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25)

그들은 서울 항구 돌파작전을 준비하는 와중에 강화협상 제안서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누군가의 말, 아니 비난은 계속됐다.

“사령관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어제 다녀간 한국 사절이 전해준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말씀을 해 보시지요! 대체 왜 숨긴 겁니까?”

“맞습니다! 어제는 한국 사절이 무조건 항복을 윽박질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령관님께서도 입이 있다면 다 털어놓으시지요. 이젠 거짓말 마시구요.” 

웅성웅성.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강화협상 제안서의 내용은 그들이 절실하게 원하던 것... 거기서 더하고 뺄 것 없는 소원, 그대로였던 것이다.

오늘 한국이 스페인 포로를 송환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일이었다.

오켄도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한국의 계략에 넘어가고 말았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식량사정인데... 인도주의로 포장해서 돌려보내는 것을 거절할 수도 없다. 게다가 강화협상 제안서까지 들려서 보내다니... 송환된 병사들은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할 테니 전투의지 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로...’ 

꿀꺽.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짓으로 대화했다. 

결국 참다못한 고위 장교이자 귀족인 누군가가 발작하듯 대들었다. 아예 반말로... 그는 포로로 잡혔다 풀려난 자 중 하나였다.

쾅!

“그럼 아니란 말이냐? 너 때문에 모두 죽게 생겼다.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오켄도를 향한 좌중의 시선은 갈수록 싸늘해졌다. 그리고 좌중의 일부는 허리춤에 찬 권총과 칼을 만지작거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내각 대회의실.

외교부장이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강화협상에 대해 보고했다.

“폐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매일 미주가효를 가득 차려 스페인 고위 장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뚜껑이 없는 상자에 실어 날랐기에 스페인 무적함대의 누구라도 볼 수 있었습니다. 몇몇 장교들이 반발했지만 다른 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외교부장의 보고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수상이 외교부장에게 물었다.

“적정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외교부장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들의 식량이 떨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지난 번 포로로 잡혔던 스페인 고위 장교 몇몇을 이미 포섭하지 않았습니까? 그 중 두어 명이 강화협상에서 스페인 참관인으로 포함되었습니다. 그에게서 몰래 받은 언질로는 벌써 사흘 전에 식량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제가 본 상황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저희가 지급하는 하루치 식량으로 연명하고 있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기엔... 아주 부족하게 주고 있지만 말입니다. 하하!”

수상은 다시 물었다.

“강화조건에 대한 반발은 따로 없습니까?”

외교부장은 잠시 나의 안색을 살펴보다 말을 이었다.

“모두 살려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어찌 반발이 있겠습니까? 한국은 인도적인 이유로 포로들까지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견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인질과 손해배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면합의에 따라 개별적으로 보상까지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후한 강화조건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달리 역전의 가능성이 없는 이상, 곧 받아들일 겁니다. 대신 우리에게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하겠지만요. 오켄도 사령관 본인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으니... 아마 곧 결단하지 않겠습니까?”

...

같은 시각, 스페인 무적함대.

기함 산타 테레사 선실.

오켄도는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곳은 무적함대의 기함이자 사령관의 선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급병사 3명이 무장한 채로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사령관을 대하는 기본 예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고위 장교 몇몇이 크게 웃으며 선실로 들어왔다. 동시에 그 건들거리던 하급병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했다.

“충성! 아무 이상 없습니다!”

“하하, 수고했다. 모두 나가서 대기해.”

“네 알겠습니다!”

오켄도는 그저 침묵했다. 그러나 고위 장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강화문서에는 오켄도, 너의 이름을 명기하기로 했다. 영광으로 알도록... 크하핫!”

“네 이놈! 감히... 스페인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할 셈이냐?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라. 적이 안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 싸우지도 않고 전함을 넘겨준다니... 너희는 자존심도 없... 크흑!”

퍽퍽.

우당탕.

오켄도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그의 귓가로 고위 장교의 말이 이어졌다.

