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르륵.
신준묵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폐하의 밀서는 정말 뜻밖이었어.’
그는 먼저 국왕의 밀서를 떠올렸다.
- 짐은 런던공사에게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에 대한 전권을 일임한다. 그대의 어깨에 고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스페인과의 전쟁은 국가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다.
‘그래! 나 역시 언젠가는 스페인과 싸울 운명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신준묵의 생각에도 지금 당장은 어려운 상대였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국왕의 밀서를 다시 떠올렸다.
- ... 스페인이 무너지고 나서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이 결성되면 가장 이득이 적은 나라는 영국이다. 네덜란드는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얻을 것이고, 프랑스는 자국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를 손쉽게 집어삼길 것이다. 반면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위가 실추되고 이어서 내전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스페인 내의 귀족들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그러나 영국은 마땅히 얻을 것이 없다.
‘내가 수시로 보고를 올리긴 했지만 너무나도 정확한 판단이시다.’
신준묵은 정말 감탄했다.
첫째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우선 독립, 그 다음으로는 ‘스페인령 남부 네덜란드’와의 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크게 북부 플라망족(현대 네덜란드)과 남부 왈론족(현대 벨기에)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플랑드르와 왈롱의 경계선은 로마 갈리아 국경선과 거의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플랑드르는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네덜란드어의 방언인 플라망어를, 왈롱은 로마화 된 갈리아 어에서 유래한 프랑스어의 방언인 왈롱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국경, 정치, 언어 등 여러 이유로 플랑드르는 일반적으로 친 게르만, 친 네덜란드 성향을 지녔고 왈롱은 친 프랑스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신교도와 구교도로 나뉘었다.
따라서 남부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초기부터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에 호응하지 않았었다.
다시 말해, 남부 네덜란드를 진정 하나로 통일시키려면 프랑스의 양보 또는 전쟁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간섭을 뿌리치고 남부 네덜란드를 통일시키려는 목적에서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에 가담했다.
둘째는 스페인이었다.
네덜란드에 비해 스페인은 아주 간단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물러나면 스페인 귀족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거지. 스페인 귀족들 입장에서 스페인 밖의 합스부르크 영지는 그저 남의 떡이니까. 결국 포르투갈은 독립수순으로 가고 있으니 알바 공작은 스페인만 집어삼키면 만족할 테지...’
셋째로 영국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영국 찰스1세는 네덜란드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이나, 스페인 알바 공작과 달리 커다란 이득이 없었다. 그저 숙적 프랑스의 부상을 억제하는 이득이 있을 뿐이었다.
국왕의 밀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었다.
- 찰스1세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라 로셸의 위그노를 지원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영국은 프랑스와 앙숙이며 무려 100년 동안 전쟁을 했었다. 프랑스 내에서 영국이 가졌던 영토는 프랑스 왕을 능가할 정도로 엄청났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프랑스를 병탄하도록 돕기는 어렵다. 그러나 싸움을 하도록 유도할 수는 있겠지. 그러려면 우선, 은근히 그의 욕심을 부추기도록 하라! 하지만 절대 먼저 나서진 말도록... 그가 먼저 우리에게 요청할 수 있게 하라. 그리고 그 전에 찰스1세가 영국 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그래서 신준묵은 지난 협상 과정에서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에 미온적이었던 찰스1세를 설득하느라 곤욕을 치렀었다.
‘엄청난 차관을 탕감해준다고 꼬드겨도 시큰둥하던 찰스1세였지. 그런데 프랑스 영토 분할을 의제로 올리니까 눈빛이 달라졌었다. 결국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난색을 표하니까 실망한 눈치였고 말이야.’
신준묵은 당시 찰스1세의 변화를 눈여겨보았었다.
격론 끝에 찰스1세, 영국은 기존의 차관 탕감을 조건으로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에 참가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은밀히 버킹엄 공작을 보내 새로운 조건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때는 지난 8월 말이었다.
- 폐하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존 차관 탕감으론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아무래도 영국은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에서 빠져야 하겠습니다.
- 버킹엄 공작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남도 아닌데... 속 시원하게 털어 놓으시지요.
- 크흠, 런던공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털어놓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폐하께서는 의회 도움 없이는 전쟁이 무척 어렵습니다. 의회 의안에 전쟁예산만 올리면 사사건건 반대를 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기존 차관 탕감으로는 군대를 움직일 돈이 없습니다.
- 그럼...?
- 흐흐, 런던공사께서 통 크게 전비를 지원해 주시오! 우선 3백만 파운드면 되겠소이다. 대신 뉴펀들랜드와 뉴잉글랜드의 세금징수권을 포기하겠소. 매년 30만 파운드의 세금이 걷혔으니 10년 치를 선납하고 끝내는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군요.
- 음, 그 정도라면 제 선에서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공작각하! 정말 이걸로 끝입니까?
- 크하핫! 내가 이래서 런던공사를 좋아한다니까... 폐하의 진정한 목표는 첫째가 왕권확립이고, 둘째가 프랑스의 고토회복이오. 그걸 위해선 영국 내부부터 통합해야 하는 것이지. 거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겠소? 폐하께선 버지니아까지 한국에 쾌척할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 ... 그럼 얼마나 원하시는지요?
- 런던공사! 그거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폐하께서는 일단 1천만 파운드를 말씀하셨습니다.
