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25)

- 내가 누군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다! 하늘이 부여한 세 나라의 왕이지. 그런데 내 왕권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 선왕이신 제임스1세께서 물려받은 것은 허울뿐이고 빚만 가득했다.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가 저지른 일에 선왕과 내가 고통 받아 왔다. 나는 강력한 왕권을 원해! 의회 없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도 강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걸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 감히 왕에게 권리청원을 내놓는 무리들과 어찌 상생하겠는가?

- 폐, 폐하! 의회파 귀족, 또 신흥세력인 젠트리와 요먼... 그들은 왕당파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입니다...

- 그러니까 더욱 확실하게 한국의 지원을 받아야지. 나는 의회를 무릎 꿇리고, 아니 아예 없애고 왕권을 확고하게 다지길 원한다. 또 최종적으로 칼레, 노르망디와 아키텐을 되찾고 싶어!

- ...

- ...

처음에는 의회파 세력을 모두 쓸어버리고, 최종적으로 의회 자체를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곧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족은 차치하더라도, 젠트리와 요먼 등 신흥세력은 영국 곳곳에 뿌리내린 지 오래였다. 섣불리 모두 건드렸다간 파국을 맞을 공산이 컸다.

또한 의회의 필요성까지 절감하게 되었다. 그 누구든 의회를 통해 법률, 명령, 세금 등의 정당성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찰스1세의 생각이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남해주식회사 사기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확인한... 런던시민들의 열광적 지지였다.

그때였다.

“폐하! 버킹엄 공작과 스트래퍼드 백작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오! 어서 들어오라고 하라.”

쪼르륵.

탁.

잠시 커피 향을 음미하던 버킹엄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폐하! 정말 훌륭한 결단입니다. 의회파 모두가 폐하의 적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도 강경파들이 반역자였고, 나머지는 폐하의 충직한 신하들입니다.”

왕의 특별재판소장을 맡고 있는 스트래퍼드 백작도 동의했다.

“버킹엄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의회파 모두가 적은 아닙니다. 이번 사건으로 강경파 의원들이 매국노로 낙인이 찍힌 만큼, 폐하께 적대시할 의회 반대세력은 모두 사라진 셈입니다. 내일 에드워드 코크 등 반역 주모자 8명을 처형하면 1차 재판이 끝납니다. 곧 2차 재판도 시작될 것이며 이에 대한 런던 시민들의 지지도 확고합니다.”

찰스1세는 자연스레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았다. 

사실 ‘남해주식회사 사기사건’의 전말을 아는 것은 그와 버킹엄 공작, 또 런던공사와 네덜란드 유대인뿐이었다. 찰스1세는 버킹엄 공작에게 은연중에 ‘입조심 하라’는 의미로 눈짓을 하고는, 스트래퍼드 백작에게 질문했다. 

“크흠, 그대들이 이리 띄워주니 낯 뜨겁군. 흠흠, 스트래퍼드 백작! 반역 주모자 8명은 특별재판소 판결대로 처형해야겠지. 하지만 나머지 부화뇌동한 자들은... 기존 관례대로 관대하게 처분하는 것이 어떤가?”

여기서 기존 관례란 ‘몸값’을 의미하는 말로, 일정한 금액의 돈을 내고 처벌을 면제받는 것이었다.

스트래퍼드 백작은 조금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차피 반역자들을 처형하면 그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강경파 의원들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혹시 반란이 우려된다고 하셔도 민심은 폐하의 편입니다.”

그러나 찰스1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곤란해! 지금 당장은 매국노로 낙인이 찍혔기에 잠잠하겠지. 이는 나중을 위해서다. 의회가 이미 내 손에 들어왔는데 거리낄 것이 무엇인가? 기존 관례대로 진행하게. 대신 반역에 준하는 죄이니 그만큼 많이... 이제 알겠나?”

버킹엄 공작도 거들었다.

“오! 폐하께서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내리신다면 그 누가 반발하겠습니까?”

곧이어 스트래퍼드 백작이 수긍하며 말했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반역자에게서 몰수한 재산과 몸값도 기존 관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또 여기서 기존 관례란 몰수한 재산과 몸값을 ‘국가 재정에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찰스1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반역자들의 재산, 몸값은 ‘남해주식회사 사기사건’ 피해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나는 피해자들의 눈물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네. 이것이야말로 국왕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야! 참, 런던시민들이 모르게 은밀히 진행하도록!”

스트래퍼드 백작은 감동한 나머지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흐흑,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때 찰스1세와 버킹엄 공작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은밀히 대화했다.

...

새해 둘째 날, 영국 의회.

“하원의장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짠돌이, 크흠..., 아니 폐하께서 왕실재산 1천만 파운드에 이어 반역자들의 몸값까지 헐어서... ‘남해주식회사 사기사건’ 피해자들에게 최대한 보상한다고 합니다.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봐야겠습니다.”

“...”

