 안았다. 그리고 내게 등을 기대도록 했다.
그녀가 태자를 다시 안으려 했지만 나는 허락지 않았다. 곧 태자가 깨지 않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뱃속의 둘째를 생각해서 그만 쉬시오?"
나는 다시 궁인들에게 눈짓을 하여 내보냈다. 그들도 쉬어야 하니까. 잠시 버티다 모두 나갔다.
그녀도 눈을 붙이려 안간힘을 썼고, 이내 잠에 빠졌다. 낮게 코를 고는 것이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태자를 안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곧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호주 서부의 도시, 신의주(현대 퍼스)에서 식수 등을 보충하고 출발한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숙련된 바닷사람도 오랜 항해에는 지치기 마련이다.
어제의 황천과 달리, 오늘은 날씨가 맑고 바람도 적당해서 항해하기 좋았다. 그렇게 순풍에 돛단배가 되어 대열을 갖춰 항해했다.
나도 그녀와 함께 갑판에 나와 쾌청한 하늘과 잔잔한 바다를 즐겼다. 그렇게 긴 항해의 지루함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그녀와 태자의 얼굴에도 잠시 생기가 돌았다.
또 다음 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희망봉이다!”
끼룩끼룩!
철썩!
쏴아아!
서울을 떠난 지 45일을 꽉 채운 때였다.
드디어 희망봉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 옆에는 왕후 강씨가 태자를 안고 있었다. 그녀와 태자의 얼굴엔 피곤함이 역력했다.
아쉽게도, 희망봉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환영행사가 있을 것이다.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희망봉이라... 이번 생에선 처음이자 마지막이겠군.’
과거 여러 차례 희망봉을 들렀던 나였다. 그때는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곧 이광상 사령관에게서 희망봉 기동함대의 생존여부를 더욱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봉 기동함대는 총 23척이었다. 그런데 불의의 허리케인으로 실종되고 말았다.
최초 6척, 그 후에 2척이 추가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고길동 함장의 승리호 등 최초 6척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호주 해역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당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혹시나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아직 경도계가 없는 세상이야. 육분의로 위도를 측정한 다음, 나머지는 추측항법으로... 숙련된 항해사가 경험으로 항해하는 세상이지. 기동함대의 생존여부는 아직 모른다.’
또한 나는 서울을 떠나기 전에 확인한, 런던공사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런던공사의 보고서 작성시점은 1630년 8월 말이었다.
[ 제목 : 영국에 제공한 차관 및 대여금 회수계획 보고서 ]
(전략)
찰스1세는 뉴펀들랜드와 뉴잉글랜드의 세금징수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3백만 파운드, 버지니아를 넘기는 대가로 1천만 파운드를 요구했습니다.
기존에 제공한 차관과 대여금 5백만 파운드까지 합한다면, 원금만 총 1천 8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중략)
1차로 영한주식회사를 처분해서 5백만 파운드를 회수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추가로 요구하는 1천 3백만 파운드는 신이 조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금액입니다.
그래서 가칭 ‘남해주식회사’를 설립한 다음, 주가를 부양하는 방식을 사용해 자금을 끌어 모으려 합니다. 그 다음 찰스1세에게...
(후략)
...
나는 떨떠름했다.
‘찰스1세가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닐까? 그리고 런던공사의 술수대로면, 향후 포퓰리즘(Populism)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영국을 상징할 수도 있겠어. 참! 영국에 대중영합주의가 창궐하면 프랑스와 싸울 힘이 생길 수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아메리카로 가서 결정하자!’
희망봉에서 생긴 일
1631년 1월 7일, 남아프리카 희망봉.
점심 무렵.
바로 어제, 국왕의 천도행렬이 수백 척의 배에 수만의 사람을 싣고서 희망봉에 도착했다. 항구 안팎은 배로 가득 찼고, 희망봉 전역이 하선한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어느 노천식당.
왁자지껄.
노천식당 내·외부는 빈틈없이 만석이었다.
손님들은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서성였고, 식당종업원들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이때 송시열 일행이 간신히 자리를 잡고서 식사를 주문했다.
“여기 샌드위치 큰 걸로 네 개, 커피도 넉 잔!”
잠시 후, 노란색 종업원 복장을 한 소녀가 커피를 먼저 내왔다.
“여기 커피 먼저 드세요. 음식도 곧 나올 겁니다.”
탁탁.
소녀가 커피를 내려놓고 바삐 떠났다.
쪼르륵.
송시열은 커피를 마시며 잠시 허기를 달랬다. 그의 옆에는 송준길과 능양군의 맏아들 이왕이 함께 자리했다.
먼저 이왕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지난달에 출발한 선발대, 폐하께서 이끄는 본대도 각각 수만이 넘는군요! 이번 천도에 국운(國運)을 걸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닌 듯합니다. 십년 안에 1백만, 오십년 안에 1천만을 이주시킨다니...”