“흐흐, 무리한 원정을 보낸 왕에게 충성할 의리는 없다. 진작 아메리카에 집중했으면 좋았잖아. 어차피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너의 책임으로 전가될 것이다. 병사들은 넉넉하게 보상을 받아 돌아갈 것이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너의 장렬한 죽음으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지. 얌전히 받아들여라!”

고위 장교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이내 하급병사를 불렀다.

“네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호주 바다엔 상어가 많더군. 섣불리 수영하는 자가 없도록 해라! 잘 알겠느냐?”

하급병사 3명도 마찬가지로 눈을 마주치더니 마주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바다 어느 곳에서 몇 번의 물거품이 일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사라졌다.

전후처리

1630년 10월 20일, 호주 서울.

약속의 날.

2백 명에 달하는 고위 장교들은 부푼 가슴을 부여안고 기함 ‘산타 테레사’에 모였다.

치욕적인 항복과 다름없는 강화협정에도..., 그들은 희희낙락했다. 한국 국왕의 제안은 파격 그 자체였다.

- 수상! 겨우 1백만? 그들은 스페인의 당당한 귀족이며 고위 장교들이오. 그 지위와 품격에 걸맞게 1천만 굴덴을 지급하고...

- 폐, 폐하! 그건 너무...

- 어허! 내 말대로 하시오.

- 아, 알겠습니다...

강화협상에 나선 고위 장교들은 두 귀로 직접 듣고서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저 왕의 허세로 치부했다.

그러나 한국 국왕의 이름값은 정말 무거웠다. 불과 이틀 만에 1천만 굴덴의 약속이 그대로 이행된 것이다.

1천만 굴덴은 스페인 1년 예산의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으로, 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거액이었다. 

강화협상 장소에는 약속대로 1천만 굴덴의 금과 은이 쌓여있었다. 이제 가지러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고위 장교들은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다.

정말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특히 고위 장교들에게...

...

서울 남항 어느 곳, 기함 산타 테레사.

“모조리 쓸어버려라!”

탕탕.

싸악.

으아악.

피가 튀고, 목이 날았다.

기함 ‘산타 테레사’의 선상은 물론, 남항 부두 앞에 설치된 강화협상 장소는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피가 튀는 혼전은 잠시였고, 일방적인 살육이 이어졌다.

전함 안팎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는 대부분, 한껏 차려입은 의식용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한국 국왕이 친히 나선 강화협상이라, 그에 맞춰 입은 예복과 함께 무기도 기껏 예식용 칼뿐이었다.

그들은 한이 맺힌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누군가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너 이 악마 같은 놈! 야, 약속을 어기... 천벌을 받을 것... 으악!”

털썩.

그들은 하나, 둘 죽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남지 않았다.

...

같은 시각, 스페인 무적함대.

‘알려진’ 강화협상대로, 스페인 무적함대는 해산 및 인계절차를 밟고 있었다.

웅성웅성.

“모두 이쪽으로 이동하시오! 각 제대별로 장교와 병사는 따로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하시면 됩니다.”

외교부 직원은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을 이었다.

“명단 작성이 끝나면 저쪽에 푸짐한 식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차례대로 받아서 드시면 됩니다. 넉넉하게 준비해놨으니 마음껏 드십시오.”

왁자지껄.

하급 장교와 일반 병사들은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포식했다. 

그들의 불안함은 아주 잠시였다. 의심이나 걱정과 달리 한국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으니까. 배고픈 자는 먹여주고, 괴혈병이나 부상 등으로 아픈 자는 치료해주며, 편안한 잠자리와 오락거리까지 제공해 주었다.

더욱 기꺼운 것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넉넉한 보상과 함께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렸다.

...

늦은 오후, 내각 대회의실.

“강화협상의 당사자인 오켄도 사령관의 유고(有故)가 확인된 이상, 모든 협상은 무효다. 이면합의도 마찬가지다.”

또 나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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