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스페인 무적함대가 희망봉 요새(모루)를 힘껏 두드리는 동안 그 배후를 기동함대(망치)로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었다. 그런데 마침 거대한 허리케인이 몰려왔던 것이다.
사흘 전, 스페인 무적함대의 도착 전에 출격했던 기동함대는 그 행방이 묘연했다.
이광상은 결국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흐흑, 이 녀석들, 너희는 살아 있느냐! 반드시, 반드시 살아서 돌아 오거라!”
...
이른 아침, 알 수 없는 바다.
점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다의 색은 하늘을 닮아 어두컴컴했고 파도는 다소 잔잔했다.
“어이 괜찮나? 어서 눈을 떠봐!”
“끄응.”
“우하핫! 살았다. 살았어.”
웅성웅성.
승리 호는 만신창이가 되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었다. 돛은 온전한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고, 곳곳에 부서진 흔적이 흉물스러웠다. 솔직히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용했다.
선원들은 무시무시한 허리케인을 만나 사흘 동안 조류에 휩쓸려 하염없이 떠내려 왔다. 그들은 꺼매진 얼굴을 하고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위로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그때 돛을 살피던 장루원(돛을 담당하는 선원) 하나가 외쳤다.
“함장님! 북동쪽에 배가 보입니다.”
고길동 함장은 장루원의 보고에 즉시 망원경을 들어 북동쪽 해상을 살폈다. 그곳엔 기동함대 소속으로 보이는 배가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사실 이 망망대해에서 더 이상 살필 것도 없었다.
“조타수! 타륜 상태는 어떤가?”
조타수는 잠시 볼을 씰룩거리더니 대답했다.
“네 함장님! 그럭저럭 쓸 수 있습니다.”
고길동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북동쪽으로 기수를 돌리라 명했다.
“흐흐흐, 북동쪽으로 간다! 어서 동료를 구하러 가자. 승리호! 전속력으로.”
함장의 명령과 동시에 승리호 선원들은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선원들은 돛을 펼치고 항해 준비를 마쳤다.
역시 그들은 기동함대, 그 중에서도 최정예 프리깃함 승리호의 선원들이었다.
펄럭!
철썩!
쏴아아!
“승리! 승리! 승리!”
승리 호는 선원들의 억센 구호와 함께 바다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
1630년 8월 중순, 영국 런던.
찰스1세의 집무실.
“폐하! 이거 뒤통수가 얼얼합니다. 저희는 영국을 동맹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네덜란드 특사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네덜란드의 나사우디츠 백작이었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찰스1세를 만났다. 그의 목소리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찰스1세는 그의 독설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환영했다.
“하하! 먼 길에 고생이 많았소. 그렇지 않아도 귀국의 브레다 탈환을 축하하는 특사를 파견하려고 했었지. 진심으로 축하하오!”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이마에 혈관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찰스1세의 공식 답변을 요구했다.
“폐, 폐하! 이번 브레다 대학살에 대해서... 저희 네덜란드 공화국이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총독께서는 영국이 프랑스와 손을 잡았음을 의심하고 계십니다. 이 역시 합당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그때 찰스1세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
짝짝!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찰스1세의 무례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경악하고 말았다.
“아...알바 공작? 어찌 그대가 영국에...”
새로 등장한 인물은 스페인의 대귀족 알바 공작이었다. 알바 공작은 에른스트 카시미르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제가 영국에 오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존경하옵는 찰스 국왕폐하께서 초청해주셨으니 무조건 와야지요.”
찰스1세도 알바 공작을 반갑게 맞이하며 다시 말했다.
“두 분 모두 내 귀중한 손님이오! 자자 차 한 잔씩 들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낮게 신음하며 말했다.
