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225)

그의 손은 여러 통의 밀서를 쓰느라 무척 바빴다. 어느 덧 집무실 책상 위에 5통이 넘는 밀서가 쌓였다. 

탁.

“어쩌면 유럽 종교전쟁은 정말 어이없이 끝날지도 모르겠어... 스페인이야말로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구교도의 맹주였으니... 그리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맥은 곧 끊길 것이다. 내가 원치 않아도 프랑스와 스페인 귀족들이 모두 그걸 원하니... 결국 그 다음엔 스페인의 왕위계승전쟁이 터지겠지. 유럽 왕가의 혈맥과 혼맥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복잡하니까. 곧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리라!”

그의 무시무시한 혼잣말은 잠시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의 시선은 이제 호주로 향했다.

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을 위한 평화

1630년 8월 중순, 영국 런던.

찰스1세의 집무실.

“어쩐 일이오?”

찰스1세는 왕비 ‘앙리에타 마리’를 아주 냉랭하게 맞이했다.

앙리에타 마리는 프랑스 현 국왕 루이13세의 친누이동생으로, 두 사람 모두 ‘마리 드 메디치’의 자녀였다.

지난 1625년 결혼한 찰스1세 부부는, 혼인 초부터 종교 문제로 큰 갈등이 있었다. 

영국은 신교도인 성공회, 프랑스는 구교도 국가였다. 그에 따라 독실한 구교도 신자인 앙리에타 마리는 영국 성공회식으로 왕비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또한 왕비가 프랑스에서 데려온 수많은 구교도 수행원들의 비용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래서 말다툼 끝에 사제 1명과 시녀 2명을 남기고 모조리 돌려보냈다.

국왕 부부의 사이는 갈수록 냉랭해졌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비가 개인 구교도 예배당인 ‘서머싯 하우스’를 세우고, 모국인 프랑스 쪽 창가 주변을 자주 서성인다는 소문까지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찰스1세는 격분했고, 영국 귀족과 국민들까지 프랑스 출신 왕비를 좋지 않게 여겼다. 당연히 부부 사이는 갈수록 냉랭해졌고,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이번 역시 부부 사이엔 날선 대화가 이어졌다. 

“폐하! 지난 몇 년간 라 로셸의 위그노(프랑스 내의 신교도)를 대놓고 지원하시더니... 이제는 스페인과 손을 잡다니요?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위그노를 지원한 적도, 스페인과 손을 잡은 적도 없소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대는 영국 왕비이고 반드시 영국 편이어야 하오!”

“거짓말, 거짓말! 모두 거짓말입니다! 저는 속일 수 있겠지만 모국... 프랑스에서 모를 줄 아십니까? 이제라도 그만두세요.”

“닥치시오! 그대는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 왕비요. 다시는...”

...

잠시 후.

찰스1세는 버킹엄 공작을 불러 은밀히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리 영국의 이익이 너무 작아. 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버킹엄 공작은 찰스1세의 변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폐하! 아직 비밀협정문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또 이러시면 판이 완전히 깨집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도록... 내 의도는 대(對)프랑스 동맹을 깨자는 게 아니니까. 그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 또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버킹엄 공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한국에 원하시는 수정 조건은 무엇입니까?”

찰스1세는 혹시나 엿듣는 자가 있을까 두려웠는지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누군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다! 하늘이 부여한 세 나라의 왕이지. 그런데 내 왕권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 선왕이신 제임스1세께서 물려받은 것은 허울뿐이고 빚만 가득했다.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가 저지른 일에 선왕과 내가 고통 받아 왔다. 나는 강력한 왕권을 원해! 의회 없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도 강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걸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 감히 왕에게 권리청원을 내놓는 무리들과 어찌 상생하겠는가?”

지난 1628년, 라 로셸 위그노 전쟁 대패로 찰스1세가 엄청난 재정을 탕진하자, 의회는 ‘의회 승인이 없이는 과세가 없다’는 권리청원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찰스1세는 앞에선 수용하는 척 하다가 의회 해산으로 맞불을 놓았었다. 선왕 제임스1세와 마찬가지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찰스1세에게 의회는 눈엣가시였다.

현재 영국 의회의 주요 세력은 젠트리, 요먼(보통 독립자영농), 청교도 등이었다. 그야말로 헨리8세 이후부터 영국 사회의 실질적 지배계층에 해당했다.

버킹엄 공작의 가슴은 전에 없이 철렁거렸다. 그래서 벌벌 떨며 말했다.

“폐, 폐하! 그들은 왕당파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입니다...”

찰스1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더욱 확실하게 한국의 지원을 받아야지. 나는 의회를 무릎 꿇리고, 아니 아예 없애고 왕권을 확고하게 다지길 원한다. 또 최종적으로 칼레, 노르망디와 아키텐을 되찾고 싶어!”

“하지만 한국이 스페인에 패할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니야. 아메리카의 금은보화가 없는 스페인이 뭐가 무서워? 또 한국은 멀어도 너무 멀어.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스페인이 함정에 빠진 게 분명하다. 한국 입장에선 지금 스페인 무적함대 상대하기에도 바빠야 정상이야! 그런데 승리를 전제로 대(對)프랑스 비밀동맹까지 결성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스페인 따위는 얼마든지 상대할 여유가 있다는 뜻이잖아! 어서 내 말대로 해.”

