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이 말꼬리를 흐리자 개노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김자점은 화들짝 놀란 시늉을 하며 말했다.
“허허, 어찌 또 반말이오? 나 김자점이오, 김자점! 세상이란 험한 곳 아닙니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곳이지요. 북아메리카에 우리만 있답니까? 영국, 인디언까지 수두룩하게 몰려있는 복마전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쯧쯧, 그리 의심이 많으셔서야...”
“흥!”
개노미는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자점의 눈은 빙글거렸고, 개노미는 사뭇 긴장한 듯했다.
그때, 수하가 기다리던 소식을 전했다.
“각하! 로크 남작이 인디언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마무리 짓고 방금 도착했답니다.”
짝짝!
김자점은 말없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순간 개노미가 눈을 확 치뜨며 김자점을 노려보았다. 그는 화난 얼굴로 찻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김자점도 묘한 눈길로 개노미를 바라보았을 뿐, 달리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평화조약에 진정 평화가 있던가?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우선 영국을 움직여 나중에 불거질 책임소재를 떠넘긴 다음, 차후에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니... 어떤 면에서야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하겠지. 개노미 부총독이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때, 개노미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해서 김자점에게 잡히고 말았다.
“각하! 말도 없이 가십니까?”
개노미는 몸을 멈췄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누가 보지 않아도 그의 안색은 어두워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뜻밖에 김자점이 크게 꾸짖기 시작했다.
“개노미 네 이놈! 네 놈이 역심을 품었구나! 군주가 명령을 내렸을 때 의심하는 신하는 크게 꾸짖어야 한다는 한비자의 말이 무색하다. 너는 폐하의 진의를 의심한 것은 물론이고 폐하께서 인디언 문제를 차후에 해결하시겠다는 것도 믿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하지만 개노미는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길 잠시,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없이 떠났다.
대전쟁의 서막
1630년 9월 10일, 제임스타운.
타닥타닥.
김자점은 최근 구입한 집 안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임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때, 그의 맏아들 김련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버님! 수도 예정지 근처 인디언 부족들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로크 남작이 제대로 했더냐?”
김련은 김자점의 질문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엉망입니다. 알곤킨족과 이쿼로이족은 각각 알곤킨 어와 이쿼로이 어를 사용하는, 수십여 개의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알곤킨족만 해도 코노이, 델라웨어, 난티코크와 쇼니 족 등 최소 열 개 부족 이상입니다. 로크 남작은 고작 몇몇 부족들과 평화조약 시늉만 내고 왔습니다.”
김자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예상한 바가 아니더냐? 평화조약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 우린 알맹이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지. 그럼 다음!”
“네! 아버님께서 예상하신대로 유럽인들을 경험했던 인디언 부족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유럽인 등 외부세력에 대해 경계심이 많습니다. 또한 유럽인에 대한 공포심으로 주변 부족들과 연계하는 등 세력 확대에 골몰하는 경향이 큽니다. 당연히 북아메리카 동부해안과 남부해안에 가까울수록 심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유럽인과 마주쳤으니까요. 특히 원래 거주했던 터를 빼앗겼던 부족들이 저항의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유의해야할 부족들은 여기에 따로 정리해 놨습니다.”
김자점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래, 그들 중에 ‘성난 들소’(과거 서부전쟁 당시 쑤우족 추장)같은 자가 있더냐?”
“그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버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나도 그러길 바란다. 폭풍우는 크고 거칠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천지가 뒤집혀야 새로운 세상 위로 더 큰 고요가 내려앉는 법이다. 가능하면 그 시기도 빠르면 좋겠구나. 아니 그 시기와 장소도 우리가 만들어야겠지.”
그때 김련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버님! 최근 부총독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김자점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천천히 말했다.
“그의 이상은 좋게 말해서... 그래 순진한 것이지. 하지만 난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탁상공론이며 공염불에 불과하다. 흥!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상에서 달리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거대한 용광로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너는 용광로를 본 적이 있느냐? 철광석과 구리광석이 시뻘건 화염에 녹아 쇳물이 되고 구리물이 된다. 그것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게야! 거기에 아픔이 없겠느냐? 또 죽음이 없겠느냐? 개노미 그 순진한 인간도 이걸 모르는 줄 아느냐? 다 알면서도 순진한 척, 나는 아닌 척 하는 거야!”
그의 말은 갈수록 격앙되었다. 결국 격한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하지만 다음에 나온 말들은 더욱 거칠었다.
“에잉! 모자란 사람. 어차피 시뻘건 화염을 만나면 철광석이든 구리광석이든 고통스럽게 녹는다. 그리고 하나가 되는 거야. 그걸 잘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노미 같은 사람이 바로 군자다! 아니 군자인 척하는 꼴불견 사대부 족속이야! 나는 그게 못마땅한 거지. 내가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천한 것이 누가 있어? 당장 폐하를 생각해 보거라. 수십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그 배포,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패도이자 왕도이니라. 폐하께서 북아메리카를 거대한 용광로라고 말씀하신 것 자체가 해석의 열쇠다. 나는 바로 정답을 찾았고, 개노미도 곧 알아챘다. 그런데 감히 폐하의 명을 거부해? 이 발칙한 인사, 당장 내가 나서서 그를 처단해도 할 말이 없을 거다.”
