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25)

“아아, 정말 안타깝구나! 짐은 분명 모두 살려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어찌 부하가 상관을 해한단 말인가? 오늘 짐이 스페인 고위 장교, 아니 패역의 무리들을 벌했던 것은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천번 만번 옳은 일이다. 오켄도 사령관이야말로 시의는 물론 충의를 아는 참된 군인이로다. 수상!”

수상은 나의 부름에 즉시 대답했다.

“네 폐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쾅!

나는 분노한 척, 책상을 내리치고는 엄숙히 말했다.

“스페인 병사들에게 오켄도 사령관의 비참한 최후를 사실대로 알려라! 또한 오늘 강화협상장에 오켄도 사령관이 나타나지 않은 이상, 강화협상은 정식 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의 약속도 우리가 지킬 의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스페인 병사들을 포로의 예로 정중히 대우하겠다고 일러라!”

“네 폐하!”

이제 전쟁은 마무리 수순이었다.

내각은 다시 바빠졌다.

쪼르륵.

나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망중한을 즐겼다.

...

다음 날. 

왕궁 연회실.

“폐하께서 마련해주신 이 자리를 빌어...”

왁자지껄.

개선식에 앞서 작은 자리를 만들어 수상을 비롯해 여러 고생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자 모두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쨍.

와아.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편히 쉬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스페인과 전쟁이라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었다.

수상이나 다른 각료들은 나를 찬양하며 우러러보지만,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냥 천운(天運)이었다.

‘후우! 지장(智將), 용장(勇將), 덕장(德將) 다 필요 없다. 그냥 운(運)이 최고다. 나는 운장(運將)이 되련다.’

식량이 떨어진 스페인 무적함대는 항복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살길이 있는데 죽을 생각부터 하는 사람은 없다. 

죽은 정승이 산개만도 못하단 옛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이간계가 통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먼저, 적의 항전의지를 없애기 위해 강화협상을 제의하고 식량을 제공했다. 그 다음엔 포로를 송환시켜 적의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또한 포섭된 포로들을 잘 활용한 것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스페인군 계급 간 식량배급 차별과 사령관 오켄도의 제거였다.

다시 말해, 스페인군 상하간의 내부분열과 오켄도를 정점으로 한 지휘체계의 붕괴를 유도한 것이었다. 

특히 ‘1천만 굴덴’의 돈에 눈이 멀어 오켄도를 제거한 것이 컸다. 오켄도의 제거는 내가 은밀히 유도했지만, 실제로 오켄도를 제거한 스페인 고위 장교들의 행동은 정말 어리석었다.

‘어쨌든 놈들의 헛된 욕심 덕분에 오켄도와 고위 장교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스페인 병사들도 환멸을 느꼈겠지. 오켄도가 내부의 반란으로 죽었고, 다른 고위 장교들도 같은 이유로 제거된 이상 조직적 반항은 없을 것이다.’

그때, 수상이 외교부장과 함께 와서 낭보를 전했다.

“폐하! 런던공사가 대(對)프랑스 비밀동맹의 대업을 이뤄냈습니다.” 

“뭐라고? 대프랑스 동맹이...”

쨍그랑.

나는 너무 놀라 손에 든 술잔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수상! 우리의 승리, 아니 스페인 무적함대의 괴멸은 최대한 늦게 알려져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우리가... 북아메리카에 도착할 때까지 말입니다.”

...

사흘 후, 서울 광장.

“대한 만세!”

쾅쾅.

와아아.

예식용 대포의 포성과 시민들의 환호성이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

석재로 잘 포장된 서울 광장의 대로 좌우에는 ‘한국군과 시민군’의 개선을 환영하는 서울 시민들로 가득했다. 대로의 정 중앙에는 각 제대별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개선행사는 무려 4시간에 걸쳐 성대하게 진행됐다. 

수상 이하 모든 관리들이 왕궁 앞에 도열했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개선식을 구경하러 나왔다. 시민들이 참여해 푸짐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은 개선식 참가자 전원에게 나눠주었다. 

이번 개선식은 온 국민의 축제가 되었다.

