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25)

매서운 포격에 혼쭐이 난 적군은, 아군 포격 사거리 밖으로 물러나 해안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적은 해안가에 정방형의 진지를 차렸다. 함대의 규모와 진지의 넓이를 보아 최소 3만 병력은 되어 보였다. 

거기에 본진 우측, 별도의 작은 병영에는 수백의 기병이 기각지세로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대포까지 지상으로 내렸다.

오늘 전투는 전초전 성격으로, 아군 화력의 우세 속에서 치러졌다. 게다가 아군 참호까지 완비된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적의 준비상황을 보면, 스페인이 원하는 진짜 전투는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적의 공세를 기다리는 것은 하책이었다.

‘그래 한번 두드려본다. 천시(天時)와 지리(地理), 이제 인화(人和)까지... 모두 나의 편이다. 어쩌면 이번에 끝장낼 수도 있겠지. 정말 아쉽구나! 아군 기동함대만 건재했어도...’

나는 그저 어둠이 깔리기만을 기다렸다.

과거의 유산

1630년 10월 11일, 호주 서울.

해안가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때, 서울의 어느 군수공장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서울 인근 군수공장.

“아니 이 비싼 걸...”

한고립은 설탕과 초석을 옮기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송준길이 쓰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후후, 한 형! 이제 마음이 좀 풀리셨소?”

송시열도 송준길을 돌아보며 딱 한마디만 거들었다. 

“한 형은 조선제일의 사내대장부로 그 마음이 너른 바다와 같습니다.”

한고립은 잠시 멈칫하더니 펄쩍 뛰었다.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전쟁에서 중요한 건 꼭 나가서 싸우는 게 아니야! 내가 무슨 꽁했다고 그래? 나는 그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뿐이야! 다들 오늘 오전, 폐하께서 하신 말씀 들었잖아. [조국이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그대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고 말이야.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여기에서 땀을 흘리는 것이라고...”

송준길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한고립의 말을 듣다가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하하! 이제 보니 한 형이야말로 조선제일의 세객(說客)이구려. 우리 한 형을 의회로 보냅시다! 이 정도면 의원이 아니라 차기 의장은 따 놓은 당상이니.”

하하.

짝짝.

송준길의 익살스런 말에 모두 박장대소하며 한시름 놓았다.

‘조선의 무인’ 한고립은 오전까지만 해도 극도로 침울한 상태였다. 오죽하면 평소 말수가 적던 송시열까지 나서서 위로했을까?

한고립은 시민군 모집시험에 연거푸 불합격했었다. 다른 것은 무사통과였지만 왼팔 의수 때문에 사격이 어려웠다.

그가 아무리 떼를 써도, 시민군 모집 담당관은 요지부동이었다.

- 한 형 정말 미안하오! 1분 안에 3발을 사격할 수 없는 사람은 모두 전시근로에 동원하라는 엄명이 내렸소.

- 이것 봐! 자네 나 몰라? 나 한고립이야! 나더러 전시근로라니?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 어허, 내가 그걸 아니까 시험기회를 여러 번 부여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오직 한 번이오. 단 한번...

- 제길...

송시열과 송준길은 최근 시행된 마지막 모집시험에서도 낙방한 한고립을 위로하며 밤새 만취했었다. 또 한고립의 대성통곡과 하소연을 듣느라 귀청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하릴없이 군수공장에 나선 한고립은 항상 꽁해있었다. 그런데 오늘 오전, 국왕폐하의 군수공장 순시에 마음이 풀렸다.

국왕은 전(前)호위대장이 아니라 호위대장이라 불렀다.

- 호위대장! 그대가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군. 조선 신기전(神機箭)은 살상무기뿐만이 아니라 각종 신호탄으로도 용도가 무궁무진하다네. 그동안 용도에 맞지 않아 무기로 쓰진 못했어.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전쟁의 승패를 가름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걸세. 그대가 여기에 있으니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아울러 종친과 사대부 출신 전시근로자들도 잘 다스려주게.

- 흐흑 폐, 폐하!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 그럼 호위대장만 믿고 가겠네.

- ...

그때 능양군의 맏아들 이왕이 다가서며 말했다.

“방금 1차 물량 상차(上車)가 끝났습니다.”

한고립은 이왕의 등장에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바로 풀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크흠, 일은 할 만한가?”

이왕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지만 이 역시 나랏일입니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 모여 큰 일이 되고, 결국 크고 작은 일에 경중이 없다고 말입니다. 혹시 제 마음을 물어보신 거라면... 정말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송시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리지 않게 탄식했다.

