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25)

그때 김련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아버님! 부총독의 감시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폐하께 잘못된 보고를 올릴지 모릅니다. 그러니...”

김자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고, 바다는 한 줄기의 강물도 밀어내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폐하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포용’, ‘관용’을 의미하는 말이니라. 적까지 모두를 끌어안음으로써 제국이 되는 것! 참 좋은 말이다. 나도 공감하는 바다. 그러나 그게 그냥 된 다더냐?”

벌컥.

술잔을 다시 비운 김자점이 말을 이었다.

“흥! 진시황(秦始皇)이 춘추전국을, 한고조(漢高祖)가 초한쟁패를 끝낸 것을 떠올려 보아라. 지금 사람들은 통일이 된 진(秦), 또 그 뒤를 이은 한(漢)만을 또렷이 기억한다. 반면 춘추전국시대와 초한쟁패의 끔찍했던 전쟁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저 하늘에 태양처럼 빛나는 그들의 위업엔 피로 점철된 무수한 희생이 있었느니라. 폐하께서도 이를 잘 알고 계신다. 그런 이유로 북아메리카의 통합, 통일에 있어, 용광로를 언급하신 것이다. 용광로의 쇳물이 나온 결과물을 보라! 그 무엇보다 결과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과정은 어찌되었든 말이다. 역사는 결국 진시황과 한고조를 기억한다. 더 이상 구구한 설명은 필요 없다. 이것이 정답이다!”

김련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조아린 채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김자점이 탄식하듯 말했다.

“폐하께서는 밀서를 보내시면서, 큰 틀을 제시한 다음 나머지 세부적인 내용은 우리에게 일임하셨다. 따라서 이는 단지 폐하의 의중에 대한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내가 장평대전의 백기처럼, 또 초패왕 항우처럼 수십만 항병을 생매장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설령 그런다고 해도,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또 폐하께선 나를 벌하지 않으실 게다.”

“아버님, 그렇다면...”

“그래, 가만히 놔둬라! 개노미 그 친구가 좀 더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그는 착각하고 있어. 인디언 부족들에겐 유럽인들만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 역시 이방인이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도적이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은 것이지. 그들이 지금,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까닭은 오직 힘과 세력이 부족해서일 뿐이다. 인디언들의 합종연횡이 곧 시작될 것이고, 결국 패한 인디언들이 아름다운 포용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폐하께서 바라는 진정한 포용이고 관용이다. 이것이 나의 해석이다. 그리고 가장 빠른 길이며, 정답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폐하께서 내린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

다음 날 아침, 제임스타운.

런던 버지니아 회사.

“흥! 그건 헛소리요!”

개노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손뼉을 딱 치더니 물었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했을 리는 없고, 김자점이 흘렸겠군?”

김세연은 어이가 없는 듯, 콧김을 크게 내뿜더니 부인했다.

“아닌 데요!”

“시침 떼도 소용없소!”

순간 김세연이 눈을 확 치뜨며 노려보았다. 그녀의 화난 얼굴에 움찔한 개노미가 고개를 돌리며 패배를 자인했다.

개노미가 타이르듯,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 승자만 패자를 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패자 역시 선택권이 있어요.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로 귀결되겠지만 말이오! 패자도 승자의 아량을 살펴서 어떤 자격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할 겁니다. 물론 승자와 동등한 자격을 얻는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오. 그런다면 선택은 아주 쉽겠지. 반면 치욕적인 굴종, 노예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면... 죽음으로써 결연히 맞설 것이오. 단순히 폐하의 밀서를 결과론적으로 해석할 순 없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원한이 잊히고 하나의 가족, 마을, 나라가 바로 서려면... 올바른 시작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후손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이 ‘포용’, ‘관용’이라면 더더욱 말이오! 이것이 나의 해석이오!”

영국의 대격변 1

1630년 12월 1일, 영국 런던.

영국 의회 근처 커피하우스.

“벌써 몇 년쨉니까? 폐하께서 의회를 해산한 것이 말입니다.”

하원의원 올리버 크롬웰은 거침없이 국왕 찰스1세에 대해 성토했다. 그의 옆에는 같은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도 묵묵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1628년, 3년에 걸쳐 프랑스 라 로셸의 위그노를 지원하느라 엄청난 재정을 탕진한 찰스1세는 의회에 전쟁특별세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러자 의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찰스1세에 대해 권리청원을 들이밀었다. 권리청원은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으로, 세금 부과에 있어 의회의 자유권을 승인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의회는 예정된 승리에 희희낙락했었다.

- 폐하께서 절벽 끝까지 밀리셨어.

- 흐흐, 누가 아니래? 드디어 1297년 대헌장, 인스펙시무스를 보완할 수 있겠군.

- 그건 에드워드 코크 경의 오랜 숙원 아니오?

- 에드워드 코크와 올리버 크롬웰이 확실히 강경파긴 하지.

- 권리청원은 이제 찰스1세 폐하의 서명만 남았어. 내가 장담한다.

-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이겼어.

