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말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뭐여? 이번엔 내가 먼저야!”
“저리 비켜! 난 어제도 받지 못했어. 오늘은 무조건 내가 먼저다.”
“어머!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저리 비켜욧!”
“뭐? 이 여편네가... 내가 만지긴 어딜 만져! 당신이 저리 비켜. 먼저 와서 줄을 선 건 나야!”
그동안 정말 사이좋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관용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무언가를 먼저 받겠다고 서로 밀치며 싸웠다.
정말 난장판, 북새통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모두 얌전히 줄을 서서 ‘호주 전시채권’을 ‘북아메리카 인두권(Headright)’으로 교환했다.
꿀꺽.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마른 침을 삼키며 먼저 말을 꺼냈다.
“와! 이거 참 영롱하군... 별이 다섯 개, 무려 다섯 개라니!”
“폐하께서 직접 약속하신 것 아닌가? 금박으로 별이 다섯 개라고, 무려 다섯 개! 그뿐인가? 폐하의 서명과 어보(御寶:옥새)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어. 이거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지. 평생 소장할거다.”
“호주에서 각자 유상분배 받았던 땅의 다섯 배나 주신다는 의미 아닌가? 게다가 전시채권 구입금액에 따라 차등해서 더 주신다고 하셨지. 이건 안 받는 놈이 병*이야!”
“그런데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거기에 두 배를 더 준다며?”
“그건 당연하지! 시민군으로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지만 현역군인과 상이군인 유가족은 거기에 더 큰 혜택을 준다고 정식 발표했잖아!”
“들리는 말로는... 북아메리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며? 그게 참말인가?”
“뭔 말이 많아! 폐하께서 허접쓰레기 땅을 나눠주실 분인가? 우리가 조선에서 호주로 왔을 때를 잊었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해! 어서 북아메리카로 떠날 준비를 하자고. 거기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선택권을 주고, 땅도 더 주신다고 말씀하셨잖아.”
“이게 맞는 말이지!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나야지. 남는 사람들도 떠날 사람들의 땅을 이어받아 더 큰 규모로 농사지을 수 있잖아. 호주에서는 기존에 유상분배 받은 땅을 늘리고 대농장을 만들려면 너무 힘들었으니. 아무래도 대농장이 수입 면에서 유리하고 말이야.”
웅성웅성.
...
같은 시각, 한고립의 집.
“우하핫! 나는 이제 부자다!”
한고립의 환호성에 송준길이 피식 웃으며 핀잔했다.
“후후, 한 형께서는 지난주만 해도 세상 무너진 듯 슬퍼하며 폐하를 원망하지 않았소?”
잠시 멈칫했던 한고립은 이내 딱 잡아떼며 고개를 돌렸다.
“흥! 내가 언제? 난 그런 기억이 없어.”
그리고 금박으로 된, 별이 무려 열 개나 새겨진 ‘북아메리카 인두권(Headright) 증서’를 마치 금덩이마냥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송준길은 한고립의 태세전환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대박’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하하! 내 귀가 잘못된 모양이구려. 하여간 한 형께서 큰 부자가 되셨으니 나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제 술은 원 없이 얻어먹을 수 있겠군요.”
그때 송시열이 이왕과 함께 들어왔다.
송준길이 반색하며 재빨리 물었다.
“그래 이번엔 성공했나?”
그러나 송시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 반면 이왕의 안색은 밝았다.
이왕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아쉽게도 이 아우만 성공했습니다. 시열 형님께선 인파에 밀려 자칫 크게 다칠 뻔 하셨고요.”
한고립은 이왕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에게 무언가를 고대하는 듯 눈치를 주었다. 이왕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인두권 증서를 꺼내 보였다.
마치 빼앗듯이 이왕의 인두권 증서를 살펴본 한고립은, 이내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송준길이 혀를 차며 타박했다.
“쯧쯧, 한 형이야 온 재산을 탈탈 털어 전시채권을 구입하지 않았습니까? 적당히 구입한 ‘왕’ 동생과 비교할 것이 아닌데... 그럼 혹시, 아직도 ‘왕’이한테 꽁한 건 아니시지요?”
“무, 무슨 소리야? 나 한고립이야! 나 꽁한 적 없어...”
한고립은 순간 펄쩍 뛰며 부인하려 했지만, 결국 순순히 굴복하고 말았다.
“끄응,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사과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특별히... 그래, 궁중갈비 쏜다! 다들 나가자!”
“오오! 짠돌이 한 형께서 궁중갈비를? 이거 천지개벽이 따로 없네.”
송준길의 감탄사에 송시열과 이왕도 입맛을 다시며 각자 한마디씩 더했다.
“오랜만에 궁중갈비를 포식하겠습니다.”
“이 아우도 기대됩니다.”
