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25)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찰스1세와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 등 수많은 유럽 국가들의 알력은 미지(未知)의 영역이었다.

내가 알던 역사는 이미 크게 뒤틀린 상태... 모두 나의 선택, 그리고 내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결과였다.

먼저 스페인의 몰락은 유럽30년 전쟁을 허무하게 빨리 끝내는 악수(惡手)였다. 곧 유럽의 전쟁이 끝나면 그들의 경계가 시작될 것이다.

또한 스페인의 몰락으로 네덜란드가 완전히 독립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새로운 패권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만든 대(對)프랑스 비밀동맹과 아메리카 연합회의가 있다.

나는 가만히 미래의 적국이 될 나라들을 떠올렸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그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순 없었다. 나도 그렇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합종연횡에 익숙하니까.

‘만약 유럽이 일치단결해서 윽박지른다면? 아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중에 두 나라만 힘을 합쳐도 불안하다.’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는 상상이었다. 

‘그래 역시 합종연횡(合從連橫)과 이이제이(以夷制夷)다.’

고심을 거듭할수록 대(對)프랑스 비밀동맹과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결성이야말로, 정말 잘한 일이라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머지는 아메리카로 가면서 생각하자. 아니, 도착해서 생각해도 되겠지. 런던공사는 그런대로 성과가 보이는데, 개노미는 어쩐지 소식이 없군. 혹시 무슨...’

북아메리카 동부의 변화

몇 년 전만해도, 북아메리카 동부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 4개 나라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최초 식민의 역사는 15세기부터였다. 

영국은 뉴펀들랜드, 뉴잉글랜드, 버지니아(제임스타운) 등을, 프랑스는 퀘벡과 아카디아 등 누벨프랑스를.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뉴욕)과 뉴네덜란드를, 스페인은 세인트 어거스틴 요새(플로리다)를 각각 선점해서 식민지로 삼았다.

역사는 수백 년간 그대로였다가, 17세기 초반에 급물살을 탔다. 

1627년 런던조약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펀들랜드와 뉴잉글랜드가, 연이어 1628년 암스테르담조약으로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가 한국에 정식 할양되었다.

한국이 북아메리카 동부 대부분을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두 조약엔 ‘꼼수’, 아니 명백한 ‘독소조항’들이 존재했다. 

영토 반환요구나 기타 개입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영국은 일부 세금징수권을,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자국 사업의 기득권을 보장받는 형식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한국 국왕은 이를 용인했다. 사이가 틀어지면 곧 터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현재 기준으로,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한국의 영토가 아닌 곳은... 

영국의 ‘버지니아(제임스타운)’와 스페인의 ‘세인트 어거스틴(플로리다)’, 단 두 곳뿐이었다.

...

1630년 11월 어느 날, 제임스타운.

런던 버지니아 회사.

개노미는 창문을 두드리는 거센 바람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덜컹.

휘이잉.

북아메리카의 매서운 겨울이 점점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올해는 무척 춥겠어.’

겨울의 어둠은 더욱 빨리 물들었다. 해 저문 지 금방인데 창밖은 벌써 한 치 앞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했다.

개노미는 다시 책상 위로 눈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으니까.

쓱싹.

문득 김세연이 다가와 따뜻한 차를 내려놓으며 눈으로 웃었다.

탁.

“쉬엄쉬엄 하세요!”

개노미 역시 그윽한 눈빛으로 마주보며 말했다.

“고맙소!”

찻잔을 들어 보이며 거듭 감사를 표한 개노미의 눈매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김세연은 개노미의 어깨를 모포로 감싸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폐하께서 곧 오시겠죠?”

“아마, 곧.”

“...”

김세연은 입술을 열 듯 하다가 다시 닫으며,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고 말았다. 몇 달 전 서울에서 도착한 밀서는 변동사항이 없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웃기만 했다.

다다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흠칫 놀라며 떨어졌는데, 그 목소리는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우훗, 추워! 이런,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구려!”

김자점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화롯불 앞에 철퍼덕 앉았다. 또 미안하단 말과 달리, 이내 코를 벌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향기 좋군. 거 좋은 것은 나눠야 제 맛 아니오? 나도 좀 주시오!”

개노미는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무슨 생각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 아닌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술 한 잔을 따라 건네주었다.

김자점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속이 후끈하군. 역시 각하의 취향은 참 고급이야!”