존 핀치 하원의장은 그저 말을 아꼈다. 그리고 새해 첫날부터 런던 전역을 강타한 소문을 떠올렸다.

- 폐하께서 왕실재산 1천만 파운드를 피해자들에게 나눠주신 게 엊그제 아니야? 그런데 또?

- 응! 이번엔 반역자들 재산과 몸값이래.

- 그럼 그것도 꽤 되겠는 걸? 

- 이정도면 찰스폐하도 엘리자베스폐하 못지않은 성군이군.

- 난 이제 의회 못 믿겠다. 죄다 매국노 소굴 아닌가?

그저 의회에, 매번 전비만을 요구하던 국왕이었다. 또 의회가 세금에 반대하면 씩씩거리다가 의회를 닫아걸기 일쑤였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나? 혹시 폐하께서 죽을 병에 걸린 건...’

존 핀치는 정말 어리둥절했다. 그는 스스로 국왕에 충성하는 신하이며, 중도파임을 자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경파의 거친 공격에도 찰스1세를 변호하길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때, 다른 의원의 말이 계속되었다.

“하여간 폐하께서 의회를 닫아걸지도 않고, 앞으론 의정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씀하시니... 이거야말로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존 핀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폐하께서 의회를 존중하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정말 꿈같군요.”

그런데...

그날 저녁, 하원의장 집무실.

존 핀치는 경악했다.

“폐하께서 또 증세(增稅) 결의안을 내시다니... 이러면 결국 세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보상한 셈이 되지 않나?”

영국 의회에서는 국왕도 새로운 법률 제정, 세금의 창설 및 증세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할 수 있었다.

존 핀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신음하듯 혼잣말했다.

“로마제국처럼 인기영합 정책을 펴면 당장은 좋겠지... 하지만 세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대로 파국을 맞을 텐데... 폐하께서 설마?”

그러나 곧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닐 거야. 이번은 특별한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 맞아. 폐하의 충직한 신하로써, 이번 증세 결의안만큼은 도와드려야해!”

쓱싹.

존 핀치는 찰스1세가 제출한 증세 결의안을 의회 본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정하고는 서명을 마쳤다.

런던 하늘은 점차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

1631년 1월 4일, 인도양 해상.

“황천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쏴아아!

철썩.

겨울바다는 몹시 거칠었다.

국왕의 거대한 기함도 이리 흔들리는데, 옛 사람들이 작은 배로 항해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옛 선원들은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무한한 용기를 품고서... 그들이 용왕 등 온갖 미신을 떠올린 것도 이처럼 갑작스런 바다의 기상변화 때문일 것이다.

‘용왕의 분노 때문에 황천이 생겼다고 하면 마음이 편 하려나!’

황천항해!

옛날 해군시절... 황천은 파고(波高, 파도의 높이)에 대한 기상용어였다. 당연히 파고의 높이에 따라 황천1급, 2급 등으로 위험도를 구분했다.

나는 무역상단 때부터 황천항해를 세밀하게 정의하고 선원들을 가르쳤다. 또 해군에서는 더욱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지금 파고는 아마 황천 4급, 대략 파고가 3~4미터 정도로 보였다. 

평소 기준으로, 이정도 황천은 피항(避航, 안전한 곳으로 대피)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도양 해상, 피할 곳이 없었다. 

그때 기함을 지휘하는 함장의 고성이 들렸다.

“조타수 좌현 10도!”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잠시 전방의 파도를 확인해 보니 함장의 지시는 아주 정확했다.

파도와 너울이 합쳐진 것을 ‘너울성파도’라고 불렀다. 

배는 일반적으로 파도를 함수(艦首, 뱃머리) 30도로 가르며 항해해야 안전했다. 만약 파도를 옆에서 맞으면 침몰할 수 있었다. 아울러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 것도 충격이 작지 않았다.

쏴아아!

기함이 파도를 정면으로 가르며 나아갔다.

나는 함장과 병사들의 대응을 지켜보며 갑판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때 함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폐하! 옥체를 생각하시어 선실로 들어가시지요?"

나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하하! 고맙지만 괜찮네. 짐 역시 이 배의 일원이니... 함장은 신경 쓰지 말라."

그러나 함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께서 갑판에 서신 이유를 소관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기함의 선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만 선실로 뫼시겠습니다. 호위대장! 부탁드립니다. 아니 함장으로써 명령합니다. 어서 폐하를 선실로 안전하게 모시지요!”

호위대장은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폐하! 이만 선실로 내려가시지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못해 호위대장을 따라 선실로 내려갔다.

잠시 후.

선실에서는 왕후 강씨가 태자를 어르고 있었다.

평소 잘 익은 홍시처럼 붉은 볼은 창백하게, 크고 동그란 눈은 오랜 항해에 지쳤는지 반쯤 감기려는 찰나였다.

태자는 겨우 4살짜리 어린아이, 거친 항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저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쌔근쌔근.

‘쯧쯧, 얼마나 힘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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