나는 서울 광장의 단상에 앉아 개선식 행사를 관람했다. 

물론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의식에서는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을 딛고 일어나 미래를 향한 장대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래서 개선식을 국민의 대축제로 만들었다. 

사실, 국민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쟁과 같은 국난(國難)은 없어야 좋다. 그러나 없을 순 없다. 그래서 그런 국난극복의 역사가 국민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다. 솔직히,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것에는 대전쟁의 승리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 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없겠지. 이들이 호주로, 아메리카로 가는 것은 보다 나은 삶, 더 넓은 세상을 찾아 가는 것... 그래 맞아! 명백히 과거와는 다르다.’

정말 그랬다.

과거 발해가 멸망한 이후, 우리 민족은 결국 한반도에 갇혀 버렸었다. 그 후로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몽골, 명 등에 휘둘리며 숨죽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최근 한민족의 대이동(Migration Period)은 ‘슬픈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과거 게르만족이 유럽으로 그들의 영역을 확장시켰던 ‘게르만민족대이동’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호주에 이어 북아메리카까지...

나는 새로이 고심했다.

‘그래, 스페인을 물리친 이상... 더 이상 유럽의 도전을 마다할 수 없다. 또 다시 시간싸움이군.’

어느 새 장대한 개선식이 모두 끝났다.

...

1630년 10월 말, 호주 서울.

왕궁 집무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폭격을 맞은 양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처럼, 과거의 난리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더 했다. 

무려 스페인과의 전쟁!

호주 국민들은 세상이 무너질 듯 걱정했었다. 혹시 국왕이 파천하고 외적에게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그런 걱정 말이다. 

솔직히 사태가 너무 크면 그 사태를 감당하는 사람들도 벅차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난 전쟁은 호주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놓고 벌어진 일대사건이었다. 

세상은 아직 모르지만, 아니 가능하면 계속 몰라야했다. 우리가 제대로 준비가 끝날 때까지... 물론 그것은 욕심이었다.

그래도 해볼 만했다. 유럽과 호주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으니까.

탁.

나는 [전후(戰後)처리]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이번 전쟁의 전후처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났다. 또한 보고서도 수상의 평소 성격과 같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내가 문제삼고자하는 것은 전시채권이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 앞서, 지난 5월 달에 전시채권을 대거 발행해서 전쟁비용으로 잘 써먹었다. 전시채권의 표면이자율은 무려 3할이고, 5년 거치 10년간 분할상환하기로 의결했었다.

엄청난 이자율에 애국심을 자극했기에, 정말 불티나게 팔렸다. 호주국민 중에 전시채권을 구입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 하하! 이건 안 사는 놈이 바보지.

- 어머! 이건 꼭 사야 돼.

- 흘흘, 꼭 이자율이 높아서가 아니다! 내가 임진왜란을 겪어봐서 아는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꼭 사야 해.

- 와! 대박!

최종적인 전시채권 판매금액은 한국 예산의 2배에 육박했다. 따라서 전시채권 상환금액은 매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당연히 수상의 보고서에는 전시채권의 상환에 대한 세부계획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수상! 여기 전시채권 말입니다.”

수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폐하! 전시채권의 상환이 현재 기준으로는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향후 아메리카의 수입과 재정추계에 따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나는 수상의 말에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그냥 내 뜻을 밀어붙였다.

“호주의 전시채권은 모두 백지화합니다. 다시 말해, 호주 내에선 어떤 전시채권 상환도 없습니다.”

스페인을 넘어 아메리카로

1630년 11월 어느 날, 호주 서울.

스페인과의 전쟁이 끝난 지 거의 한 달. 

참 이상하게도 서울은 물론이고, 호주 전역이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안정을 찾아야 할 시점인데도, 민심은 갈수록 흉흉(洶洶,술렁술렁하여 매우 어수선)했다.

서울 근교 어느 마을.

웅성웅성.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마을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금세 불꽃이 일어날 듯 날카로웠다.

혹시 누군가가, 조금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곧 폭발할 것 같은... 정말 위험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다.

그때... 관용마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덜컹.

“떠...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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