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25)

하지만 당시 ‘단주님은 옥황상제냐’는 그 물음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아마도 내게 심복(心腹)한 것이다.

또 수상이...

휘잉.

그때 돌연, 내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퍼뜩 깨달았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들이 있다.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한없이 외로웠는데, 어느 새 가슴이 따스해졌다.

째깍째깍.

드디어 자정이 되었다.

나는 나직이 명령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작전명 ‘남십자성’을 허가한다!”

...

자정, 서울 방벽 어느 곳.

“발사!”

치직.

동시에 거대한 불길이 어둠을 찢고 하늘 높이 솟았다.

쐐애액.

방벽 뒤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손에는 총이 아니라 삽과 물통이 들려 있었다.

...

자정, 스페인 무적함대.

사령관 오켄도의 막사.

쾅쾅.

화르르. 

- 불이야!

- 으아악!

“대체 무슨 일이냐?”

오켄도는 급히 잠을 깨서 상황을 파악하려했다. 밖에 나가 보니 아비규환이었다.

“크윽, 사령관님! 적의 포격입니다. 어, 어서 피하십시오.”

털썩.

부관은 말을 마치고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오른 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급히 살펴보니 화재와 연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콜록콜록.

으아악.

오켄도는 소리 높여 외첬다.

“겁먹을 것 없다! 모두 침착하게 불을 꺼라.”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스페인 정예병들은 달랐다. 오켄도의 지시와 동시에,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대혼란을 금세 수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고, 연기는 더욱 독하게 퍼졌다. 

그때였다.

펑펑.

콰직.

한국 기병이 스페인 야영지에 들이닥쳤다. 

먼저 손에 든 횃불과 화염병, 또 다른 덩어리를 막사 곳곳에 던진 후, 그 힘과 속도로 스페인 야영지를 유린했다. 

그 광경에 간신히 수습해가던 스페인 장교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창병들을... 끄아악!”

털썩.

스페인 야영지는 다시 대혼란에 빠졌다.

한국 기병들은 스페인 병사들을 베기보다는 야영지 곳곳에 불을 지르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 기병들은 야영지를 돌파하더니 그대로 떠났다.

화르르.

콜록콜록.

으아악.

불과 연기는 확산일로였다.

오켄도는 그 광경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뿌드득.

“모두 무기와 보급품을 챙겨서 뒤로 물러나. 바닷가로 이동한다.”

...

기병대장은 날카롭게 외쳤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쓸어버려라!”

콜록콜록.

으아악.

스페인 야영지 바깥은 화재를 피해 대피한 스페인 병사들로 가득했다. 한국 기병대는 입과 코를 물에 적신 천으로 막은 채, 항복한 자와 반항하는 자를 나눴다.

기병대장은 매서운 눈길로 적군의 분류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때 부관이 다가와 말했다.

“대장님! 여기도 곧 위험합니다. 어서 이동하셔야 합니다.”

“흠, 어쩔 수 없지. 포로들을 인솔해서 이동한다. 나머지는 일임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기병대장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그의 가슴은 아직 뜨거웠고 온몸의 힘이 남아돌았으니까.

‘그렇다고 불과 싸울 순 없으니... 그래도 우리가 대공을 세웠다. 정말 무섭구나! 겨우 설탕과 초석을 섞어서 뿌린 것인데 이리도 큰 폭발과 불이 나다니. 최소 절반의 희생을 감수했건만... 이래서야 대공을 세운 것인지도 잘 모르겠군.’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장안에 떠도는 그 소문이...

‘설마 폐하께서는 정말...’

...

같은 시각, 서울 방벽 어느 곳.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전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에취!”

수상은 나의 갑작스러운 기침에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폐하! 어서 들어가 쉬셔야겠습니다. 날이 춥...지는 않습니다만 그동안 심려가 크셨습니다.”

난 비서관이 건네 준 수건으로 코를 풀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상! 그럴 순 없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 국왕이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그럼 따뜻한 차라도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서관! 폐하께 차를 올리게.”

“네 알겠습니다.”

후루룩.

나는 비서관이 가져온 뜨거운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곧 몸이 따뜻해지며 간질거리던 코도 정상을 되찾았다.

그때 수상이 그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폐하께서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술법(術法)을 익히신 게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풋.

순간, 입에 머금고 있던 생강차를 내뿜을 뻔했다.

“수, 수상! 그게 무슨?”

수상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폐하께서 하신 일 때문입니다. 한국과 조선 국민들에게는 달리 생각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당황한 마음에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말도 더듬거리며 나왔다.

“아, 아니 바, 바람이야 나, 날씨와 지형에 따라 달리 부는 것이고...”

수상은 더욱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 누가 감히 폐하께 무어라 하겠습니까? 폐하께선 그저 우뚝 서 계시면 될 것입니다. 저희는 그대로 따를 겁니다. 이 나라를 누가 세웠고 누가 지켰으며 누가 더욱 크게 키웠는지를... 저는 물론이고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이미 이겼습니다. 보시다시피 국민들의 얼굴에, 시민군들의 행동에 역력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오늘 전투로 거듭 확인했을 뿐이니까요.”

“...”

나는 침묵했고 수상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는 가난하지만 성리학을 신봉했던 유자(儒子)였습니다. 처음 폐하를 따른 것은 돈을 벌어 여동생을 시집보내려는 심산이었지요. 그 소원을 이루고 나서는 폐하를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 모시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상단주와 부하의 사이로 말입니다. 하지만 폐하의 뜻이 보다 원대한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복했고 그 후로 쉼 없이 달려온 것은 오직 폐하의 결단에 기댄 것입니다. 또 폐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른 각료들, 국민들이라고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래, 느낌이 왔다. 내 오랜 착각이었다. 마음으로는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수상의 입으로 확인해주니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역시, 나 홀로 선 자리는 아니었군.’

또 다시, 나의 가슴은 따스해졌다.

그때 전령이 낭보를 전했다.

“폐하! 대승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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