송준길도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고로 천도란 국가의 흥망성쇠에 직결되는 중대사였으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도 그렇다. 멀리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한사군을 복속시키고 주변부족들을 통합했어. 그 다음엔 평양으로 천도해서 지배계층을 결속시키며 국가정책의 일대전환을 이뤘고... 가까이 조선은 개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 이유는 체제안정에 방점이 찍혀 있었지. 그 밖에도 전쟁의 위기나 반란 등 국난, 정치경제적 이유, 기타 통치의 용이함까지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이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송준길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 천도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소견으로는 폐하의 말씀을 당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흐음, 그건 나도 폐하의 말씀, 그대로 알고 있을 뿐이다. 보다 넓고 살기 좋은 땅으로 함께 나가자는 말씀, 그럼으로써 국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씀... 폐하께선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말씀하셨지. 아마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세한 건 저쪽이 잘 알지 않겠느냐?”
송준길은 말을 마치며 송시열에게 해답을 구했다. 송시열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곧 이왕의 의문에 해답을 주었다.
“내가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위한 패권경쟁]을 써서 폐하께 헌책(獻策)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천도는 나의 헌책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송시열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번 천도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본 북아메리카 서부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호주 이상의 생산력을 가진 천혜의 땅이었다. 같은 노력으로 더 많은 이익, 그걸 납득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 왕이 너도 이것은 쉬이 납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에 드러난 경제적 이유에 대비한, 다른 의문이 있을 테지. 이를테면 정치적 이유 말이다.”
이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송시열은 푸근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스페인 무적함대가 일패도지한 것을 보면, 호주에 그대로 남는 것이 외적의 방어에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굳이 유럽과 인접한 북아메리카, 그것도 서부가 아닌 동부를 선택하셨다. 나의 헌책은 동부가 아닌 서부 천도였다. 당연히 북아메리카 동부 천도는 그저 전쟁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 안주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뜻이지. 내 생각에 폐하께서는 스페인의 해상패권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한국의 해상패권을 보다 공고화하기 위해 천도를 결정하셨다고 본다. 향후 유럽의 패권도전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그것도 뒤에 숨기 보다는 앞에 나서서 깨부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호주는 유럽의 패권도전에 대응하기엔 너무 머니까. 왕아! 이것은 나의 추측이며 그 이상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때 노란색 종업원 복장을 한 소녀가 샌드위치를 내왔다.
“주문하신 샌드위치 네 개 나왔습니다!”
탁탁.
그와 동시에 송준길, 송시열, 이왕은 군침을 삼키며 각자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배고픈 일행에게 천도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샌드위치를 가득 입에 베어 물려는 찰나, 한고립의 노호성(怒號聲)이 터져 나왔다.
“아,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너희끼리 먼저 먹는 거야?”
잠시 후.
“꺼억!”
한고립이 제일 먼저 식사를 마치고 트림소리를 내었다. 송준길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송시열이 물었다.
“한 형께선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송준길의 샌드위치를 노려보던 한고립은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응, 별거 아니야. 국민공모주식 추가청약하고 왔어.”
그 말에 이왕이 끼어들었다.
“그거 이번에 공포된 국민투자칙령 아닌가요?”
한고립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흐흐, 맞아! 왕이 너도 여윳돈이 생기는 대로 국민공모주식을 조금씩 사놔. 난 예전부터 적금,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보상금, 퇴직금까지 탈탈 털어서 꾸준히 대한무역주식회사 주식을 샀어. 주가가 오르면 그것대로 좋고, 매년 주식배당금까지 받고 말이야! 그동안 주식발행에 제한이 있어서 일반국민들은 주식을 사고 싶어도 못 샀잖아? 이번 기회에 주식투자에 신경을 쓰라고!”
여기에서 말하는 ‘국민투자칙령’은 다음과 같았다.
[국민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열심히 일하려는 자에게 더 넓은 토지를 나눠주고,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려는 자에게 주식을 구입할 수 있게 하라! 국민들이 토지와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각자 주인의식을 가지게 함은 물론이고 더욱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따라서...]
위와 같은 국왕의 발표와 함께 대한무역주식회사 등 무역에 종사하는 여러 우량회사들이 국민공모주를 대규모로 발행했다.
다만, 한국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판매했고 외국이나 외국에 소재한 기업, 외국인은 주식을 구입할 수 없었다.
송준길도 동의했다.
“후우, 한 형 말마따나 국민공모주를 샀어야 했어! 희망봉에 와보니 창고 하나하나 크기가 대궐을 능가하는구나! 대체 몇 개야? 하나 둘 셋... 아악! 내 돈!”
한고립은 송준길을 향해 우쭐거리며 타이르듯 말했다.
“흐흐, 이제라도 조금씩 사! 너희들도 백의종사(白衣從士)기간만 끝나면 정식으로 공무원이 될 테니까.”
그런데, 송시열 형제와 달리 이왕의 안색은 자못 어두워졌다.
그때 송시열이 이왕을 위로하며 말했다.
“왕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폐하께서는 이미 종친과 사대부들의 종군(從軍)을 허용하셨다. 이는 한국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관직에 나가 본인의 능력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다. 너의 아버지께서는 죗값을 치르고 나서 풀려날 것이다. 또한 시민군에 종군했던 자들을 추려, 이처럼 백의종사로 임명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 폐하의 관대함을 믿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