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25)

이제 아메리카는 평온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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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10월 11일, 호주 서울.

나는 여러 의미로 탄식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스페인 국세(國勢)의 쇠락(衰落)에도 불구하고 무적함대의 위용은 엄청났다. 

얼핏 보아도 수백 척이 넘는 규모였으니까. 게다가 질서정연한 함대 대형을 보니, 단련된 정예임이 분명했다.

오랜 항해에 지쳐있거나 군기가 해이해졌기를 바랐건만... 무적함대의 명성은 아직 그 본디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예비함대에 즉시 퇴각을 명령했다. 

“질서정연하게 항구로 진입하라!”

탕탕.

동시에 붉은 신호탄 세 줄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예비함대는 해안포대의 엄호를 받으며 천천히 항구로 퇴각했다.

나는 망원경을 내리며 혼잣말했다.

“스페인 군의 상륙을 막긴 어렵겠어.”

최선은 바다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차선은 상륙을 아예 저지하는 것이고, 만약 그것도 어렵다면 상륙 전후에 적의 대형이 갖추어지지 않은 때가 최적의 반격시점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다. 

적의 상륙기동을 제한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급조한 예비함대로는 적 정예함대의 십자포화를 감당할 수 없었다. 또 넓은 해안선을 모두 지킬만한 병력과 대포 등 무기가 부족했다.

나는 혀를 차며 다음 명령을 내렸다.

“적의 상륙에 대비한 소개(비전투원 대피)작전을 시작하라!”

“네 알겠습니다!”

서울은 수백 킬로미터의 해안, 주변에 흐르는 3개의 강, 또 항구 안에 있는 여러 섬들이 어우러져 있는 천혜의 항구도시였다. 

북쪽과 남쪽, 그 두 개의 항구는 각각 북항과 남항으로 불렸다. 또 두 항구는 약 20킬로미터의 거리로, 서로 기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서울의 육지 방면은 3개의 강이, 바다 방면은 항만의 좁은 입구와 곶이 각각 천연의 방벽이었다.

적의 상륙 예상지점은 서울 북항과 남항 사이가 거의 확실했다. 그곳이 왕궁과 내각 등이 위치한 핵심지역이니까.

스페인도 이를 잘 알고 있으니 한국 해안포대의 사정거리를 피해서, 또 함포의 엄호를 받으며 상륙을 시도할 것이다. 

결국 내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

그런데, 공격보다는 스페인 사절이 먼저였다.

스페인 사절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또한 아메리카에서 한국 군대를 철수하고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등 다양한 요구사항들을 늘어놓았다.

무기를 스스로 내려놓으라니? 또 아메리카를 포기하라니?

그것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라는 요구였다. 나머지 요구사항들은 자유를 포기한 자의 굴종을 의미했다.

한국과 스페인의 패권경쟁은 단순히 외교적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호주까지 함대를 보낼 이유도 없었다.

스페인 사절의 태도는 오만했고, 이번 한번만 봐준다는 식으로 관대(?)한 조건을 제시한 셈이었다. 어쩌면 이걸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참으로 달콤했다.

‘순순히 항복하되 인질은 없다. 또 아메리카에서 군대만 철수하고 전쟁배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이라...’

이런 식이면 무적함대가 아니라 외교사절을 보내야했다. 그러나 아메리카가 통째로 넘어간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적군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길동 함장이 무사귀환해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면 적의 허장성세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명분을 얻고 빠지려는 모양인데 그건 안 된다. 그래서는 한국의 패권이 공고해질 수 없다.’

며칠 전, 승리호의 기적적인 생환은 서울을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승리호가 전해준 특공대원들의 영웅적 죽음은 산자에게 뜨거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시민군도 더욱 전의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나포된 돌리호의 스페인 포로들까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전열함인 돌리호에도 식량이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병력이 많아서...

- 식량도 문제지만 장거리 항해로 괴혈병에 걸린 자들도 상당합니다.

- 아니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

여러 정보에 따르면 이미 다 이긴 전쟁이었다. 스페인 무적함대도 대항해시대의 거리와 시간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의심하고 있었는데... 관대한 항복 조건이야말로 마지막 연결고리다. 이제 시민들의 희생을 걱정할 필요도 없겠어. 적에겐 시간이 없다.’

결국 나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너희들이 와서 직접 가져가라!”

스페인 사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흥! 감히...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그 무례한 언사에, 스페인 사절의 목을 베자는 말이 곳곳에서 튀어 나왔다. 특히 수상의 눈물과 괴성이 압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이 보내주었다.

‘수상도 연기를 아주 잘 하는군. 현대에서 배우를 했으면 대성했겠어.’

나 역시, 스페인 사절 앞에서 표정관리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그것도 내 안마당에서...’

...

그날 저녁.

스페인 무적함대.

기함 산타 테레사 선실.

사령관 오켄도는 담담하게 물었다.

“항복을 거절했다고?”

사절로 다녀온 수하가 대답했다.

“사령관님! 그는 어리석은 자가 분명합니다. 이렇게 관대한 조건을 거절하다니 말입니다.”

선실 안의 분위기는 갈수록 격앙되었다. 고위 장교들의 입에선 험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흐흐, 당장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동안 스페인의 은혜를 입어 커온 나라가 감히...”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서울을 잿더미로 만들고...”

웅성웅성.

오켄도는 손을 들어 수하들의 말을 끊고는 다시 물었다.

“혹시 어떤 조건을 문제 삼았나?”

사절로 다녀온 수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대답했다.

“조건을 잘 듣고만 있더니 우리더러 ‘직접 가져가라’고만 했습니다. 한국이 다른 조건을 제시한 것도 없었습니다.”

오켄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한국 국왕은 강화할 의사가 전혀 없군. 이렇게 된 이상, 한번 싸워볼 수밖에... 전황이 나빠지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테지. 적당히 명분을 챙기고 퇴각하려고 했는데...’

그의 계산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 

다음 날, 전투가 시작됐다.

쾅쾅.

포연이 뿌옇게 하늘을 가렸고, 포성이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귓전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수만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러나 시민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방벽을 막아선 채, 마치 한 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스페인과 달리 단련된 정예병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기만은 하늘을 찔렀다. 

세계최강이라는 스페인 정예병의 공격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해군의 특성을 한껏 활용해 양동작전을 펼쳤다. 한편으로 항구에 진입할 듯 위협하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해안상륙을 시도했다.

상륙은 무척 순조로웠다. 아니 싱거웠다.

한국군은 스페인의 상륙을 저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안 가까이 병력과 무기를 배치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스페인 함포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지점엔 빽빽이 참호가 있었다.

쾅쾅.

탕탕.

으악.

“퇴각하라!”

둥둥둥!

의기양양하게 공략에 나섰던 스페인군은 참호 가까이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하고 금방 퇴각했다. 참호 앞에 전개한 병력이 대형을 갖추고 돌격하기도 전, 한국군의 포격에 초토화가 되었다. 거기에 간신히 힘을 들여 돌격한 일부 병력도 일제사격에 크게 손실을 봤다.

오켄도는 후퇴를 명령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나중을 기약했다.

...

해질녘.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았다. 

서울의 10월은 조선의 봄에 해당하는 따뜻한 날씨였다. 또한 호주 대륙의 특성상 비가 적고 무척 건조했다.

나는 가장 높은 망루에 서서 스페인군의 후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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