한고립은 호기롭게 다시 외쳤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자! 나 한고립이야, 한고립!”
...
같은 시각, 내각 대회의실.
“... 전시채권 회수율은 벌써 9할을 넘어섰습니다. 다음 주면 모두 회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시채권 문제는 정말 ‘쾌속순항’ 중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수상과 내각의 반대는 너무나 당연했다.
- 폐하! 거두어 주십시오. 이는 모든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 결국 전시채권이 그냥 일시적인 전쟁 특별세가 된 셈입니다. 앞으로 세금을 거둘 때마다 국민들의 조세저항이 우려됩니다.
- 만약 그대로 강행하신다면, 국민들의 거센 반발이...
- 국민의 재산을 이리 함부로 빼앗는 것은, 결국 폐하의 거룩한 이름에 먹칠을...
그렇다! 그들의 말은 단 하나도 그릇된 것이 없었다. 정말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나의 자세한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따라서 전시채권은 ‘북아메리카 인두권 증서’로만 교환해줄 것이고, 그만큼 엄청난 혜택을 부여할 것입니다. 호주 국민들에게 땅을 유상으로 분배한 것과 같은 형식이 됩니다. 전시채권을 화폐로 상환 받는 것보다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 이상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모두 아시겠습니까?
- 크흠,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 폐하! 그런데 너무 많은 이득이 아닐까요?
- 이 정도면 국민들도 찬성할 겁니다.
- ...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북아메리카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정도 메리트(Merit)라면 국민들의 마음도 크게 끌릴 것이다.’
북아메리카 동부는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최초 제도도입에 이어, 또 나의 명령에 따라 인두권 제도(Headright System)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인두권 제도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원활한 개발을 위해서 도입한 제도였다.
그리고 그 핵심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주식을 사는 사람과 가족에게, 또한 일을 열심히 하는 일꾼들에게 각각 50에이커의 땅을 주는 것이었다.
결국 투자 또는 노력하는 자에게 보상을 주는 제도였다. 내가 호주 이주민들에게 땅을 유상으로 분배한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그 어디서건 공짜로 땅을 나눠준 적이 없었다.
조선에서도 유상으로 분배했고, 호주와 아메리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땅을 먼저 나눠준 다음, 소정의 경작료를 산정해 받고서 정식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공짜는 사람을 좀 먹는다. 그리고 내 소유라는 관념이 희미해지지. 사람은 내 땅, 내 집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재산, 내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법이지. 특히 한국인은 부동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 아닌가! 또 자녀교육과 명품도...’
전시채권 문제는 곧 행복하게 끝날 것이다. 이제 아메리카로의 천도만 남았다.
나는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수상! 그럼 천도(遷都)준비는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
한밤중, 왕궁 집무실.
탁.
나는 ‘천도(遷都)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지난 과거를 떠올렸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어.’
한국과 스페인은 동맹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동맹은 오늘의 적이 되었다. 처음 동맹의 관계가 틀어진 건 스페인의 얄팍한 제안과 섣부른 오만에서였다.
‘맞아, 그들이 먼저 나를 자극했어. 한국을 적당히 이용하다 버리려는 얄팍한 속셈, 거기다 언제든 제어할 수 있단 오만까지...’
스페인은 한국을 이용해 네덜란드 사략선, 해상무역은 물론 독립까지 옥죄고자 했었다. 가볍게 써먹다 버릴 장기 말, 속된 말로 ‘한국’을 ‘졸(卒)’로 보았던 것이다.
나는 스페인의 오만에 치를 떨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을 믿고 있었으니까.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란 국제관계의 비정한 철칙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저 호주에 만족하려고 했었다.
스페인의 패권에 맞서지 않고, 적당한 강대국으로써 자존독립(自尊獨立)하려는 정도로...
하지만 나의 소망은 스페인의 야욕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스페인은 네덜란드가 정리되는 즉시 한국을 정리할 속셈이었다.
두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정말 위기였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란 말처럼 운도 따랐다.
‘스페인의 오만이 아니었다면 기회가 없었다. 설마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상통제권, 게다가 북아메리카 서부까지 양보할 줄은 몰랐지.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 기회로 나는 스페인의 뒤통수를 쳤고, 마침내 한국이 스페인을 꺾은 것이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을 끝으로, 세계에 군림하던 스페인의 패권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재기도 이젠 불가능했다. 아메리카의 금과 은에 이어, 마지막까지 믿었던 무적함대조차 모두 잃었으니까.
‘스페인은 몰락했다.’
마지막 간단한 두 마디 말로 과거의 정리는 끝났다.
나의 고심은 미래로 이어졌다.
과거와 달리 미래는, 아메리카로 천도한 이후는 온통 짙은 안개 속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유럽의 정세는 섣불리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예측 가능한 것은 스페인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유럽30년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등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