“아...알겠습니다.”

“버지니아 따윈 한국에 줘 버려도 돼! 성가신 의회를 없애고 프랑스 옛 영지를 되찾을 수 있다면...”

...

같은 시각, 서머싯 하우스.

앙리에타 마리는 한참 고심 끝에 편지를 썼다. 

그녀는 스페인과 외교적 밀담을 나누는 찰스1세가 의심스러웠다. 거기엔 그녀가 영국 왕비이기 이전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였던 이유도 있었다.

그녀의 언니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스페인 펠리페4세의 왕비였다. 또한 다음 상속자인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부르봉 왕가의 생사대적임을 잊지 않았다.

‘흥! 나 이전에는 스페인과 혼인동맹을 추진했다더니...’

그녀는 찰스1세가 원래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까지 떠올렸다.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오라버니(루이13세)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앙리에타 마리는 자신에게 냉정한 찰스1세는 물론이고, 무슨 이유인지 매번 부부 사이를 이간질했던 버킹엄 공작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시녀에게 말했다.

“오라버니께 급히 사람을 보내야겠다.”

**

1630년 9월 초,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폐하! 박연 사령관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했습니다.”

아메리카의 낭보에 내각 대회의장이 기쁨으로 술렁거렸다.

웅성웅성.

하지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기뻐할 수 없었다. 아직 희망봉 연락선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제 결과는 뻔했다.

스페인의 선택은 아메리카가 아니라 호주였다. 

결국 그들은 단기결전, 호주 원정이라는 대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국왕인 나를 사로잡아 일거에 아메리카를 되찾고 그들의 패권을 과시하기 위함이리라!

내가 왕의 자리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었다. 

불확실성은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알 수 없으므로, 확률을 계산할 수도 정책을 결정할 수도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술렁이는 대회의장을 둘러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와미 은광에 이어 포토시 은광과 멕시코까지 한국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왔다. 이제 세계 은 무역의 정점은 스페인이 아니라 한국이다. 

나는 확신했다. 

이대로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한국이 최고 경제 강대국이 되는 것이다. 세계패권국의 흥망성쇠는 결국 돈에서 나왔다.

세계의 역사는 항상 전쟁으로 시작되고 전쟁으로 끝났다. 하물며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거대한 전쟁이다. 원래 역사에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도 그렇고, 그 후의 수많은 전쟁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패권을 두고 일어난 거대한 전쟁의 승자들이 결국 그들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스페인을 무너뜨리고 나면 한국의 해상패권에 걸림돌이 될 나라는 네덜란드를 위시한 유럽뿐이었다. 

그동안 나의 고민은 스페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럽이 한국의 부상을 가만히 놔둘 것인가?’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해답은 또 다른 유럽의 전쟁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전쟁은 또 다른 전쟁’으로 막는다.

사실 스페인의 몰락은 유럽30년 전쟁을 허무하게 빨리 끝내는 악수(惡手)일 수 있다. 아니 진정 악수다. 유럽의 전쟁이 끝나면 그들의 질시와 견제를 어찌 감당할까?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문제는 호주에서 대응하기엔 너무 멀었다. 스페인의 침략에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두려웠다.

그래서 북아메리카로 천도할 시간, 그동안 우리가 유럽의 간섭을 따돌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개노미와 런던공사는 고군분투하고 있으리라.

‘흠, 개노미와 런던공사는 내 지시를 잘 이행하고 있을까?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찰스1세와 네덜란드 사이의 알력을 잘 이용한다면...’

...

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제임스타운.

런던 버지니아 회사 집무실.

“에취!”

김자점은 개노미의 갑작스러운 기침에 빙글거리며 말했다.

“부총독 각하께서는 역시 양반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려. 제가 각하 생각을 하니 바로 재채기를 하시다니... 참으로 용합니다. 하하!”

“친한 척 하지 마시오.”

“섭섭합니다. 그동안 쌓인 정이...”

개노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지시하신대로 제임스타운 북쪽으로 수도가 될 만한 곳들이 여럿 있다. 하필이면 김자점 저 화상이 찾아내서...’

그때 김자점이 무슨 생각인지 개노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개노미는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묵묵히 지켜보았다. 결국 참지 못한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김자점이었다.

“흐흐, 그나저나 각하께선 재주 한 번 좋습니다.”

“흥! 무슨 말이오?”

“버지니아 총독, 로크 남작 말입니다. 돈이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지 않습니까? 가난했던 시골귀족을 그리 만들어 놓다니 대단해, 아주 음, 훌륭해!”

김자점은 말하다 말고 손뼉을 치며 다시 말했다.

“이 김자점이 울고 갈만큼 수단이 대단합니다!”

“서인의 영수나 다름없던 분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아닙니까?”

“어쨌든 각하께서 생각을 돌리셔서 다행입니다. 각하와 저는 폐하의 충직한 신하라는 점에서는 한 마음 한 몸이나 같으니까요.”

“거 참, 쓸데없는 소리를 또...”

“제길 관둡시다! 각하께서 아니라면 아닌 거지. 정말 아쉽군요. 곧 우리의 생각이 같다는 것을 입증해 줄 사건이 터질 시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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