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계
1630년 10월 12일, 호주 서울.
늦은 오후, 서울 방벽 어느 곳.
승리의 기쁨은 순간이었다.
이른 아침, 육지에서 바다로 불던 바람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밤의 육풍’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낮의 해풍’으로 바뀐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만큼 매정한 것!
이내 강한 해풍이 바다에서 육지로 불기 시작했고, 스페인을 괴롭히던 불길은 방향을 돌려 서울로 진격했다.
불의 군대는 서울 전역을 삼킬 듯 매섭게 들이닥쳤다.
악전고투 끝에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불길이 잦아들었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서울 방벽 근처 곳곳엔 대화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타닥타닥.
콜록콜록.
“거기 너! 아무리 답답해도 입과 코를 가려. 불도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선 연기가 더 무섭다.”
“네 알겠습니다.”
쓱싹.
촤악.
시민군만이 아니라 서울 시민들도 너나할 것 없이 온힘을 다했다. 하나같이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과 온몸엔 검댕이 잔뜩 묻었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모두 한마음 한 몸으로 움직였다.
탁.
털썩.
한고립은 삽을 던지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젠 때려죽여도 더는 못해! 아니 안 해!”
“흐흐, 한 형! 좀 쉬시구려. 어? 저기 ‘왕’이가 오는군.”
“뭐?”
한고립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일했다. 때려죽여도 못한단 말은 거짓부렁인 듯했다.
송준길은 한고립의 뒤에서 몰래 키득거렸다.
쓱싹.
그때 송시열이 바구니를 들고 다가오며 말했다.
“모두 간식이라도 들고 합시다!”
그 말에 한고립이 반색하며 외쳤다.
“뭐, 간식?”
후다닥.
역시, 간식 앞에서는 조선 호랑이처럼 재빠른 한고립이었다.
잠시 후.
“꺼억!”
한고립은 식사를 마치고 트림소리를 내었다. 또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준길은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때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간식은 ‘왕’이 어머니께서 정성껏 마련해 주신 것이오.”
“컥!”
한고립은 깜짝 놀라 체할 것 같았다.
이에 송준길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한 부인의 솜씨는 다르군요. 떡하고 전이... 어쩐지 왕실 수라간에서 만든 것처럼 맛있더라니! 그런데 이걸 어쩌나? 한 형께서는 ‘왕’이한테...”
송준길의 말처럼 한고립은 ‘능양군의 맏아들 이왕’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듯 괴롭혀왔다.
이왕과 친분을 튼 송준길, 송시열과 달리...
그럼에도 이왕은 꿋꿋하게 최선을 다해 일했다. 한고립도 내심 인정하는 바였다.
“크흠, 뭐 그런대로 먹을 만했어. 한 부인에게는 곧 사례하도록 하지. 쿨럭, 아차! 물이나 마시러 가야겠군.”
그렇게 한고립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이왕이 나타났다.
“한 호위대장님! 여기 수정과 있습니다. 물 대신 이거라도 드시지요?”
“끄응...”
정말 진퇴양난이었다.
...
같은 시각, 스페인 무적함대.
기함 산타 테레사 선실.
선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사령관 오켄도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어렵사리 해안가로, 다시 함대로 병력을 물린 상황... 불과 하룻밤사이에 절반 가까운 병력이 꺾이고 말았다.
침묵은 당연했고, 좌중의 분위기는 갈수록 침울해졌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군수물자, 그 중에서도 식량사정이었다.
결국 오켄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 싶군.”
웅성웅성.
서로 눈을 마주치며 침묵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 역시 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무기 없이는 싸울 수 없지만, 식량 없이는 그 무기를 들 수 없었다.
그때 오켄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담담했다.
“음, 지금 식량사정은 극도로 아껴 먹는다고 해도 일주일 치가 되지 못한다. 군수물자가 부족해서 지상 전투도 어렵다. 그리고 해상 전투는... 큰 모험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결전이지...”
놀랍게도 좌중은 고요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자고 방방 뜨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예 남의 말인 듯,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오켄도는 탄식했다.
그들의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히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뼈아프게 다가왔다.
‘후후,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해... 결국 모든 책임을 내게 돌리려고 하는군. 어차피 내가 사령관이니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한심한 놈들, 이젠 퇴로가 없다. 적을 돌파하고 식량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모두 돌아갈 수 있어. 다들 알면서도...’
오켄도의 심상은 이어졌다.
‘어차피 너희들은 나름 귀족이고 고위 장교라 이거겠지. 오직 자기 자신만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안 돼! 모두 데려가야 본국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네 놈들이 아무리 소극적이고 반대한다고 해도, 반드시 서울 항을 돌파하고 말겠어.’
이제 외로운 결단의 시간이었다.
“모레 자정을 기해 서울 항을 돌파한다. 함대는 무장을 정비하고 장교들은 세부 작전을 논의해! 더 이상 뒤는 없다.”
오켄도는 전의를 다졌다.
...
같은 시각, 내각 대회의실.
“폐하!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라니요? 또 강화협상이라니...”
웅성웅성.
좌중은 아연실색했고, 일부 각료들은 내게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수상에게 눈빛을 보냈다. 잠시 후, 수상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모두 주목하십시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적의 항전의지를 꺾기 위함입니다. 쥐도 막다른 곳에 몰리면 고양이의 콧잔등을 무는 법입니다.”
거기에 해군사령관도 말을 보탰다.
“적군이 지상에 상륙한 것은 패착이었습니다. 반면 저희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구요. 만약 적이 함대를 나눠 양동작전을 펼치는 한편, 항구를 돌파했다면... 우리는 정말 커다란 곤경에 빠졌을 겁니다. 지켜야할 곳은 많은데 병력이 적으니까요. 또 기동함대가 없어 적을 제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급조한 예비함대는 희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늘 새로이 붙잡은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적의 약점은 명확합니다. 식량이 없어 고통 받고 있으니 먹고 죽지 않을 만큼 식량을 제공해서 살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또 강화협상을 통해서 더욱 확신을 줘야 하구요. 뭐 그렇다고 해서... 고이 보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탁.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외교부장은 오늘 내로 적에게 강화협상을 제의하세요. 그들은 시간이 없습니다. 아울러 국방부장과 해군사령관은 허장성세를 빈틈없이 유지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한 가지 더 주문했다.
“스페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우리는 인도적 차원에서 적들을 보내주는 겁니다. 그들에게 곧 강화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라 말도 해주고 말입니다. 참! 스페인 고위 장교들에게는 특히...”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강화협상 안건이 끝나자마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전시 내각회의는 숨 가쁘게 이어졌다.
...
다음 날 저녁, 스페인 무적함대.
기함 산타 테레사 선실.
누군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쾅!
“사령관님! 이렇게 뒤통수를 쳐도 되는 겁니까? 이게 뭡니까? 이게...”
탁!
또 다른 누군가가 탁자 위에 내던진 것은 한국의 강화협상 제안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