과거 1623년 인조(능양군)반정이 성공한 직후, 능양군의 맏아들 이왕은 조선의 세자에 올랐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을 이용한 현 국왕에 의해, 능양군이 왕에서 물러나고 이왕마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비록 1년이 채 되지 못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세자는 세자였다. 세자는 곧 왕이 될 것이 예정된 사람이었다.

또한 최근 능양군이 연루된 역적 모의사건까지 있었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 속담이 있지 않은가?

송시열은 스스로 국왕에게 나아가 종군(從軍)을 청했었다. 그 이유는 국민과 국론의 통합이야말로 강대국의 초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종친과 사대부들이 한국과 조선에서 겉돌고 있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송시열 역시 이왕의 마음이 신실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확인하니 더욱 기꺼웠다.

그때였다.

짝짝.

한고립이 박수를 두 번 치더니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자자, 이제 2차 물량을 준비해야지. 오늘 야간 전투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오늘 흘린 땀 한 방울이, 우리 시민들이 내일 흘릴 피를 없게 할 것이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일해! 서둘러라!”

그 말에 송준길이 다시 박수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짝짝.

“오! 역시 한 형의 자리는 따로 있어! 내가 이래서 한 형 곁을 떠날 수가 없다니까...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운 것도 아니고 그걸 이렇게 응용하시다니... 한 형이야말로 조선을 넘어 세계제일의 세객이야! 하하하!”

송준길의 너스레에 무거워지던 좌중의 분위기가 한껏 가벼워졌다. 동시에 송시열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왕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느 새 이왕의 가슴은 따스해졌다.

...

같은 시각, 남태평양 나우루 섬.

퍽퍽.

철컹.

능양군은 ‘구아노’라 불리는 광석을 캐서 담느라 고역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괄의 난 당시 ‘단 하루’ 왕의 자리에 올랐었던 흥안군도 함께 있었다.

그는 어제 도착한 아들 이왕의 편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뿌드득.

‘네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 어찌 감히...’

[불초 소자 ‘왕’입니다.

... 참으로 다행인 것은 어머님께서는 얼마 전부터 기력을 많이 되찾으셨습니다. ‘호(현재 12살, 봉림대군-효종)’ 역시 건강하게 아버님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략) 

과거 명과 후금이 광야를 달리는 말이었다면,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옛 성현의 말씀에 따르더라도 

‘군사는 한 나라를 지킬 만하면 요족하지만, 문물은 세상을 덮을 만큼 광대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아버님께 국왕폐하를 신종(臣從:신하로써 따르다)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배우자는 것입니다. 

아버님의 마음을 아들인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아버님께서 국왕폐하를 보고 배우는 것이 바로 이기는 것입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국왕폐하께서는 무척 관대하십니다. 조만간 제가 아버님을 사면토록 국왕폐하께 간절히 청원하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히 지내시길 바라옵니다.

서울에서 불초 소자 ‘왕’이 올립니다.]

그때 감독관이 매섭게 소리쳤다.

“야! 어디서 농땡이를 부리는 거야? 어서 일하지 못해!”

능양군이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이 섬에선 방금 저 감독관이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말보다 몽둥이가 먼저 날아들었으니까.

결국 바삐 곡괭이를 놀릴 수밖에 없었다.

퍽퍽.

능양군의 하루는 아주 버거웠다.

‘젠장, 빌어먹을...’

**

해질녘, 스페인 무적함대.

사령관 오켄도의 막사.

“... 따라서 오늘 전투의 사상자는 총 735명입니다.”

오켄도는 부관의 보고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륙이 수월했기에 혹시나 적의 대비가 미비할 줄 알고 가볍게 공격했었다. 우선 적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함이었다. 

이번 첫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는 역시 적의 포격과 일제사격에서 나왔다.

‘일단 적의 참호와 대포가 가장 큰 골칫거리다.’

전투에서 공격과 방어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보통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으니까. 거기엔 병력과 장비, 사기와 지형 등 여러 측면에서 장단점이 나뉘었다.

오켄도는 내일 한 번 더 두드려본 다음, 해군의 장점을 철저히 살리기로 결심했다.

‘흥! 서울 항구를 돌파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면 될 테지. 적의 병력도 한계가 있으니 모든 곳을 지킬 순 없어. 양동작전으로 혼을 빼놓은 다음...’

...

스페인 막사 어느 곳.

“후후, 나의 로시난테! 우리 저녁 먹자.”

“야옹!”

스페인 고양이 로시난테는 산초의 저녁 식사를 나눠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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