“아, 아버님! 고정하시옵소서... 소자가 괜히 말씀을 드려서...”
김자점은 김련의 만류에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잠시 후.
“흠흠, 내 개노미를 아끼기에 말이 과하게 나왔느니라.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네, 알겠습니다!”
“참! 위그노 등 유럽 이주민 정착은 잘 관리되고 있느냐?”
“네 물론입니다. 동부지역에 각자 정착지를 만들어 이주에 한창입니다. 종교와 거주이전의 자유, 재산권까지 확고하게 보장하니 크게 만족하는 눈칩니다. 그래서 최초 정착민들이 유럽 친족들을 초청해서 추가 이주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기본적인 무기류를 제공하고 적당히 훈련도 시켰습니다.”
“인디언 부족들과의 거리는?”
“아주 가깝습니다. 원래 인디언 부족 거주지가 농사 등에 적합한 지역이니까요. 유럽 이주민들도 한눈에 알아보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물론 저희가 유도한 측면이 있긴 합니다. 현재도 간혹 다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훗! 조만간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소규모 다툼은 그냥 내버려 두어라. 대신 김추성에게 적당히 질서를 유지하면서 은밀히 감시하라고 해! 아마도 인디언 영웅이 오래지 않아 등장할 것이다. 영웅이란 스스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시대와 상황이 만드는 법이다. 또 어쩌면 우리가 만들 수도 있는 것이지. 흐흐흐, 명심하라!”
“네 알겠습니다.”
김자점 부자의 대화는 북아메리카를 두고 밤새 이어졌다.
...
같은 시각, 개노미의 집.
“포기하세요!”
아내 김세연의 첫마디였다.
시무룩해 있던 개노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뭐라고? 어찌 당신이...”
개노미의 말꼬리가 늘어진 부분은 아마도 ‘그렇게 말할 수 있소?’일 것이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며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 평소 아내를 무척 존중하던 개노미였다. 그만큼 반발이 커졌고, 당연히 말도 짧아졌다.
“부인?”
“어머! 전 그냥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이에요.”
그 순간 개노미의 손이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머리띠가 풀리고 그녀의 긴 머리가 무방비 상태로 풀렸다. 김세연도 살짝 놀란 눈빛이었다.
“흥!”
개노미는 이 정도면 아내에 대한 훈계가 되었다 여기고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다시 도발했다.
“당신은 김자점을 못 이겨요! 그 한 명도 벅찬데, 폐하까지요? 호호호, 어림없지요. 제가 폐하를 비서로 모신 것이 몇 년 인데요. 폐하께선 항상 유리한 고지를 선점합니다. 부군처럼 아둔한 사람하곤 질적으로 다르답니다.”
그의 머리끝이 쭈뼛하게 섰다.
‘잘 알고 있지만,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어느 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겉옷이 그의 손에 쥐여 흐느적거리며 벌어져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까지 탄력 있게 출렁거렸다.
그녀는 더 오기가 생긴 건지 눈가에 야릇한 미소를 드리우며 머리를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일부러 그를 무시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고집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랍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폐하의 명을 따르세요! 누구도 흉볼 사람은 없으니까요. 저도 사대부니 성리학이니 고리타분한 걸 싫어하지만 대의(大義)를 위해선 소아(小我)를 버려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답니다.”
개노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아내를 때릴 듯이 말이다.
서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난 하고 싶은 대로 말한 것뿐이니까... 읍!”
그녀의 입술이 덮쳐진 것은 순간이었다. 개노미가 김세연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벌거벗은 몸으로 뒤엉켜 침상 위를 뒹굴었다.
“다시 말해!”
“포기해!”
“다시!”
“포기... 하아악!”
...
뜨거운 폭풍이 휩쓸고 간 침상에선 이내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김세연은 개노미의 가슴에 팔베개를 하고 엎드린 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서 아는 가장 훌륭한 사람이야.”
“어째서?”
김세연은 부드러운 눈빛을 보여주었으나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개노미는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몸짓은 만 마디 대답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이미 아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의문과 부정에서 시작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반감과 오기를 품고 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그가 품은 남모를 아픔과 번민이 문제일까?
잠시 후, 갑자기 개노미가 웃었다. 그때 여자의 육감이 발동한 듯, 그녀가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주인어른!”
“아버지요?”
개노미는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금 전, 그의 내면에서 거대한 둑이 무너진 것이다. 마지막에 웃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히 혼잣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
같은 시각, 인도양 어느 섬.
스페인 무적함대.
끼룩끼룩.
왁자지껄.
“이봐, 아가씨! 우리 키스 한 번 할까?”
스페인 세비야 항을 떠나 석 달 만에 정박해서 휴식중인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이국적인 원주민 여자들에게 눈짓하며 환호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