에드워드 코크는 오랜 기간,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을 연구해왔다. 1215년 존 왕이 승인한 대헌장 및 1297년 수정본과 인스펙시무스까지가 연구대상이었다.

또 판사로 시작해 영국 법원장까지 지내면서 법의 지배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법적 근거로 인용한 것이 대헌장과 인스펙시무스였다.

그는 최고의 법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대헌장이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대헌장의 자유는 귀족만이 아닌 개인의 자유와 같은 것이라 본 것이다.

이는 국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성문법 우위를 주장하는 견해였기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결국 1628년 권리청원 토론 도중에, 찰스1세는 분노의 일성과 함께 의회 해산을 선포했다.

- 에드워드 코크! 군주의 권리와 개인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 감히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 순 없는 것이다. 나는 권리청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즉시, 의회를 해산한다.

찰스1세가 떠난 후에도, 의회는 실망하지 않았다.

- 흥! 폐하께서도 곧 고개를 숙이고 의회 문을 두드릴 것이오.

- 맞습니다. 돈이 나올 구멍이 없지 않습니까?

- 하하하! 권리청원 내용을 보다 강화해야겠습니다.

- ...

권리청원을 주도했던 에드워드 코크와 올리버 크롬웰도 더욱 기세등등했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찰스1세의 백기항복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때문에 의회의 권리청원 요구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뭐라고? 런던조약으로 한국이 은화 100만 파운드를 제공했다니!

- 거기에 매년 30만 파운드의 관세가 들어올 예정이랍니다.

- 런던조약은 나라를 팔아먹은 거 아니오?

- 크흠, 그건 아니지. 아메리카는 왕령 식민지니까.

- 흥! 한국이야말로 눈엣가시로군. 감히 권리청원을 막아서다니.

- ...

웅성웅성.

커피하우스 안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요즘 폐하께서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돈이 어디서 났는지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키느라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으니까요!”

에드워드 코크도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럽 어딘가에서 또 전쟁을 하시려는 생각이겠지. 아마 한국이 대줬을 걸! 하지만 한국도 언제까지나 돈을 대주진 않을 테고, 곧 돈이 떨어지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걸세. 휴우...”

올리버 크롬웰은 에드워드 코크의 한숨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의심을 이야기하기엔 다소 일렀다. 

‘찰스1세 폐하의 진짜 목표는 의회, 아니 영국내에서 국왕을 반대하는 모든 반대세력입니다. 젠트리, 요먼, 청교도 등 모두를 말입니다.’

잉글랜드 동부의 헌팅턴에서 태어난 독실한 청교도이자 젠트리 계급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은, 그의 의심을 조용히 삼키고 말았다.

‘그래 아직은 아닐 거야! 그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좀 더 확실한 증거를 모아야겠어.’

...

같은 시각, 찰스1세의 집무실.

“군사 훈련은 잘 되어가고 있나?”

“물론입니다. 폐하!”

버킹엄 공작은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찰스1세의 왕당파 군대는 대(對)프랑스 비밀동맹 체결 이후부터 언제든지 유럽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맹훈련 중이었다. 

그런데 원정에 가장 필요한 해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육군을 키우는 것에 힘썼다.

찰스1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버킹엄 공작을 치하했다.

“하하! 수고했네. 그런데...”

동시에 찰스1세와 버킹엄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안심하고는 찰스1세가 다시 말했다.

“의회 강경파 명단은 모두 확보했나?”

“네 폐하! 에드워드 코크는 물론이고 올리버 크롬웰, 에섹스 백작, 맨체스터 백작, 토머스 페어팩스, 알베마를 공작, 마이클 존스, 헨리 이레턴 등으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찰스1세는 손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곤 단호하게 말했다.

“에드워드 코크는 특별재판소에서 철저히 심문 후에 처형해야 할 것이야!”

왕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찰스1세의 특별재판소에서 재판과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참혹한 죽음이 예정된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찰스1세의 명령이 다시 이어졌다.

“당장 의회를 열어, 의회 강경파가 모이는 것을 확인하고 모조리 체포해! 그리고 그 사이에 에섹스 백작 등 의회파 귀족들의 영지를 싹 쓸어버려라!” 

“해군은 어쩔까요? 의회를 지지하는 함장들이 다수 있습니다.”

찰스1세는 잠시 고민하다가 명령했다.

“음, 해군은 개입할 수 없도록 당분간 순항훈련을 지시한다. 아일랜드를 돌아서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이날, 의회가 무려 2년 만에 다시 소집되었다. 

의회는 즉시 환호했고 각지로 흩어진 의원들에게 희소식을 알렸다. 

...

한밤중, 런던 공사관.

“의회가 소집됐습니다.”

런던공사 신준묵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되물었다.

“올리버 크롬웰은?”

“지금쯤 요단강을 건너고 있을 겁니다.”

신준묵은 수하의 답변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엄히 말했다.

“함부로 예단하지 마라! 그놈은 지난 런던조약 이후로 꾸준히 우릴 감시해왔던 놈이다. 게다가 폐하께서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엄명까지 내리셨다. 다시 확인하라!”

수하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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