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225)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 모두 그들의 책임이지. 빌어먹을 것들... 선대에 쌓아온 막대한 재정을 모두 써버리고 빈 곳간만 물려주다니. 그나마 한국이 없었다면, 정말 끔찍하군.’

한국의 차관과 관세, 그리고 남해주식회사는 진정 천운(天運)이었다.

찰스1세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고 다시 말했다.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군. 적들이 가진 돈으로 우리의 전쟁비용을 마련하다니! 정말 짜릿하구나! 이런 식이면 세금을 거둘 필요도 없겠다.”

버킹엄 공작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폐하! 런던공사가 신신당부했습니다. 남해주식회사는 오직 일회성이고 다시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젠트리와 요먼, 귀족들이 가진 재산을 쉽게 빼앗을 수 있지만... 만약 들키는 날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곧 런던공사 지분을 매각하고 나면, 네덜란드 유대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가야 합니다.”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대가문들이 모여 회의를 이어갔다.

먼저 베어링 가문이 입을 열었다.

“후후, 런던공사의 배포가 대단하군요!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온갖 욕을 먹이겠다니 말입니다. 이거 욕만 먹어도 배가 부르겠어요. 뭐, 제가 듣기로 영국 희곡 중에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만. 우리를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로 폄하했다는 내용으로요...”

호프 가문도 웃으며 말을 보탰다.

“어차피 먹던 욕에 조금 더하는 수준이지 않습니까? 런던공사가 약속한 3백만 파운드면 영원히 입을 다물어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찬성합니다!”

“우리 리카도 가문도 동의합니다.”

그때 베어링 가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스페인 무적함대가 한국을 정벌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희망봉에 다녀온 선박이 있더군요. 그래서 확인 차 물어봤더니, 스페인 무적함대가 며칠 두드리다 지나갔다는 겁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호프 가문과 리카도 가문은 서로 눈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베어링 가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고심하던 호프 가문이 동의했다.

“역시 한국의 저력을 한 단계 격상해야겠군요. 희망봉이 건재하니 한국 무역의 숨통은 여전하고, 반대로 스페인의 공세는 빗나갈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요.”

리카도 가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이 아메리카가 아닌 호주로 향했을 때부터 예상된 것 아닙니까? 쯧쯧, 희망봉이라도 먼저 깨부쉈다면 한국의 숨통을 조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돈이 돌아야 나라 살림을 하고 전쟁도 할 것인데...”

탁.

결국 베어링 가문이 결론을 지었다.

“그럼 스페인에 투자했던 돈을 급히 회수하고 한국에 겁시다. 소문은 스페인에 우호적으로 내는 것을 잊지 마시구요! 이번 기회에 이탈리아 은행을 완전히 물 먹일 수 있겠습니다.”

유대 가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를 끝냈다.

...

닷새 후, 런던 시내.

런던 전역은 아수라장이었다.

화르르.

1571년 엘리자베스1세 당시, 토머스 그레스햄에 의해 창설된 왕립 증권거래소(Royal Exchange)가 불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립 증권거래소 앞에 모여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절규는 마치 피가 끓어오는 듯했다.

“으헝헝, 내 돈이 휴지조각이라니? 다 나와! 모두 죽여 버린다.”

“책임자 누구야? 당장 나와!”

또 누군가는 절망한 나머지 차가운 겨울의 템즈강에 몸을 던졌다.

그때 누군가가 나서며 외쳤다.

“의회 놈들이 유대인에게 남해주식회사를 넘겼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웅성웅성.

“뭐, 의회 놈들이라고?”

“의회면 여기서 금방이잖아! 진짜 그 놈들이야?”

“진짜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야! 당장 의회로 쳐들어가자!”

와아아!

성난 군중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의회를 향해 달렸다.

왕립 증권거래소에서 영국 의회까지는 템즈강을 건널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강변을 따라 1킬로미터 정도 거리였다.

...

같은 시각, 찰스1세의 집무실.

찰스1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1천만 파운드나 내놓으라는 건가?”

버킹엄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크흠, 폐하! 런던공사의 계략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노한 런던시민들을 달래야 합니다. 그동안 런던시민들은 의회 편이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살려 그들의 환심을 산다면, 의회 처단에 반대할 자들이 없을 겁니다.”