- 흠, 좋습니다! 대신 이렇게 하시지요. 왕립으로 가칭 ‘남해주식회사’를 창립하는 겁니다. 회사의 목적은 인도와 아메리카와의 대외무역을 담당하는 회사로 하구요. 거기에 채권과 주식을 대거 모집한 다음, 일정한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겁니다. 그걸 순차적으로 진행해서...
- 아 그거 참으로 좋은 계획이오! 그럼 주식과 채권가격이 오를 때마다 새로 발행해서...
‘후후, 남해주식회사는 정말 짭짤했다. 꿩 먹고 알 먹기였어. 사람의 욕심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나야말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감히 청하진 못하나 본래부터 바라던 바)이었지. 이제 슬슬, 언제 터트릴 지만 생각하면 되겠어.’
신준묵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수하의 보고를 애타게 기다렸다.
잠시 후.
수하가 낭보를 전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이미 제거되었습니다. 런던 뒷골목에서 실행했고, 시체는 템즈강 바닥에 돌을 묶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인 암살자는 바로 배를 태워 보냈습니다.”
“수고했네!”
신준묵은 두 손을 불끈 쥐며 눈을 감았다.
‘이제 찰스1세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의회를 없애고, 영국 왕의 역린이자 과거의 영광, 꿈에서도 그리던 프랑스 내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나설 것이다.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의 얼개가 드디어 완성됐다.’
영국의 대격변 2
1630년 12월 10일, 영국 런던.
영국 의회.
“나는 여러 의원들을 위한 공복(公僕)이지만 동시에 찰스1세 폐하의 신하이기도 하오!”
존 핀치 하원의장은 강경파 의원들을 만류하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격앙되어 항의를 이어갔다.
한 의원이 앞에 나서서 찰스1세를 질타했다.
“흥! 우리는 의회의 오랜 관행과 선례에 따라, 수출입 관세는 국왕 즉위 후 1년 동안만 징수할 수 있도록 의결했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지난 1625년 3월에 즉위한 이후, 계속 수출입 관세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한국과의 밀약이 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뿐이 아닙니다! 1626년부터는 강제공채(Forced Loan)를 통해 의회를 거치지 않고 자금을 모집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구속시켰습니다. 이는 대헌장의 인신보호령을 위반한 중대한 사항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 코크가 나서서 결정타를 날렸다.
“만약 폐하께서 권리청원을 정식으로, 그것도 법률로써 승인한다면...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그 즉시, 하원 전체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권리청원은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 재판 없는 구속, 계엄령과 강제 임시숙소령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꿀꺽.
존 핀치 하원의장은 마른 침을 삼키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정회를 선포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잠시 정회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땅땅!
곧이어 ‘누구 마음대로 정회를 하냐’는 둥 온갖 악다구니가 이어졌다. 하지만 온건파 의원들이 나서서 강경파 의원들을 의회 밖으로 이끌었다.
“하하! 이번 회기는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회의는 오늘만 있는 게 아니니 커피나 한잔 하러 갑시다.”
“그래요!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강경파 의원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들의 회유에 따랐다.
...
잠시 후, 의회 근처 커피하우스.
“에잉, 크롬웰 의원은 대체 어디로 간 거요?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고 여행을 간다니... 이렇게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에드워드 코크 의원께서는 짐작되는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에드워드 코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저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아주 중요한 용무가 있는 모양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직후에 의회 소집 발표가 있었으니... 마냥 비난할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크흠, 누가 비난했다고... 그냥 아쉽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쉽다고 말입니다. 이번 기회에 권리청원을 승인받아야 하는데...”
그때였다.
“주문하신 커피와 과자가 나왔습니다!”
탁.
강경파 의원들은 곧 커피와 과자를 즐기며 화제를 전환했다.
“하하! 요새는 남해주식회사 주가를 확인하는 재미로 삽니다!”
“오! 존스 의원도 남해주식회사를? 그거 아주 짭짤하지요. 저도 되는대로 모두 밀어 넣었습니다. 조만간 열배까지 폭등한다고 하니 기대됩니다.”
“...”
“...”
왁자지껄.
에드워드 코크는 다른 의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던 상관없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올리버 크롬웰이 있어야 행동파 의원들을 제어할 수 있는데... 자네 대체 어디로 간 건가? 이런 중차대한 시국에...’
그의 심정은 방금 전 올리버 크롬웰의 부재를 옹호하며, 괘념치 않았던 태도와 정반대였다.
‘어서 돌아오게! 자네가 있어야 해. 자네처럼 강단 있는 친구가 있어야 찰스1세의 폭주를 막을 수 있어.’
그의 간절한 외침은 그저 가슴 속에서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찰스1세의 집무실.
“2천만 파운드...”
찰스1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다시 근엄하게 물었다.
“크흠, 그럼 남해주식회사 주식매각대금만 2천만 파운드라는 건가?”
버킹엄 공작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런던공사가 약속한 돈의 정확히 두 배입니다... 한국은 정녕 굳건한 동맹국 아닙니까? 크흑!”
버킹엄 공작은 지난동안 재정부족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건 찰스1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보게, 공작! 자네 왜 이러나? 이렇게 기쁜 날에 어찌...”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왕 제임스1세 때부터 이어온 고질적인 재정문제는, 1625년 즉위한 이래 찰스1세의 숨통을 죄어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