“으음, 알바 공작께서 하신 말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후후후, 자세한 것은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찰스1세는 알바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후후, 알바 공작의 말대로 펠리페4세는 사경을 헤매고 있소. 또한 그의 왕비는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루이13세의 친누이)고 왕자는 겨우 1살짜리 ‘발타사르 카를로스’지. 그대도 다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에른스트 카시미르도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찰스1세가 말하기 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그저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심정으로 되물었을 뿐이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를 빼앗기고 난 후, 국왕뿐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사실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과 은이 없다면, 스페인의 국력은 정말 보잘 것 없으니까.
그런데 후계문제까지 불안했다.
왕비는 프랑스 인이고, 왕자는 너무 어렸다.
그때 알바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만약 프랑스를 가만히 놔두면 스페인은 곧 루이13세의 손아귀에 떨어질 거요! 간신히 늑대를 몰아냈는데, 새로 사자를 불러들인 꼴이지 않소?”
찰스1세도 거들었다.
“흐흐흐, 알바 공작의 말이 맞소! 합스부르크의 양면 포위를 벗어난 프랑스, 국내의 합스부르크 영지를 모두 집어 삼킨 프랑스... 이것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군! 그런데 스페인까지 프랑스의 영토가 된다면? 그건 악몽이지. 정말 생각하기도 싫어. 이젠 합스부르크 왕가 대신 부르봉 왕가가 유럽을 지배하는 거야!”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프랑스를 상대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자는 겁니까?”
짝짝짝!
찰스1세와 알바 공작은 박수로 대답했다.
그러나 에른스트 카시미르는 의아한 듯 다시 물었다.
“하, 하지만 당장은 프랑스의 힘이 필요하지 않소?”
그때 찰스1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대(對)프랑스 비밀동맹 아닌가? 우리는 첫째, 스페인이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해! 둘째, 스페인의 정당한 왕위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닌 스페인 전통 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독립과 진정한 통일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다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야!”
알바 공작도 말을 덧붙였다.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을 완전히 뿌리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서로의 목적을 잊지 않으면 되겠지요.”
“...”
“...”
결국 그들은 손을 잡았다.
...
다음 날, 찰스1세의 집무실.
찰스1세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흥! 과연 한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런던 공사 신준묵은 빙긋 웃으며 말을 아꼈다. 찰스1세는 신준묵을 노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의 요구대로 대(對)프랑스 동맹을 제의하긴 했다. 나야 위그노 전쟁과 한국에 진 모든 빚을 탕감 받는 조건이니 대환영, 대만족이야!”
신준묵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낮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혹시... 불안하십니까?”
찰스1세는 일순 흠칫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비웃으며 말했다.
“후훗! 내 입장에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까 그대의 제안에 응했을 뿐이야!”
신준묵은 다소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찰스1세에게 화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한국과 영국은 아주 오~랜 동맹입니다. 제가 생각해보면 폐하처럼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진 유럽의 군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국왕폐하께서도 한영동맹을 제의하신 것 아닙니까?”
“영한동맹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하하! 폐하께서도 인정하신 것 아닙니까? 스페인이 무너지면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합니다. 그건 필연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견제가 사라진 프랑스, 독립한 네덜란드를 영국이 무슨 수로 대항하겠습니까? 뜻이 같은 세력 간의 합종연횡이야말로 냉혹한 국제질서의 숙명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영국은 한국, 아메리카 연합회의와 함께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착각이었을까?
신준묵의 웅변에 찰스1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었다.
찰스1세와 신준묵의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신준묵이 떠나려고 할 때, 찰스1세가 은근히, 지나가는 듯 물었다.
“혹시... 우리 말고 다른 자들과 손을 잡은 건 아니겠지?”
“폐하!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조선의 당당한 사대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신준묵은 조선 사대부의 대쪽같은 기개를 뽐내며 찰스1세에게 장담했다. 찰스1세는 묵묵히 신준묵을 배웅했다.
...
그날 밤, 런던 공사관.
런던 공사의 집무실.
신준묵은 울렁거리는 배를 어루만지며 혼잣말했다.
“되도 않는 거짓말을 했더니 하루 종일 속이 울렁거리는군.”
쓱쓱.