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역시 반성한다. 그리고 자책한다.
사실 그동안 한없이 오만했다. 그 오만의 대가는 어이없게도 내가 아니라 기동함대, 또 시민군의 피로 지불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시민들의 맨 앞에 다시 서야한다.
내가 리더, 바로 그들의 왕이기 때문이다.
**
1630년 10월 3일, 호주 남해안 어느 곳.
삐익!
“로시난테! 어디 있니?”
스페인 병사 하나가 ‘로시난테’란 이름의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는 호각을 불며 거듭 로시난테를 외쳤다.
그때 스페인 장교가 타이르듯 말했다.
“이봐 산초, 그만하면 됐다. 더 이상은 시간낭비야! 어서 본대로 돌아가야지...”
그러나 산초라 불린 병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갈 순 없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로시난테’를 찾던 산초가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흐흑, 로시난테...”
그의 주위엔 아까 그 장교 하나와 다른 병사 둘이 짜증난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결국 장교가 굳은 결심을 한 듯 말을 꺼냈다.
“산초 명령이다! 로시난테는 그냥 두고 간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그때...
딸랑딸랑!
“야옹!”
“오! 로시난테! 어서 와! 흐흑...”
산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로시난테를 반겼다. 반면 장교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후우, 빌어먹을 고양이!”
로시난테는 산초의 친구, 스페인에서 온 고양이였다.
...
스페인 무적함대.
기함 산타 테레사 선실.
“기병순찰대 3개 조가 현 위치에서 이틀거리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마을이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 자체가 없습니다. 역시 호주는 서울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하곤 텅 빈 땅입니다. 3개 조의 보고가 동일합니다.”
사령관 안토니오 오켄도는 부관의 보고에 미간을 좁혔다. 부관의 보고는 계속됐다.
“... 또 파손선박의 수리는 예정대로 진행 중이며, 대략 사흘 이내에 완료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음, 수고했군. 수리작업에 좀 더 속도를 내도록 해! 나머지는 주변 정찰과 사냥에 인원을 투입하고, 그것도 아닌 인원들은 푹 쉬도록 조치하게!”
“네 알겠습니다!”
탁.
오켄도는 부관을 내보내고 나서야 마음껏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후우 제기랄, 호주 정복은커녕 철수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근처에 작은 도시라도 있으면 체면치레로 대충 약탈하고 돌아갈 수 있겠는데... 죄다 빈 땅, 쓸모없는 땅이로군.’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
같은 시각, 한국 ‘돌리’ 호.
“스페인 깃발과 붉은 십자가는 모두 교체했나?”
흰 돛에 커다랗게 새겨진 붉은 십자가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상징을 교체하다니?
놀랍게도 그 말을 한 이는 고길동 함장이었다.
스페인이 격전 중 ‘실종’된 것으로 파악한 ‘돌리’ 호는, 정말 뜻밖에도 한국 기동함대에 나포된 것이었다.
격전 당시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화력으론 상대가 되지 않아... 육탄전이 답이다! 다른 배에도 돌격신호를 보내!
- 함장님 그럼 승리호는...
- 그래, 버린다. 어서 다른 배에도 수신호를 보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전열함을 상대하기 어렵다. 탈출도 이미 늦었어. 최후의 한방이다! 모두 힘을 합쳐 적선 하나라도...
- ...
한국 ‘돌리’ 호 부관이 밝게 대답했다.
“네 모두 완료했습니다. 이제 타륜과 조타만 수리하면 문제없이 항해할 수 있을 겁니다.”
“...”
“...”
쓱쓱.
싹싹.
승리호 선원들은 중갑판 이곳저곳 열심히 청소하면서 수다를 이어갔다.
“흐흐, 스페인 놈들은 토끼 고기를 좋아하나봐! 배에 토끼를 잔뜩 태우다니... 우리는 보통 소하고 염소, 양인데...”
“음, 이 토끼 귀여운데, 그냥 잡아먹긴 좀 그렇군. 아무리 배가 고파도...쩝.”
“야! 그런 식이면 여기 고양이도 귀엽다! 참, 우리 호주는 고양이와 토끼가 금지동물이잖아? 이유가 뭐였더라?”