“음, 알겠어. 어차피 젠트리, 요먼, 의회파 귀족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면 되니까. 그건 양보 못해! 알겠어?”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찰스1세의 얼굴은 썩어가고 있었다.

...

해질녘, 영국 의회.

화르르.

으아악.

유서 깊은 의회 건물이 런던시민, 아니 폭도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의회 건물 바깥은 사방에 불길이 번지고, 유리가 깨지는 등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경비병! 문을 단단히 잠가.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쿵쿵.

그러나 문을 열어젖히려는 폭도들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

“개*끼들아 어서 문을 열어!”

“나오지 않으면 모조리 불태워 죽인다!”

경비병들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정말 간신히 의회 건물 난입만은 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곧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다.

의회 경비대장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 존 핀치 하원의장님께 말씀드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모두 무기를 점검해라! 아무리 런던시민이지만 폭도는 폭도다!”

그런데 그때...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또 아까처럼 그 누군가였다. 아니 지금 상황에선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찰스 국왕폐하께서 남해주식회사의 손실을 일부 보전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의회, 바로 그 폭동의 현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빠졌다.

잠시 후...

“와아아! 찰스 폐하 만세!”

이번에도 그 누군가의 선창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런던시민, 아니 남해주식회사 파산으로 폭도가 된 모두가 함께 외쳤다.

“와아아! 찰스 폐하 만세, 만만세!”

런던 전역을 집어삼킬 뻔한 대규모 폭동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들은 ‘찰스 만세’를 외치며 힘껏 왕궁으로 달렸다.

...

같은 시각, 런던 시내 어느 곳.

왕의 근위대장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 경! 그대를 남해주식회사 주식사기 혐의로 체포한다.”

에드워드 코크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남해주식회사 주식을 단 한 주도 구매하지 않았다. 감히 의원을 구속하려 하다니! 이는 대헌장에 위배되는 중대한... 으윽...”

털썩.

“하여간 법을 배운 놈들은 말이 많아! 너와 꼭 붙어 다니던 올리버 크롬웰이 유대인과 결탁했다는 증거가 차고 넘쳐! 올리버 크롬웰은 무려 1백만 파운드가 넘는 뇌물을 받아 쳐 먹었다고... 너는 특별재판소에 회부될 것이다.”

에드워드 코크는 근위대장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근위대에 이끌려 속절없이 구속되었다.

동시에 런던 시내 곳곳에서는 에드워드 코크 외의 여러 강경파 의원들이 속속 체포되어 런던감옥에 갇혔다.

런던시민들은 의원들이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알 수 없었다. 아마 이를 알았더라도 의원들을 위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남해주식회사 주식사기가 너무나 큰 사건이었고, 그 사기사건의 배후가 의회라는 소문이 결정타였다.

또한, 런던 곳곳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

“올리버 크롬웰이 유대인과 짜고 남해주식회사를 파산시켰다며?”

“그 놈 매국노다! 유대인과 사전에 모의한 편지와 1백만 파운드의 뇌물까지 그놈의 집에서 나왔데!”

“이런 *같은 놈! 그놈이 같이 다니던 의원들도 한통속 아니야?”

“그나마 찰스폐하께서 개인 재산을 헐어 손실 일부를 보전해 주신다고 했잖아!”

“하여간 의원 놈들이 매국노였다니! 에드워드 코크 그놈도 마찬가지다. 무슨 사탕발림으로 법의 지배를 앵무새처럼 말하더니, 그 놈도 올리버 크롬웰과 딱 붙어 다녔잖아? 에라이 퉤!”

포퓰리즘?

1630년 12월 마지막 날, 영국 런던.

찰스1세의 집무실.

“정말 짜릿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 이 정도라니... 로마 황제들이 시시때때로 검투사 시합과 축제를 열었던 이유를 알겠다. 돈이 얼마가 들건...”

찰스1세는 ‘남해주식회사 사기사건’을 성공리에 일단락 지으며 깨달은 바가 많았다.

왕과 귀족, 대헌장과 의회제도, 법률과 명령의 정당성 등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대다수였다. 거기엔 왕과 귀족을 제외한 신흥세력들, 젠트리와 요먼 등에 대한 처분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찰스1세는 몇 달 전, 버킹엄 공작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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