김세연은 김자점이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다 이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후, 김자점은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수도 예정지(현대 미국 워싱턴DC의 위치)의 요새공사는 그럭저럭 끝났소. 다음으로 폐하께서 거하실 궁은 위그노와 영국 기술자들이 맡았고, 그들 의견대로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과 영국 윈저 성을 본 따 건축될 예정이오. 기초공사를 위해 터를 잘 닦았고, 내년 봄이 되자마자 착공할거요. 폐하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기념비적인 상징이 될 것이라 생각하오. 아주 훌륭하게!”

개노미는 김자점의 우쭐거리는 모습에 쓰게 웃으며 물었다.

“폐하께서 거하실 임시궁궐과 도로는?”

김자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흐흐, 욕심꾸러기! 임시궁궐은 벌써 지붕까지 얹었고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완공될 거요. 투박하지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소이다. 아차! 한잔 더 주시오.”

쪼르륵.

다시 한잔 술을 벌컥 들이킨 김자점이 대답을 이었다.

“도로는 순차적으로 개통될 것이오. 우선 뉴암스테르담(뉴욕)에서 수도 예정지를 연결하는 도로는 인디언 부족들이 통행하던 곳을 약간만 손보면 될 것이고, 다시 수도 예정지에서 제임스타운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부두까지만 연결했소이다. 아무래도 해로가 중심이니 말이오. 도로표지석이나 필수설치물들은 호주에서의 예를 따라 꼼꼼히 작업하고 있소. 자! 여기 상세한 작업현황을 기록한 보고서요.”

툭.

개노미는 보고서를 보지도 않고 던지며 지나가듯 말했다.

“알아서 잘 하셨겠지요!”

김자점은 잠시 멈칫하더니 아주 밝게 입을 열었다.

“하하! 역시 각하께서는 판단이 정확해! 나 김자점이오, 김자점... 서로 믿고 맡기니 얼마나 좋소? 우리는 친구이며 동맹관계이니 말이오. 세상 모두가 적이 되어 돌아서더라도, 우린 힘을 합쳐야 하오.”

“...”

개노미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자점은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틀어졌던 과거는 모두 옛일인 듯 말이다.

잠시 후.

“... 결국 김자점의 의도는 뻔합니다.”

순간 개노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조바심내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수하는 보고를 이어갔다.

“여기 수도예정지 지도를 살펴보시면 더욱 확실합니다. 지도상에 표시한 위그노 이주민과 영국계 한국인, 기타 유럽 이주민들의 신규 정착촌 위치를 확인해 보십시오.” 

개노미의 눈에 들어온 지도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뒤죽박죽이었다. 

빨간 점은 인디언 부족, 노란 점은 위그노 이주민, 파란 점은 영국계 한국인, 초록 점은 기타 유럽 이주민을 의미했다. 그 점들 아래엔 세필(細筆)로 부족명 등 출신지와 정착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시기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종교와 거주이전의 자유, 재산권의 보장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프랑스 라 로셸에서 이주한 위그노가 3만, 영국계 한국인도 3만으로 엇비슷하군. 기타 유럽계 이주민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다. 갈수록 유럽 이민자의 증가세가 뚜렷해.’

수하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아무리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인디언 입장에서는 명백히 이방인입니다. 달가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도 예상한 바와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특히, 현재 수도예정지 근처에 거주하는 코노이, 델라웨어, 난티코크와 쇼니 족 등 열 개 이상의 인디언 부족들이 가장 크게 들썩이고 있습니다. 이는 김자점과 그의 아들 김련이...”

곧이어 개노미의 눈썹은 꿈틀거리다 못해 일그러지고 말았다.

...

같은 시각, 제임스타운.

김자점의 집.

타닥타닥.

“에취!”

무슨 이유인지 머리끝이 쭈뼛하게 서며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김자점은 연신 재채기를 하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쪼르륵.

몇 차례 화주(火酒)를 들이킨 연후에야 재채기가 멎었다.

“아버님! 수도 건설공사에 그간 심려가 크셨습니다. 좀 쉬엄쉬엄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자점은 김련의 걱정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하하! 걱정할 것 없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

김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보고를 이어갔다.

“코노이, 델라웨어, 난티코크와 쇼니 족 등 몇몇 부족들이 평화조약을 운운하며 항의했지만 결국 순응했습니다. 이제 수도 예정지 근처에는 인디언 부족민과 위그노 이주민, 영국계 한국인, 기타 유럽계 이주민들의 숫자가 비등비등합니다.”

김자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후, 이미 예상한 바가 아니더냐? 평화조약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 힘없는 자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지. 서부와 마찬가지로 동부 역시 인구역전이 곧 일어날 터, 걱정할 것은 없다. 그때까지 쭉정이들을 솎아내는 것이 나의 사명일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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