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25)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령관님! 병사들의 피로도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괴혈병, 수면부족과 과도한 교대근무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졸다가 함선끼리 접촉사고가 발생했고...”

“...”

오켄도는 부관의 보고가 끝나자 고심 끝에 결단했다.

“이틀 간 정박해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도너 함장에게 경계와 매복을 맡긴다. 어서 적당한 곳을 찾아라!”

“네 알겠습니다!”

오켄도는 부관의 밝은 표정에 쓴웃음을 지었다.

‘괴혈병과 병사들의 피로도 문제지만, 식량문제와 적에게 공격시기가 알려진 것이 뼈아프군. 이래서는 기습의 이점을 살릴 수 없으니.’

...

같은 시각, 승리호.

“함장님! 적 함대가 해안가 만(灣)으로 진입합니다.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승리호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순항을 가로막고 금쪽같은 시간을 벌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첫째 조국이 적의 침략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고, 둘째 적의 도착시기를 정확히 알려 기습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분명 환호성이 터져야 마땅한 대공을 세웠다. 

그러나 선원들의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와 동료를 잃은 슬픔만이 가득했다.

고길동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마라!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공대는 편히 쉬다가 배불리 먹고 자정에 모인다.”

“네 알겠습니다.”

고길동은 만신창이가 된 승리호를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기동함대가 무사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건만...’

허리케인에 전멸당하다시피한 기동함대는, 추격전 도중에 다시 3척을 잃었다. 승리호 역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나마 희망봉 연락선이 본국에 도착했으니 다행이구나. 또 며칠 전에는 본토 척후선과 접선도 성공했고... 폐하의 명령대로라면 이번이 마지막 임무겠지!’

고길동은 척후선이 전한 작전명령을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조국을 위해 단 하루, 아니 사흘 만이라도...’

...

그날, 자정.

승리호 중갑판에선 때 아닌 고성이 터져 나왔다.

“미친 새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넌 빠져!”

“제가 왜요?”

“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잖아?”

“크흐흑...”

그때 항해사관 하나가 서럽게 우는 젊은 선원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특공대원들이 누구냐? 모두 무사 귀환할 것이다. 너무 염려 마라! 네가 해야 할 임무도 특공대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린 하나다!”

고길동 함장은 직접 특공대를 선발했는데 용맹과 결단력,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느냐'가 기준이었다. 최고의 용사 중에서도 여한 없이 죽을 수 있는 용사만 선발한 것이다. 

소란은 잠시였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특공대는 연이어 작은 배를 내리고 거기에 올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정박한 만(灣)의 입구였다. 

...

쾅쾅.

콰직.

한밤중, 별안간 포성이 울렸다. 

만(灣)의 외곽에 위치한 스페인 전함들은 기습포격에 대응하느라 허둥지둥하는 모양새였다. 단잠에 빠져있던 병사들은 우왕좌왕했고, 당연히 대응포격은 굼떴다.

그러나 그 속엔 날카로운 비수가 감추어져 있었다. 

64문의 중형 전열함인 돌리호 함장 ‘도너’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내 이럴 줄 알았다. 역시 불나방들이 달려드는군.”

“함장님! 이번에도 저희가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줘야겠습니다.”

“그래, 적들은 겨우 32문짜리 프리깃함이다. 64문 전열함에 상대가 될 수 없지. 적함의 속도가 빠르다곤 하지만, 새벽엔 육풍(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이 부니까 우리가 풍상의 위치다. 크하핫! 기다려라, 곧 네 놈들의 멱살을 잡고 일제사격으로 곤죽을 만들어주마... 어서 준비해! 외곽 방어선이 곧 열릴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

같은 시각, 승리호.

쾅쾅.

콰직.

“으아악!”

기습공격에 우왕좌왕했던 스페인의 반격이 매섭게 시작했다.

“함장님! 중갑판에 2발 피격됐습니다.”

“함장님! 곧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어서 우로 급선회해야 합니다.”

고길동 함장은 갑판장과 조타수의 보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소리쳤다.

“아직! 포술장! 두 번 더 연속 사격한다.” 

그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견시수가 고함을 질렀다.

“함장님! 적 외곽이 열렸습니다. 적들이 쇄도합니다!”

견시수의 보고와 동시에 스페인 전열함 여러 척이 순풍을 타고 돌격했다. 그 선두에는 아군 전함들을 격침시킨, 바로 그놈이 있었다.

기동함대 전함이 아무리 빨라도 바람의 변화를 이용한 적의 매복을 매번 피할 순 없었다. 그래서 3척의 아군 전함이 차례로 희생된 것이었다.

뿌드득.

고길동은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 물러나면 특공대는 모조리 죽는다. 무조건 두 번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

이윽고 두 번의 연속 사격을 끝낸 승리호가 우현으로 급선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2척도 승리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순풍을 탄 적들을 따돌릴 수 없었다. 약속한 포격을 퍼붓느라 선회가 너무 늦었던 것이다.

...

쾅쾅.

철썩.

끼이익.

작은 배 십여 척이 해안가를 따라 전속력으로 이동했다. 새벽의 어두움과 대포의 화염이 그들의 자취를 효과적으로 감춰주었다. 

그들은 격전을 틈타 아무 거리낌 없이 움직였다. 만약 기동함대의 기습이 아니었다면 이 작은 만의 입구를 쉽사리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양동작전으로 기동함대 3척과 특공대가 나뉜 것이다. 

곧 그들의 앞에는 작전 목표인 스페인 수송선단이 보였다.

특공대 사관은 속으로 포격 숫자를 세고 있었다.

‘다섯, 여섯, 이제 두 발 남았다...’

특공대 사관은 눈에 불을 켜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서 노를 젓던 병사 하나가 마주 웃어 주었다. 병사의 웃음은 서울에 남겨두고 온 그의 아들을 꼭 빼닮은 듯했다. 

그의 마음은 돌연 무거워졌다.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또 그 병사 역시 서울에 아들을 남겨두고 왔으리라. 그래서 사관도 힘을 내어 마주 웃어 주었다.

이윽고, 약속된 8번의 포격이 모두 끝났다.

‘일곱, 여덟... 모두 끝났다.’

특공대 사관은 수신호로 전속력을 명령했다.

그때, 갑자기 스페인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바다에 적이다!”

“저기야 저기! 어서 쏴라!”

웅성웅성.

탕탕.

으악.

곧 총성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특공대 사관이 소리쳤다.

“특공대 돌격!”

“와아아!”

특공대의 함성에 곧 모든 스페인 병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관은 즉시 부싯돌을 꺼내 횃불을 켰다. 곧 그에게 총격이 집중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쿵쿵.

곧이어 특공대를 실은 배가 잇따라 수송선단에 부딪혔다. 특공대원들은 빗발치는 총탄을 맞으면서도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수송선 갑판 위로 화염병을 던졌고, 다른 누군가는 수송선 아래에 수뢰를 장착했다. 또 화염병이 떨어지면 총으로, 총탄이 떨어지면 총자루로, 총자루마저 잃으면 주먹으로, 주먹에 힘이 빠지면 이로 물어뜯으면서 싸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털썩.

특공대 사관도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

이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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