“어휴 무식한 놈! 국왕폐하께서 호주에는 고양이와 토끼를 들여놓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잖아! 그 뭐냐? 호주 생태계에 무시무시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그래? 그거 이상하네... 고양이나 토끼는 귀엽기만 하고 무서운 놈들은 아니잖아? 그냥 쥐 좀 잡고, 풀이나 뜯는 놈들인데... 호주에 풀어두면 호랑이라도 되려나...”
그때 항해사관이 다가와 꾸짖었다.
“너희들! 청소는 뒷전이군. 곧 타륜과 조타 수리가 끝난다. 그때까지 청소 마무리하고 고양이와 토끼는 법령대로 살처분해!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숨겨진 의도
1630년 10월 8일, 북아메리카 누에바에스파냐.
멕시코 탐피코 항.
박연 사령관은 스페인 탐피코 총독의 항복을 전격 수락했다.
한국군과 아메리카 연합군은 지난 5월 태평양 최대 항구인 아카풀코 항, 다시 8월 멕시코시티 함락에 이어, 대서양 최대 항구인 탐피코 항까지 해방시킨 것이다.
“한국군 만세! 아메리카 연합군 만세!”
탐피코 거리엔 원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만세를 연호하면서 한국군과 아메리카 연합군을 크게 환영했다.
원주민 모두는 하나같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 스페인 병사들의 얼굴엔 지독한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
그날 저녁.
탐피코, 박연 사령관의 집무실.
“...이제 남은 것은 서인도 제도와 북아메리카 세인트 어거스틴뿐(현대 플로리다 주)입니다.”
로드리고는 박연 사령관에게 한껏 머리를 조아렸다. 이전(以前)에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었다는 자각을 확실히 끊어버린 듯 했다.
박연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를 치하했다.
“로드리고 백작! 모두 그대 덕분이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사령관님께서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대와 스페인 병사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마시오. 알바 공작의 요청도 있었고, 아메리카 연합회의에서도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이니...”
쪼르르.
박연은 차를 따라 로드리고에게 권하며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알바 공작은 어떤 사람이오?”
로드리고는 박연의 질문에 잠시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알바 공작각하께선 스페인 본토의 대귀족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말씀드리기가...”
박연은 말꼬리를 흐리는 로드리고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다음 일정에 대한 확답을 주었다.
“알겠소이다. 알바 공작과 기존에 합의한 대로, 그대들은 스페인 본토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멕시코에 머물러야 할 것이오. 그리고 노파심에 말하는데... 새로이 결성된 멕시코 부족회의가 누에바에스파냐의 기존 행정체계를 잘 이어받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로드리고 백작! 잘 아시겠소?”
“무...물론입니다!”
...
잠시 후.
박연은 집무실에 앉아 알바 공작의 제안을 곱씹었다.
- 그대들도 스페인 병사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겠지만 참아주시오! 아메리카의 가혹한 통치는 오로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야욕 때문이니... 아메리카의 금과 은은 대대로 스페인 왕의 사리사욕과 전쟁에 쓰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 원흉인 스페인 국왕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저라도 나서서 오랜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서인도제도와 세인트 어거스틴을 할양한다는 합의이행은 스페인의 한국 원정이 실패하는 시점으로 합시다. 그래야...
한마디로 정리하면...
스페인 알바 공작은 차기 스페인 국왕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였다.
박연은 그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알바 공작은 스페인 병사들의 귀국을 잠시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귀국하면 펠리페4세의 친위군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무적함대가 호주원정을 떠난 지금, 스페인 본토는 귀족들의 압도적 우세였다.
‘흠, 알바 공작은 호주 원정이 실패하는 즉시 펠리페4세를 처리할 생각인가? 그게 아니면...’
박연은 또 생각했다.
‘스페인은 이제, 자력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알바 공작이 한국에 양보하는 척, 할양을 제안한 것이겠지. 그래도 좋군!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은 모든 책임은 펠리페4세에게 떠넘기고, 식민지 스페인군의 무사귀환은 알바 공작의 공적으로 될 테니... 이걸로 스페인 내부의 지지는 어느 정도 확보하겠어. 반면 펠리페4세는 무모한 호주 원정의 실패와 함께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모조리 잃었다는 비난까지 함께 받을 테니 말이야!’
탁.
박연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동안 정말 바빴다. 곧 호주의 승전보만 도착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